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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어야만 합니다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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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말이 있습니다. 동물이 자신의 서식하는 장소나 산란과 육아 등을 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다시 그 곳으로 되돌아오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 가장 대표적인 동물이 ‘연어’입니다. 연어는 자신이 알에서 깨어나 먼 바다에서 살다가도 알을 낳을 때가 되면 고향 강물로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그토록 여러 곳에 다니다가도 기가 막히게 처음 태어난 곳으로 거의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어의 이런 회기본능을 여러 가지로 연구하지만 결론은 결국 신비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말 못하는 동물도, 하찮은 미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어찌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고, 생명의 본향을 찾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사람에게도 분명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종교심’이라고 말합니다만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믿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믿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능력의 한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당시 야이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소문을 듣고 달려와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님은 야이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딸을 사랑하셔서 그의 가정에 기적적인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본문의 주요내용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당시 야이로의 당면한 문제를 통해 그가 믿고, 또한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습니다. 그 가운데 우선적인 것이 바로 인간능력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야이로에게 있어서 딸은 생명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로서의 야이로는 최선을 다해 딸을 살리려고 노력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를 소개할 때 ‘회당장’이라고 짤막하게 언급합니다. 당시 회당장의 위치에서 그가 딸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그가 회당장으로서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이기에 딸을 위해 많은 재물을 투자했을 것입니다. 그가 회당장으로서 발이 넓은 사람이기에 이곳저곳에 수소문해서 아마 전국에서 용하다는 의원을 거의 만났을 것입니다. 그가 회당장으로서 누구보다 종교심이 강한 사람이기에 날마다 회당에 엎드려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수고했지만 결국 그의 능력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 한계에 부딪혀 주님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님을 믿게 된 동기였습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 바로 이것이 그를 주님에게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랑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만으로 줄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다 할 것 같지만 되지 않습니다. 돈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힘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지로 가정을 세우지 못하고, 자녀를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분명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이 한계를 알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내 자녀와 가정과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처음 주님을 만나던 날 그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기잡이에는 천재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날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안 되는 것을 그가 알았습니다. 프로중의 프로였던 베드로가 그날 자기 능력의 한계를 통감하던 그 날 밤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만약 그 날에 자기 능력으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면 그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또 믿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더 많이 고생하고, 더 많이 인생을 헤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자기 능력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 그는 주님을 보게 되었고,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인간능력의 한계,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힘이 있다고 거드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내 능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 겸손히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내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그분을 믿어야 하고, 전폭적으로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빨리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을 붙잡고 믿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죽음의 한계입니다. 여기 본문의 사건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다시 살리셨지만, 먼저 죽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죽음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오늘 그런 관점에서 죽음을 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죽음을 보았는데,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보면서 야이로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결국 이것이 주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간능력의 한계와 함께 죽음의 한계,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동기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평범한 진리이지만 사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깨닫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합니다. 죽음이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죽음의 '죽'자도 꺼내려고 하지 않고, 죽음의 현장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생의 문제가 바로 죽음입니다. 히브리서 9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간은 누구라도 죽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가고, 돈 많은 사람도 끝날 때가 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죽고, 오래 살려고 불로초를 먹던 진시황제도 갔습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늙었다고 빨리 가는 것이 아니고, 젊었다고 결코 나중에 가지 않습니다. 노인도 가고 어린아이도 죽습니다. 병든 사람만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도 죽습니다. 죽음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음을 애써 피하려고 하지만 피할 길이 없습니다. 어느 날 캄캄한 밤에 갑자기 날아온 비수를 내가 맞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갑니다.

  그래서 죽음이 인간세계에는 가장 큰 메시지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침묵하게 하고, 죽음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죽음이 저 세상을 생각하게 하고, 죽음이 나의 결정적인 한계를 보게 합니다. 죽음이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죽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것은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구주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여기 4장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에노스 때라고 강조합니다. 왜 당시 사람들이 에노스 때에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에서 알려줍니다. 에노스는 사람의 이름도 되지만 히브리어 사전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니까 에노스 이전에 사람들은 자기들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도 결국 죽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내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한계가 결국 믿음의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결국 사람을 사람되게 합니다. 죽음을 모르면 죽고, 죽음을 알면 영원히 삽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염세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을 알아야 참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앞서간 선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알았기에 사랑했고, 용서했고, 헌신했습니다. 언제 죽더라도 부끄럽지 않기를 몸부림치며 살았습니다. 죽음을 알면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더 헌신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알면 우리가 풀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죽음을 알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내가 내 삶을 바르고 참되게 살 동기를 부여합니다.

  인간은 죽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빨리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죽음의 한계가 바로 믿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생명의 한계를 바로 알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미래의 한계입니다. 오늘 말씀은 야이로의 관점에서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반복되는 것으로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사건은 그가 계획한대로 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가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을 계획했을까요? 성경을 보면 물론 그가 주님을 만나러 나오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혈루증 여인의 사건을 보면, 당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온 것도 딸의 문제였지 않았습니까!
또한 주님을 만난 뒤 이제 한도의 한숨을 쉬며 주님이 빨리 자기 집에 도착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중간에 지연되는 것을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초조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마음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이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예측했을까요? 아이의 죽음을 보며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소망도, 꿈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풀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그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장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이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죽음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끝이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살아납니다. 본문은 이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죽은 아이를 보고 주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면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하시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자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병든 자를 살리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는 그가 계획해서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상한 일이 아니었고, 그의 의지나 뜻으로 계획하거나 진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고, 모두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전혀 예측할 없는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님을 더욱 잘 믿게 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인간미래의 한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우리가 어디에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득을 보겠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년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당장 내일 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우리가 어떻게 내일을 예측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 잘 나간다고 교만해서는 안 되고, 지금 어렵다고 해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내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그의 놀라운 계획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나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계획을 세워도 결국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의 계획만이 완전하고 확실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어려움이 언제까지 어려움으로 남지 않습니다. 오늘은 힘들고 어렵지만 내일은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더 나은 길로, 더 복되고 좋은 곳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께 중심으로 서 있으면 궁극적으로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믿어야만 하는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 죽음의 한계 때문이고,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제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더 잘 믿고, 의지하면서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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