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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꾸는 교회 (창 15: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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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넬슨 만델라가 취임했습니다. 전 세계인들은 인종 차별의 현장에서 흑인 대통령이 취임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백인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였고, 그들이 모든 권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10년 전 만해도 흑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1918년, 만델라가 시골에서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들은 아들에 대한 소박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처럼 이 아이가 커서 소몰이꾼으로 일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만델라가 12살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탬 부족의 추장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그 족장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에는 흑인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았는데 백인들이 이 사회에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평화가 깨어지고 흑인들의 자유가 상실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린 만델라의 마음속에 ‘나는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어. 내가 이 민족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라는 마음의 비전이 생겨났습니다. 한 어린 소년의 가슴 속에 간직되었던 이 비전은 75세가 되어서야 꽃 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비전을 가지고 살아갔던 또 다른 인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고 그의 아버지는 우상 제조업자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거룩한 비전의 음성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네 고향 본토 친척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는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세기 12장 2절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창세기 13장 14절의 “아브라함아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할 것이다.”란 아름다운 비전의 음성들을 연이어 들려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그 비전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계 크리스천의 인구는 무려 20억에 이르고 있습니다. 20억의 크리스천들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으로 땅의 티끌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비전을 갖는 것입니다. 비전을 갖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 소개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비전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그랬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이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거룩한 비전을 받게 되었고, 그 비전 때문에 사울 왕의 미움과 추격 가운데에서도 고난을 극복하며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노예로 끌려가서 갖은 고생을 다 하였지만 어린 시절 보았던,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하고 열한개의 곡식 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그 비전 때문에 그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자 다메섹에 가고 있을 때에 그는 환한 빛 앞에 고꾸러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님이 그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나는 너를 이방인을 위한 택한 나의 그릇으로 삼겠다.”는 비전의 말씀었습니다. 드디어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그는 하나님을 위한 비전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가족도 없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위해서 로마까지 달려가는 비젼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비전에 미쳐서, 비전에 붙들려 살아갔던 인물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생애에 비전은 참으로 소중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헬렌켈러라는 여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의 고통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우리는 위대한 인물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기자가 물었답니다.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러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제 얼굴을 보지 못 하고 귀로 설교만 듣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아내를 볼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자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 중의 복입니다.
  아마도 기자는 ‘맹인보다 더 불행한 일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에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질문 앞에 헬렌켈러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력은 있되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현대 리더쉽의 대가로서, ‘열매 맺는 지도자’란 유명한 베스트셀러를 낸 존 맥스웰 목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 아니라 비전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내일의 꿈이 없는 사람들, 미래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 “나는 어떻게 하는 것 마다 안 되지? 그래 난 재수 없는 인생이야. 내 인생은 어쩔 수 없어” 하며 자포자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일, 내게 안 될게 뭐 있어! 나도 할 수 있지. 내게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하며 늘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새롭게 도전 하는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비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영신교회에 부임하기 전, 영신교회의 목회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할 때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5110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5000명의 성도가 모여 예배하고, 1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10개의 개척교회를 세우는 비전은 제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전 이것을 여러분께 선포했고, 여러분은 기쁘게 ‘아멘’으로 받으셔서 우리 모두의 비전이 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이것을 위해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전은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한갓 헛된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신교회가 꿈꾸는 아름다운 비전이 이루어지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첫 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최우선입니다. 

  여러분 따라해 보십시오. “기도는 비전의 산실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비전은 기도할 때 받게되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늘 소망이 있고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름다운 비전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꿈 없이, 비전 없이, 미래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 보니 “너희가 얻지 못 함은 구하지 아니함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 때문, 즉 기도하기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공동체, 교회는 그들의 비전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꿈의 산실입니다. 기도는 꿈을 자라게 합니다. 기도는 깨어졌던 꿈을 다시 회복시켜 줍니다. 여러분에게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이 깨졌습니까? 다시 기도의 무릎 꿇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아멘!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위대한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자에게 가능한 '현실'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전은 우리의 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비전을 이루려면 의심하지 말고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1절, 2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멘.

  아브라함은 지치고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바로 앞 장인 14장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동방의 왕들에 의해 붙들려 갔을 때, 자기 집에서 키운 318명의 사병들을 데리고 가서 몇 만 명과 싸워 이겨 조카를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한번 치룬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언제 다시 공격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마음속에 자식이 없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자녀가 없으니 많은 군사력을 가지는데 한계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리고 네 후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그 이후로 무려 1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녀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자녀가 있어야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지, 자녀가 없는데 어찌 이루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의심하면서 이제는 내 하인 다메섹 사람 엘레에셀을 후계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적인 의심에 사로잡히혀 있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심은 우리의 꿈을 방해합니다.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빨리 응답되지 않을 때, 점점 더 내 삶에 어려움이 중첩될 때, 우리는 의심하고 꿈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은 꿈을 잃어버릴 때 가장 비참해 집니다. 
  다윗이 거룩한 꿈을 가졌을 때, 그는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그러나 꿈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자기 마음속에 움틀거리는 정욕하나 정복하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비전을 가졌을 때, 그는 나귀 턱뼈 하나를 가지고 불레셋 사람 천명을 무찌르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룩한 비전을 잃어버릴 때, 드릴라란 기생하나 다루지 못하는 비참한 인물로 떨어지고 맙니다. 
  엘리야가 거룩한 비전을 가졌을 때, 그는 갈멜산 상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당당히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심할 때, 비전은 상실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증거합니다.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장 1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의심하면 비전의 성취가 방해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방법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붙들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흐르니 마음속에 점점 불신앙이 일어나기 시작 했습니다. 16장에 보니,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여종 하갈을 취해서 아이를 낳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마엘로 인해서 이 가정에 더 큰 분쟁이 야기되고 맙니다.

  우리는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구약은 오래된 약속인 Old Testament, 신약은 새로운 약속인 New Testament!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붙들 때 우리는 비전을 성취해 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이 비젼을 이루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꿈이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들 이삭을 낳기까지 무려 25년 동안 묵묵히 기다리고 인내했습니다. 기다림의 대가, 기다림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아름다운 꿈을 이뤄가려면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루셔야 됩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5110의 비전의 꿈을 이뤄나가는 것도 그냥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꺼이 우리의 희생을 자청해야 할 몫이 남았습니다. 때로는 물질을 드리고,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힘들어도 전도해야 합니다. 5000명의 성도를 채우기 위해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치를 대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비젼이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비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살이 찢기어지는 희생을 감당하셨습니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거기에는 희생과 대가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취미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중등부 교사가 무더운 여름날, 골목길에 바람을 쐬러 나왔습니다. 한 중학교 아이가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아이 같습니다. 가만히 보니 1년 전에 나오다가 그동안 교회를 안 나온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겠는데 ‘너 왜 교회 안 나오니?’하고 물으면, 그 아이가 많이 미안해할 것 같아서 좀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넌 요즘 교회에 취미가 없니?”
  그랬더니 아이가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선생님은 신앙생활을 취미로 하시나요?” 한 방 먹은 셈입니다. 맞습니다. 신앙생활을 취미로 합니까?

  오늘도 어떤 이들은 신앙생활을 취미로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등산하는 취미, 영화 보는 취미, 연극 보는 취미, 쇼핑하는 취미, 주일날은 말씀 듣는 취미......
  여러분, 신앙생활은 취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걸어야 될 결단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아멘!  때로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 내어드려야 될, 그런 결단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천국의 삶을 위해서 이 땅의 삶을 희생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희생은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5110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특별한 또 다른 새로운 일을 계획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서 계신 자리, 주어진 자리, 사명의 그 자리에서 지금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흑인 중에 죠지 워싱턴 카버 박사라고 있습니다. 그 분은 농학 교수입니다. 미국 남부에서 목화 재배를 많이 할 때, 목화를 오래 경작하다보니까 땅이 산성화가 되서 토질이 나빠지고 목화 재배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벌레가 자꾸 생기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든 농민들이 그것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데, 이 조지 카버 박사가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땅콩을 심는 것입니다. 목화 대신 땅콩을 심었더니 그 산성화된 토양이 다시 기름진 땅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 첫 해 수확이 얼마나 많았던지 쌓을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농민들은 뛸듯이 좋아했습니다. 흑인이지만 죠지 카버 박사를 향해서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땅콩 농사가 너무 잘 되다 보니, 쌓을 곳이 없어지고, 곧 땅콩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땅콩을 소비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땅콩을 먹어서 소비해봤자 얼마나 소비하겠습니까? 땅콩을 맥주 안주로 먹는다고 해도 얼마나 먹겠습니까? 이제 쏟아진 것은 조지 카버 박사를 향한 비난이었습니다. “너 때문에 우리 농사 완전히 망쳤어. 네가 책임지라고.”말입니다.
  그는 그 때처럼 절망적인 순간이 없었다고 후일에 고백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을 꼬박 새며 연구하다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연구실 뒷산에 올라가서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하나님 저를 왜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왜 만드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원망스럽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조지 카버. 너는 너무 큰 것을 묻는구나. 네 형편에 맞는 작은 것을 물어라.’“작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럼 하나님 땅콩을 도대체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땅콩 한 줌을 가지고 연구실로 들어가서 계속 연구해보아라."
  그는 땅콩 한 줌을 가지고 연구실로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땅콩으로 새로운 생산품을 만드는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땅콩 버터를 만들고, 땅콩 구두약을 만들고, 땅콩 크림을 만들고, 땅콩 식용유를 만들었습니다. 무려 105가지의 식용품에, 200여 가지의 실생활품들을 땅콩을 재료로해서 만들어 냈습니다. 그 뒤로 땅콩이 무섭게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멀리 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가 있는 그 곳에서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비젼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멀리가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이 취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전도하는 일, 기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 바로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전을 이루는 지름길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의 상상력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5~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큰 상급이니라. 주위의 나라들이 너를 침공해도, 내가 너를 보호하는 방패가 될 것이다.’ 반드시 네 약속에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아브라함은 자꾸 우깁니다. “나는 무자합니다. 자식이 없으니 내 하인을 후계자로 삼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시곤 아브라함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서울 하늘에서는 별을 잘 못 봅니다. 너무 바쁘고 분주하게 사니 좀처럼 별을 볼 여유가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울을 벗어나 조금만 시골에 내려가도 별을 좀 맑게 볼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시내산 등산을 했었는데, 그 곳에서 바라본 하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쩜 그리도 하늘이 맑은지요. 또한 하늘의 별이 얼마나 초롱초롱한지...... 아마 아브라함도 그 별을 바라보게 하신 것 같습니다.
  “얘야, 저 별을 셀 수 있겠냐?”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셀 수 없지요. 없습니다. 하늘의 별은 셀 수 없습니다. 그 별은 바다의 모래알보다도 많습니다. 

  어떤 분은 우스갯 소리로 별의 개수가 840개랍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서남북을 보고 세는데 동쪽을 봐도 빽빽, 서쪽을 봐도 빽빽, 남쪽, 북쪽을 봐도 빽빽하답니다. 백백이 네 번이니까 팔백개 아닙니까? 또 하늘의 중심을 보니 여기 저기 별이 스물스물 하답니다. 스물 스물 즉, 20더하기 20이니, 40! 그래서 840개랍니다^^

  눈으로 보이는 별이 천억 개가 된답니다. 한 은하계 속에 천억 개의 별이 있는데 그런 은하계가 하나 더 있고 또 거기에 천억 개가 있답니다. 그러니 별의 수를 셀 수 있겠습니까? 셀 수 없이 많을 뿐입니다.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별을 보여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젼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를 칭찬하시고 그를 복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믿음의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리합니다. 
  여러분, 나의 어려운 처지만 보지 마시고 여러분이 앞으로 꿈꾸는 세상, 여러분이 소원하는 것들을 그리면서 상상하시길 바랍니다. 상상하는데 돈이 듭니까? 돈 한 푼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상상할 때!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투자할 때! 그 목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유명한 영성학자요, 신학자인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상력”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주셨습니다. 그 상상력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이는 누워 날아가는 새들을 보며 “사람은 왜 하늘을 날 수 없을까? 저 날아가는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없을까?”하고 상상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하늘을 날게 되었습니다.
  강에서 물고기가 강물을 여유롭게 헤엄치는 것을 보았을 때 “왜 사람은 물 속에 살 수 없을까?”라는 믿음의 상상력을 발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잠수함이 만들어 졌습니다.
  아름다운 달을 보며 ‘저 곳에서 토끼가 방아 찧네’하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는 “저 달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믿음의 상상력을 가졌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로케트, 우주선이 만들어져서 누구나 달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상상력을 가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람만이 역사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남들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앞 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유명한 디즈니랜드가 있습니다. 그 곳을 만든 월트 디즈니는 원래 참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꿈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너무 가난해서, 춥기만 한 남의 집 창고를 빌려, 연필 한 자루, 도화지 한 장을 구해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 고픈 중에 쥐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그 쥐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려 미키마우스라는 캐릭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두 아이를 두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과 놀이터를 가게 되었는데 그 놀이터가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데가 없었습니다. 놀이시설은 위험하고, 불량하기 짝이 없고, 뭐 하나 편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곳은 도저히 아이들이 꿈 꿀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는 “내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놀이동산을 만들어야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15년 후, L.A 근교에 디즈니랜드가 세워졌습니다. 저도 가본 적이 있는데,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놀이동산이 얼마나 큰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없는 게 없는 참 멋진 곳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두 번째 디즈니랜드 격인 ‘디즈니 월드’가 올랜드에 세워졌습니다. 그것을 위해 꿈꾸고, 계획하고 추진하던 월트 디즈니는 개장 5년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디즈니 월드’가 개장되었습니다. 개장을 축하하는 모임 석상에서 한 인사는 월트 디즈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월트 디즈니가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 때 미망인 디즈니 여사는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남편 디즈니는 이미 이 아름다운 광경, 이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5년 전에 그는 이미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아름다운 성전 건축을 준비하면서 이 동산위에 아름다운 동산이 세워진 것을 이미 보고 있었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성전에 많은 성도가 함께 예배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상상력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기도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으로 힘든 시대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칠흙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습니다. 도대체 희망이라곤 발견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어두운 시대에도 비전을 가진 사람,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사람,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 어려운 시대를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이 막혔을 때 위를 바라보십시오.
  하늘의 별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름다운 꿈과 비전을 가지고 이 어려운 세상을 승리해나가는, 영신교회에 주신 아름다운 비전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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