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 6:35-44)

  • 잡초 잡초
  • 352
  • 0

첨부 1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정말 내 힘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사람이나 일이나 상황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떤 마음의 각오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이 결정이 됩니다.
하나는 내 자신의 무능과 여러 가지 어려운 주변 여건을 탓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히려 그 어려운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우리의 수준이 한 수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도 됩니다. 또 우리의 삶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 한사람 유지하기도 힘든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이 다른 미물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비록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어도 삶의 아름다움과 보람이 있고 특별히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꿈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힘차게 어려운 세상을 땀 닦으며 달려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을 합니다. 정말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많은 마음 치이는 일과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왔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과 상처들을 극복하고 살아왔기에 우리는 오늘 비록 각각의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극복하고 떳떳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에 관한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던 이와 같은 기적의 놀라운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개의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이 되어있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이와 같은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의 믿음에서 성숙한 성도로서의 헌신과 삶의 숙성을 이루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의 수준이 높아지고 기적과 능력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 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4복음서에 나오는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부류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먼저 우리가 본문을 생각해 보면서 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생각하여 같이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을 때 예수님의 접근방식과 제자들 혹은 다른 사람의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때가 저물어 배가 고플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않고 배고픈 사람들의 배고픔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고 싶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먹을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먹을 것을 주려고하는 그들의 접근방식이 전혀 상이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생각할 때 어떻게 저들을 먹일까 생각할 때 예수님으로서는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경험으로는 그들의 한계로는 음식을 사서 그들에게 주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계산을 했습니다. ‘예, 이백데나리온 어치 사면됩니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다가 우리가 저들에게 주리리까.’ 일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임금입니다. 그러니까 요즘으로 따지면 장정의 이백인분 임금인 것입니다. 요즘 하루에 5만원이라고 한다면 천만원입니다. 그러니까 오천 명이면 많으면 일인당 2천원어치 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맞지요? 계산하지 마세요. 다 해놨다고 말씀드렸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2천원어치씩 오천 명에게 주려면 천만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큰 돈이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돈이 있다한들 오천 명이 먹을 음식을 누가 예약도 안했는데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조그만 동네에 오천 명이 모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이 구름 떼같이 모였는데 어디를 가서 그 떡을 사다주겠습니까? 불가능해요. 우리 교회에서 구역장 수련회를 한 200-300명이 가게 되면 점심을 한군데 모여서 먹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천 명이 어디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보통 6,000명-6,500명 정도의 장년들이 출석을 하는데 우리 교회 교인들이 한꺼번에 밥을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딜 들어가서 한꺼번에 사먹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계산으로는 맞고 논리적으로는 맞아 보이는데 이러한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러한 것을 탁상공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경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왔던 삶의 경험과 지식과 한계 속에 갇혀서 오직 계산하기는 능한데 그것이 실제적인 힘은 없고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했지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자 따라서 합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 보고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써 기적과 능력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 3기 사역을 맞아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 우리에게 어떤 계산이 있고 어떤 계획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다’라는 것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계획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의 방법은 초월적이고 은혜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실 때 많은 사람이 좇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가는데 병이 고쳐졌고 능력이 나타났고 기적이 행해졌고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떡을 먹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방법으로 먹이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끝까지 계산을 버리지 못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저 계산에 딱딱 맞게 살게 해 주십시오’ 하는 걸 원합니까? ‘하나님 저 계산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을 원하십니까?

제가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계산대로 사는 것과 믿음대로 사는 것 여러분 지갑에 3만원 5만원 10만원이 있습니다. 늘 확실히 돈이 얼마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어요. 적으니까 분명히 알지요. 물건을 살 때에는 내 주머니에 얼마나 있지 이건 얼마지 정확히 계산해서 딱 맞추는 사람이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주머니에 돈이 이만큼 들어있어요. 물건 값을 볼 때 내 주머니에 얼마 있지 생각하지 않아도 사고 싶으면 사면 되는 것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계산해야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축복속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계산 못하는 사람 아닙니다. 충분히 계산합니다. 계산할 만큼 똑똑합니다. 그런데 계산할 수 있고 능력도 있고 계산도 되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계산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계산을 능가하는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상태를 보면 늘 계산하는 사람은 늘 그 수준에서 살아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늘 그런 수준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내 한계를 깨뜨려야 되는데 한계를 깨뜨리지 못해요.

여러분 어느 날 한순간에 훌쩍 크고 비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정말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늘 계산하고 늘 짜 맞추던 이와 같은 제자들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의 사건들이 새롭게 열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혜롭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계산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계산하는 사람들은 계산한대로 되고 믿습니다 하고 믿음대로 사는 사람은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도 우리의 헌신도 주님 앞에 축복도 계산대로 받고 계산대로 사는 사람들은 계산대로 받고 계산대로 살지만 하나님의 믿음대로 주께 맡기고 사는 사람들은 주의 영광과 은총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용 생각해 봅니다.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한번 생각해 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너희에게 무엇이 있느냐 했을 때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성경을 다 종합을 해 봅니다. 안드레가 어린 소년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어린 소년에게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보면 안드레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인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지 나 아무것도 없는데 끝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니 주변에 어린 아이가 있어서 그 어린 아이를 설득해서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를 주님 앞에 데리고 와서 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아무것도 없어. 난 할게 없어’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어도 뭔가 찾아볼까 하고 찾아보고 방법을 생각하면 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가진 게 없어도 내가 찾아보니까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년이 있어요. ‘주님 이것이 주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것은 ‘이건 정말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한탄이 아니라 ‘이것이라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왔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는 기대와 소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게 없어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 걸인을 향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이야기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이 말이 무엇입니까? ‘한 푼 주세요’ 하고 손을 벌렸는데 아무리 찾아도 한 푼도 없고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한 푼도 없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가면 되는데 뭔가 주고 싶었어요. 열심히 찾았어요. 그런데 뭔가 하나 주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아무것도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끝까지 찾아보니 그 가운데 무엇인가 잡히는 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 하지 마세요.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고 은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찾아도 찾아도 없을 때 마지막까지 찾았을 때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선지자 생도의 미망인이 엘리사 선생님 앞에 나옵니다. 남편이 선지 공부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고대 사회에 있어서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과는 전혀 다릅니다. 너무 너무 어려워서 빚을 졌어요. 빚값에 채주가 그 아들 둘을 종으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빚값에 두 아들까지 뺏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편 잃고 아들까지 빚값에 잃어버리는 이와 같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너무 슬퍼 엘리사 선생님에게 나아왔어요. 너무 가슴 아파서 그냥 나와서 정말 하소연하고 울기라고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사 선생님은 남편도 잃어버리고 빚값에 아들 둘 까지 빼앗길 형편에 있는 여인에게 ‘너희 집에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어서 다 잃어버리는데 집에 뭐가 있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합니까? ‘네 기름이 조금 있습니다.’ 그러자 ‘그릇을 빌려와라’라고 합니다. 그릇을 빌려왔어요. 그랬더니 ‘빌려온 그릇마다 기름을 따라라’ 그랬더니 빌려온 그릇 수만큼 기름이 가득 차서 그것을 팔아서 빚도 갚아서 아들도 살리고 또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 가지고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빚값에 팔려가는 집에도 조그마한 기름은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여인 집에 밀가루와 기름병에 기름이 조금 있었지요. 그것 가지고 축복해서 그 집에 밀가루 독이 마르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것 가지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있습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나는 이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 가지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없어.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고…’ 이것은 절대로 축복받지 못합니다. 가진 것도 많고 나는 누리는 것도 많고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누려 그런 마음에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 찾아 봤더니 어린 아이에게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야, 한번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가 보자. 뭔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우리 스스로의 삶에 우리의 소유의 성취에 대한 모든 판단과 평가를 스스로 내리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세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밖에 안돼, 부끄러워 안돼. 그것 가지고 내가 뭘 하겠나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요만한 능력밖에 없지만 ‘혹시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뭔가 역사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교회에 불과 합니다. 나는 미미한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 손에 들려 쓰시면 그 순간부터 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각각 오병이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저는 이 교회 자체가 하나님 앞에 오병이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말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 헌신되어서 이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제가 늘 입버릇처럼 말씀드리죠. 하나님이 주의 성도들을 축복하셔서 주의 교회를 축복하시고 주의 교회를 축복하셔서 주님 나라 역사의 확장에 공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교회의 삶이고 교회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와 감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다 생각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없으면 찾아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이것을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때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보고 굉장히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는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을 가지고 같이 나왔어요. 자기가 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보고 애쓰려고 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주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내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무엇이 있을까를 찾으면 줄 것도 많고 베풀 것도 많고 나눌 것도 많아집니다. 우리에게 방법과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포기하니까 점점 더 어려워지고 믿음은 점점 짐이 되고 내 능력은 점점 활발해 보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능력만 더욱더 귀해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축복은 나에게 언제나 멀리 있는 것 같고 결국 나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괴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은혜 받는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의 슬픔을 볼 때 전에는 그렇게 아프게 안 느꼈는데 이제는 내 가슴이 아파요. 전에는 다른 사람이 어렵고 내가 기쁘면 ‘감사합니다. 나는 저런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축복주시니 감사합니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축복을 받아도 다른 사람이 어려우면 내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축복 받은 것 하나만 가지고 감사할 수가 없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내 가슴을 찌르고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축복의 지경과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 하나 행복하면 됐는데 이제는 나 하나의 행복이 나를 만족하게 못해요. 나 하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작은 것 가지고도 주님 손에 들려 드리면 주님의 손이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리빙스턴이 헌금 시간에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려야 하는데 헌금이 없어서 자기가 헌금통 속에 쏙 들어갔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오병이어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오병이어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니까 우리한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 말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시겠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한 마음으로 헌신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봉사하며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조각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게 뭐 소용이 될까? 이게 뭐야? 너무나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주님께서 뭔가 하시면 하실 수 있을 것 같아.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쓰시면 쓰실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이것도 좀 하나님이 쓰시면 쓰실 것 같아. 여러분 우리 인생이 어디서 새롭게 출발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작은 실낱같은 가능성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들려질 때 그 때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뽑혀서 전쟁터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나가서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미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는 순간만 되면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고 내 자신을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소년을 생각해 봅시다. 보잘것없는 것 자기가 먼저 내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있는 작은 것을 헌신하므로 더 큰 헌신을 이루는 것을 말씀합니다. 보잘것없는 것도 주님 앞에 내어 놓을 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축복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으면 작은 것이지만 주님의 손에 들려 쓰이면 놀라운 축복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얼마나 내가 훌륭하다 훌륭하지 않다라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이라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오병이어,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는 어린 소년에게 충분한 한 끼 식사였어요. 여러분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오천명 먹었다고 해서 이 어린 소년이 떡 스무 개 먹고 물고기 스무 마리 먹었을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이 소년은 그래도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면 자기 배는 채울 수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도 나는 더 많은 것 못 먹어요. 그러니 소년은 기적이 일어나고 안 나고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무엇입니까? 내 것을 드려 많은 사람이 축복을 받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 하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나 어려움 당하지 않고 남한테 싫은 소리 안 해도 살 수 있어. 남한테 이러저러한 구구한 소리 안 해도 나 지낼 수 있어. 그것이 우리의 축복의 전부는 아니에요.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는 오병이어가 있어, 나 하나 해결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내 놓아서 많은 사람이 축복을 받게 할 때 진정한 축복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나 하나 챙겨서 살다 가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 소년이 이기적인 생각만 했다면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 모든 일에서 성공하고 잘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사람입니다. 내 것 가지고 나는 충분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하나 잘 된다고 기뻐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언제 믿음이 커지고 사람이 커지는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 보는데 내 가슴이 아파지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꼭 기도하잖아요. 헌아기도할 때 오늘도 4부 예배 때 헌아기도하는 데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이 따뜻한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 내 가슴이 아파지며 내 마음이 커지며 믿음이 커지며 하나님 나라가 내 가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괜히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될까? 어려운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우리에게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생각이 축복의 생각으로 우리들에게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안드레가 아무리 옆에서 얘기해도 이 소년이 자기가 마음 결정하지 않으면 안드레가 빼앗아서 가지고 올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들의 특징은 집착입니다. 아이들은 조그마한 것도 굉장히 집착합니다. 장난감도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집착하고 손에 넣은 것 절대 안 주려고 하고, 얘들이 얼마나 챙기는지 아세요? 집착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린 아이니까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조각, 어른 같으면 에이, 까짓것 한 끼 안 먹으면 돼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 마음을 열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에이, 이게 책임이고 사명이라고 하지만 그냥 난 도망칠 수 있어.’ 하고 도망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서 ‘난 절대로 도망치지 못해.’ 하고 어려움 가운데 어려운 희생과 헌신과 수고를 하는 사람, 이 사람들이 축복의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천명이 먹고도 예수님이 축도하셔서 12광주리가 남았어요. 그 12광주리 남은 것 어떻게 했을까요? 제자들보고 다 주워서 챙겨두라. 제 생각 같아서는 안드레가 이만큼 가져다가 소년에게 주었을 것 같습니다. ‘야, 너 때문에 모든 사람이 먹고 지낸 거야. 너 이거 가지고 가라’ 떡 스무 개 물고기 스무 마리 줬을 것 같아요. 성경에는 없는데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12광주리 다 남았는데 그거 다 뭐해요? 이 소년이 손해 봤을까요? 저는 손해 안 봤을 거 같습니다. 제가 안드레라도 ‘야, 너 참 수고했다. 너 집에 가지고 가서 좀 먹어라.’ 하고 떡도 주고 물고기도 더 줬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람 절대 손해 보는 것 없습니다. ‘아, 나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망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어차피 잃어버릴 것 하나님 나라에 쌓아 둔 것이라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의 시각을 달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 어린 소년처럼 내 작은 것이지만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필요할지 모른다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에 결단함을 통해 주님 앞에 드려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 소년은 이름조차 모릅니다. 그렇지만 2000년이 지난 우리들에게 그 모든 아름다운 행동이 입술에 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밥만 먹고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정말 밥 먹고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우리가 주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며, 아름다운 사랑과 영광의 은총을 이뤄가는가를 생각을 해봅니다.

거래에는 손해가 있지만 믿음에는 손해가 없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거래에는 손해가 있지만 믿음에는 손해가 없습니다. 작은 것 드릴 때 부끄럽지 않아야 큰 것 드릴 때 아깝지 않습니다.’ 작은 것 드릴 때 부끄럽지 않아야 큰 것 드릴 때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든지 늘 말씀드리죠. 평상시에는 상식으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할 때는 결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단으로 살아가요. 그런데 우리는 평상시에는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는 상식과 계산으로 살아요. 평상시에는 밥 먹을 때 마다 기도하죠. 언제나 ‘주여’ 그런데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는 기도 안하고 상식대로 평가해요. 이건 아니잖아요. 우리의 삶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역사를 바라보면 늘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의 능력이 어떻게 발휘되는가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정말 내 마음을 열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어 놓으며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하잘 것 없는 우리지만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려움이나 헌신이나 결단의 기회라는 것은 믿음의 양심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고 우리들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축복의 기회가 된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헌신과 결단의 순간에 그리고 믿음으로 이루는 삶의 순간과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산을 할 수 있지만 계산을 능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그리고 내 작은 것을 주님 앞에 헌신하였을 때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아름답게 살아갈 때 주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잘됨을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의 잘됨을 자랑하는 수준에서 이제는 다른 이의 아픔을 아파하는 마음의 수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되면 우리의 기쁨으로 여기는 수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제가 요즘 계속해서 숙성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깊이 익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귀한 믿음의 백성이 되어서 주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이루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 종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