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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호랑이 앞에서 믿음을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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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8일 파키스탄 북동 지역에 진도 7.6의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피해지역이 광범위합니다. 사망자만도 3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구조 장비가 부족해서 피해는 더 커질 것 같습니다.

요즘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허리케인, 지진, 해일, 홍수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기상 이변들이 지구 온난화의 결과입니다.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연료를 소비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충격적인 사진 두 장이 소개되었습니다.

하나는 북극의 빙하 지역이 줄어든 위성사진입니다. 지난 30 년 동안 북극의 빙하는 3 분의 1이 줄었습니다. 알레스카 연구소는 이런 속도라면 이번 세기 내에 북극에서 얼음을 구경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사진은 아마존 강이 가뭄으로 말라버린 장면입니다. 열대우림 지역인데도 우기에 비가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물고기는 말라 죽고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밀림을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구 온난화를 다룬 재난 영화 ‘투머로우’가 보여주는 장면들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또 최근에는 조류 독감의 위협으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조류 독감이 인체에 감염되기 시작하면 대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조류독감 주의보를 내리고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구 재난에 어떤 대비책이 있을까요? 과학자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이미 늦었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충격적인 뉴스 앞에서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이 재난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봅시다.

인생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순항하다가도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나운 풍랑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배를 흔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 탔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배를 타고 건너가면 30 분 정도 걸리는 큰 호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셨는지 곤히 주무셨습니다. 짧은 이동 시간에 깊이 잠이 든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더구나 폭풍이 몰아치는데도 깨지 않으신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뛰어난 리더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각난 시간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은 하루 취침 시간이 세 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동차 운전기사를 두고 다니십니다. 그 이유는 이동 중에 짧지만 아주 단잠을 주무십니다. 그 몇 분의 깊은 수면이 부족한 잠을 충분히 보충합니다.

예수님도 바쁘게 사역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짧지만 이동하는 중에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띄워지는 배는 대부분 작은 고기잡이 배들입니다. 당연히 선실이 따로 없습니다. 지붕도 없는 갑판에서 한데 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 작은 배 안에는 물이 튀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도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같은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배에 물이 가득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폭풍에 놀라고 당황하면서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깨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깊은 잠입니다.
제자들은 폭풍 앞에서 모두 두려웠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같은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와 같은 풍랑 경험이 풍부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죽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나운 풍랑에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무서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배에 탄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은 운명입니다. 이 사나운 풍랑 앞에서 예수님인들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위급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주님께 의지했습니다. 워낙 다급한 상황인지라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만약 웬만한 풍랑 같았으면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뱃 사나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만난 풍랑 전문가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다에 대해서 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으십니다.

그러나 지금 만난 풍랑은 능숙한 뱃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작은 풍랑이 아닙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풍랑입니다. 자연 재해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은 풍랑 해결 그 이상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풍랑보다 더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면 먼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선 내가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막다른 길까지 몰려야 주님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신앙적 반응이 둔합니다. 진작 주님을 의지했으면 쉽게 풀렸을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다가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당황하는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고 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즉시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연을 제압하셨습니다. 이는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의 권세입니다. 자연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바다를 먼저 꾸짖고 나서 제자들을 꾸짖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을 먼저 꾸짖고 계십니다.

이 차이는 누가 더 잘못했는가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믿음 없는 모습은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데 바다가 그것을 못 알아보고 풍랑이 일으켰습니다. 바다도 야단을 맞을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제자 다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뒤집혀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환경에 맞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죽게 된 것은 환경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환경을 전혀 개의치 않으십니다. 사나운 바람과 파도에 배가 뒤집힐 정도가 되어도 마음의 동요가 없으십니다. 물결이 배를 덮쳐도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지도 않으십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의미합니다. 믿음은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교회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이들 모이는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이들이 줄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인구 감소 국가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아이를 잘 낳지 않습니다.

교회학교가 어려운 이유가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럴듯한 답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답이 아닙니다. 교회학교가 부흥하는 교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주말이 되면 가족 단위로 놀러갈 계획을 세웁니다. 주 5 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교회는 점점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답이 아닙니다. 핑계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결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정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면 반드시 그 교회는 부흥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은 말씀을 살펴봅시다.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쓴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조금씩 말이 다릅니다.

믿음이 적은 것과 없는 것은 다릅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있었던 자들입니다. 제자로 뽑을 때 믿음이 있으니까 뽑았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만난 지금은 믿음이 없는 자처럼 보입니다. 믿음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태는 많이 봐줘서 믿음이 적다고 표현했습니다.

또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믿음은 있는데 막상 사용할 때 믿음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믿음을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평소에 믿음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정작 필요할 때는 언제일까요? 믿음은 바로 풍랑 앞에서 필요합니다. 바다가 잔잔할 때는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누구나 편안하게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자기의 수단과 방법만이 자기를 구원할 수단이 됩니다. 그 한계가 넘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내 힘과 방법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 맡깁니다.

믿음이 정말 필요할 때는 죽을 때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어찌하지 못하는 한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맞설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 죽음에 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은 무엇입니까? 끝장입니다.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 죽음을 주관하는 어떤 힘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기다라는 것은 안타깝게도 지옥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다릅니다. 죽음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죽음 너머를 보장 받을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찬란한 미래의 세상이 열립니다. 그곳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선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 14:8>

죽는 순간에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평소에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평소에 믿음이 있다가도 위기 앞에서 흔들립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대한 보장과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잘 가지고 계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믿음을 꺼내어 사용해야 할 때 믿음을 보이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애굽 바로에게 10 가지 재앙을 보여주고 출애굽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0 가지 기적을 보면서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다 금방 홍해를 만났습니다. 갈 길이 막혔습니다. 뒤에서는 바로의 전차가 따라 붙었습니다.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 가게 되었습니다. 위기 앞에서 그들은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죽게 되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평소에 믿는다고 100 번 대답해도 소용없습니다. 결정적일 때 믿음의 행동이 나와야 합니다. 풍랑과 같은 위기 앞에서 믿음이 나와야 진짜입니다. 풍랑은 진짜 믿음을 가려내는 도구가 됩니다.

하필이면 주님이 필요할 때 주무셨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주님이 다행히 아주 가까이 계시질 않습니까? 주님이 깊이 잠드신 것은 어쩌면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흔들립니까? 풍랑입니다. 발버둥을 쳐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침착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주님이 주무셔도 괜찮습니다. 풍랑 속에서 주님이 주무신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심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제자들이 부르짖으면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이것도 어찌 보면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황망한 중에 살려달라고 부르짖은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안 속에서 하는 기도는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폭풍을 만나면 무조건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위기에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든든합니다. 떨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담대해집니다.

시편 107 편도 풍랑을 겪고 지은 시입니다.

그들은 야훼께서 하신 일을 보았고, 깊은 바다에서 그 기적들을 보았다.
그가 한번 명하시자 돌풍이 일고 물결이 치솟았다.
하늘 높이 올랐다가, 바다 깊이 빠졌다가, 사람들은 혼이 나서 넋을 잃고
술 취한 듯 비실비실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재주가 쓸모없이 되었다.
그들이 그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야훼께서 사경에서 건져 주셨다.
광풍을 잠재우시어 물결을 잠잠케 하셨다.
이윽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모두들 기뻐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바라던 항구에 다다랐다. <시 107:24-30>

풍랑을 만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와 같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풍랑을 피해가게 인도하시기보다는 견디게 하십니다. 풍랑이 잔잔해지면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소원의 항구에 도착합니다.

언제 우리에게 풍랑이 닥칠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은 이 풍랑에 대비하는 삶입니다. 평소에 믿음생활을 잘해야 긴급할 때 당황하지 않고 믿음을 써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습니다. 풍랑 앞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의 호령을 통해서 풍랑을 잔잔케 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십시다. (황 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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