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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벤트와 매일 (고전 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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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우리는 간혹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행사를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이벤트라고 표현하는 데 특별히 우리 개인으로는 일 년에 한번 생일날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축하해 주고 함께 해 줍니다.
그리고 한 번 결혼이라는 이벤트도 있습니다.
그리고 휴가나 기타 명절을 통한 이벤트,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이벤트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가져다주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너무 자주 말고 간혹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같이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 충만 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엡 5:18절에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간혹 어떤 분은 성령을 ‘성령 강림주일’이나 ‘특별행사 기간’에 강조하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신앙의 생명줄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최경주-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 분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지 않는 순간 자기방법이 나오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게 하십니다.(10)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 이러한 말들을 합니다.
특별히 떨어져 있는 쌍둥이 형제간에는 서로 비슷해서 음식이나 머리 스타일, 좋아하는 색상, 옷 입는 것 까지 비슷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것이 민감한 분은 사람들의 안에 있는 말이나 표정, 행동을 보고 그 마음을 읽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사정을 사람이 잘 알듯이 하나님의 사정,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아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성령과 함께 매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은 우리에게 이렇게 한다고 하십니다.

1. 은혜를 알게 하십니다.(11)

/////11절 후반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은혜는 스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베푸는 실체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얻고 자기 스스로 가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은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대상을 알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섬긴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구원과 영생의 은혜, 그리고 나아가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베푸시는 은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아니면 물질을 주신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소원을 주신 것입니까?
무엇은 은혜로 생각하십니까?
오늘 받고 싶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어떤 도시에서 있을 전도 대회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몇몇 목사님들인 가운데 한 사람이 무디 선생을 강사로 추천했습니다.
대부분이 이 제안에 찬성했지만 한 사람이 일어나서 나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마치 무디 선생이 성령님을 독점한 것 같습니다.”
그때 다른 한 목사가 “아닙니다. 무디 선생님이 성령님을 독점 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를 독점하고 계십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는 무디 선생님이 성령의 전으로 그의 육체를 헌신했을 뿐 만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버릴 줄 아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선령님께서 진실로 무디 선생을 독차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이야기에서 성령 충만의 권면을 받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아무도 성령님을 독차지하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온전히 독점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그 안에서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님의 일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나 같은 죄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나아가 주님의 일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감사해서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의 비밀과 그 은혜의 깊이, 넓이, 길이 높이를 알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셔야 우리가운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고 고백하게 합니다.

2. 말하고 가르치게 합니다.(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 15:18절 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가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요 자기 자신은 오직 그 분에게 붙잡혀 쓰임 받은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행하신 것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고 일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진리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 또한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 또한 내 지식과 경험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로 깨닫도록 역사하십니다.

간혹 저는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따분한 내용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름을 반복할 때, 별로 큰 의미가 없는 듯한 장면을 길게 설명하고 있는 본문, 이러한 말씀들을 소홀히 하고 대충 넘어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성령께 ‘무엇을 알게 하시고자 하십니까?’를 물으면서 나아갈 때, 그 안에 풍성한 은혜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치 거칠고 험한 밭을 갈다가 보물항아리를 발견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3. 하나님의 일을 보고 알 수 있게 하십니다.(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이러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 있느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복을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치에 맞게 생각하려 하고, 경험되어진 범위, 입증되어진 범위 안에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봅니다.
그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 안에서 더욱 겸손하게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 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할 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광야로 가라고 지시하십니다.
지금 빌립은 광야로 갈 상황이 아닙니다.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빌립을 광야로 가라고 하십니다.
빌립은 그 음성에 거역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사마리아의 역사와 아직도 구원 받을 자가 많다는 점, 그리고 광야 복음은 서로 접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 등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 할 때 분명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빌립은 순종합니다.
그 순종의 결과 에디오피아의 내시 재무장관을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게 됩니다.
그 결과 한 나라가 복음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일이 역사 속에 일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과 이치에 따라 움직입니다.
자기 생각에 따라 계산하고 판단해서 움직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에 미항이라는 곳에서 머물게 됩니다.
이들이 여기서 머문 시점은 10월 중순이 지난 시기입니다.
여기서 선장과 선원들은 다른 항구, 곧 뵈닉스라는 항구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항구에서는 겨울나가기 매우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연안은 11월이 되면 겨울철이 되어 일기가 불순해 다음해 2월까지 항해 할 수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겨울이 되기 전에 빨리 화려하고 번창한 항구로 가서 겨울을 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성령께서 항해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 마음을 호송하는 백부장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듣습니다.
아무래도 바다와 항해에 대해서 그들만큼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없었고, 환경적으로도 그 시점에 순한 남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바다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표류하다가 간신히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지식과 경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고 초월해서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지식과 경험이 합 하다고 말씀하실 때 그렇게 움직이고, ‘그것이 옳지 않다. 내 뜻을 따르라’고 하실 때 그 때에 우리는 그 분의 음성을 청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결코 합리적인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성경의 시작부터 끝까지 볼 때 우리는 그것에서 합리적인 사건을 과연 몇 가지 볼 수 있는지요?

미국 켄사스주 공립학교에서는 더 이상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진화론은 사람의 지식으로 입증할 수 없는 창조론을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 의해서 만들어 낸 가설입니다.
이 가설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설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 십자가와 부활, 승천, 초대 교회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들, 이것을 사람들의 이성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성령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방관하고 구경할 것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성을 재건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가 조롱하고 훼방하는 듯  한 자세로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그것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에는 불가능과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꺾일 수 없습니다.

***** 시카고의 어느 상점이 화재가 나서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 상점이 이제는 폐업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간판이 내 붙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집의 모든 것은 다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이 계속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실망하고 슬퍼 할 때에도 성령의 사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언제나 새로운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믿음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 어느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멉니까?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며, 또 우리에게서 떠나는 시간은 얼마나 거립니까?”
그 질문을 받은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깜깜한 방에서 불을 켜 보십시오. 순식간에 방안이 밝아집니다. 그렇다고 어둠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다시 불을 끄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빛과 어둠 간에 거리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나타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간은 순식간입니다. 마귀는 결코 구만리 장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이 있으면 마귀는 그 즉시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빛이 없으면 마귀는 순식간에 우리에게로 다가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빛이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우리 삶에 모셔 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김포중앙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는 매일 이 성령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은 이벤트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주일 을 전후해서, 아니면 특별한 성령 집회를 통해서만 듣고 깨닫고 하는 이벤트적인 것이 아닙니다.
매일 성령입니다.
매 시간 성령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살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강해질 수 있고 우리가 인간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겨 나가고 싸워 나갈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잃은 영혼을 찾는 길도 이것밖에 없습니다.
매일 성령 충만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매일 성령과 함께 한다는 의식 안에서 그 분께 도움을 청하고 묻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믿음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김포중앙교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이 삶 속에서 성령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 성령께서 여러분을 은혜의 감격 안에서 떠나지 않으시게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으로 복음을 말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박 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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