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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요 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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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예수님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의 은총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이 요한보다 예수님에게 더 많이 밀려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퍼트리기 위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일해도 부족한 마당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 사이에 시기와 질투의 미끼를 던져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풍문은 예수님과 세례요한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흉계였음을 주님은 이내 아셨습니다. 주님은 이제 또 떠나야 할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했습니다.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잠시 고개를 떨구었을때 주님의 마음은 더 멀리 황량한 사막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침 일찍 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야 합니까? 이제 막 사람들이 세례받기 위해서 몰려오고 사역이 한 참 물올랐는데 왜 굴러온 밥상을 차버립니까?”고 심통이 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다독거리면서 아무 말 없이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셨습니다. 이제는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남아있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떠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병으로부터 고침 받아서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내 이름을 새기며 내 존재를 매일 아침마다 알리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잠잠하게 내 영혼을 올려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잘 되고, 부흥하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곳을 붙잡으려 합니다. 반면에 미진하고, 아픔이 있고, 그래서 눈물이 있고, 수고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익숙하지 않은 곳, 새로운 곳, 그래서 두려움이 있는 곳, 그래서 더 기도해야만 하는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이기에, 그 곳은 새로운 곳이기에, 그 곳에서 내가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모르기에, 그 곳은 두려운 곳이기에, 그 곳은 나의 눈물이 필요한 곳이기에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곳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목적지가 갈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머리속에는 유대로부터 갈릴리까지의 긴 여정이 즉시 떠올랐습니다. 그 먼 거리를 걸어갈 때 볼 수많은 풍경들과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유대 지경을 벗어나 갈릴리까지의 긴 여정을 해야 할 자신들의 얼굴도 떠올려 보았습니다. 매우 힘들고 지칠 것이 분명한 그 긴 여정. 그들이 지불해야 할 시간, 비용, 육신의 피로..... 

  한참동안 이 모든 것을 상상하고 있는데 그들의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들어 선 것입니다. 그 길은 유대인들에게 이미 모욕과 부정한 길로 알려진 사마리아의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침략 때부터 이방민족과 결혼을 하고, 앗수르의 정책의 영향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혼합주의가 성행했습니다. 순수함과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유대인들에게 그런 사마리아는 다가가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도시였으며, 상종하지 못할 문둥병자와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길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왜 이 길로 가야만 합니까?” 어느 제자가 답답한 듯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조용히 웃고만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눈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늘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긍휼의 눈빛으로 바라보셨던 그 분의 그윽한 눈 빛, 그 눈빛과 함께 피어오르는 한 줄기 강렬한 불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넘어가야할 가시가 목에 걸린 듯 그 분의 마음에 걸린 영혼 때문에 아픔을 느끼시는 듯 했습니다.

  “나는 이 길로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마리아 길을 피해가는 정당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은 사마리아 길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지나가시는 길이 진정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오직 그 사마리아길이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과 똑같이 우리를 그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들은 다른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곳은 우리가 곧바로 진입해야할 길입니다. 그 곳은 우리가 버리고, 모른 채하고, 우회할 수 없는 곳입니다.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길을 회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쏟아집니다. 제자들은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 속에서 사람들의 수많은 비난과 모욕을 받으셨던 그 분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른 광야 길을 걸어가시는 그 분의 뒷모습. 흙먼지 이는 광야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시는 그 분의 발자국. 만약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를 미리 볼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면 제자들은 더 가슴이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왕의 왕, 주의 주이신 그 분이 광야 길을 가다가 노숙자의 발과 같이 땀과 먼지에 범벅이 된 모습을 보았더라면 제자들은 가슴이 더욱 아팠을 것입니다. 먼 길을 여행하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면서도 자신보다 더 목마르고 더 배고픈 한 영혼을 찾아가는 저 분. 그 발걸음이 하나님의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제자들은 목이 메었을 것입니다.   

  며칠을 지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도착했습니다. 때는 정오쯤이 되었습니다. 한 낮의 열기는 더욱 사람을 지치게 하고 뜨겁게 달구어진 대지위에 약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은 사람들을 집에 머물러 있게 만들었습니다. 길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낮의 열기는 거리를 텅 비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친 육신을 잠시 우물가에 앉아 쉬셨습니다. 이윽고 먼발치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나타난 한 사람, 여자가 분명했습니다. 다른 여인들처럼 이른 새벽이나 초저녁이 아닌 이 뜨거운 한 낮에 아무도 없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오는 것을 보면 분명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우물가에 앉아 있는 한 젊은이를 보자마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에 이골이 났지만 여인은 습관과 같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그 자리를 빨리 떠나려고 행동이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여자에게 말씀합니다. “물을 좀 주시오.”

  여자는 흠칫 놀라 예수님 쪽으로 고개를 돌려 예수님을 주시했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과 여인이 눈이 마주쳤습니다. 여자는 마음을 닫고 자신의 모습을 숨겨왔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의 눈 속에 담긴 슬픔과 아픔과 두려움과 눈물과 상처와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정서와 영혼의 고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 왜 지금 이곳에 물을 길러 오는지, 그녀는 지금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녀는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그녀의 목마름을 무엇인지, 그 영혼 속에 있는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무엇인지까지도....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한 그 분의 음성 속에서 자신의 갈급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마른 것은 난 데... 나는 이렇게 목이 마른데....”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음성은 그 여인의 영혼의 갈증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여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대답을 듣는 순간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나와 함께 사는 남자도 내 남편이 아닙니다.”라는 그 여인의 부끄러운 고백을 듣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영원한 목마름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 곁에는 오늘도 이 여인과 같이 세상의 다른 것들로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버림받았다는 피해의식으로 사로잡힌 사람들, 다른 사람들과 관계맺음에 실패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비난 받고, 성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있는 이 빈 공간과도 같은 영혼의 갈증을 세상의 것으로 해결을 시도하는 사람들.

  쾌락, 명성, 지위, 소유, 권력, 특권, 부, 가족, 친구, 자녀, 명예, 경력, 교회, 동호회, 취미, 운동, 건강, 성, 인정, 평판, 교육, 흥미, 이 모든 세상의 우물들, 야곱의 우물들과 같은 것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내 목마르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모든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생수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비난을 각오하고, 쉽고 편한 길을 놔두고, 일상적이고 익숙한 길을 뒤로하고, 아무도 찾지 않은 사마리아 길을 향해 가신 이유는 오늘 여기에 이렇게 목말라 하는 한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곁에 이런 영혼들이 즐비하다면 우리는 사마리아 길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아무리 거세고 두려워도, 거기에 목말라하는 한 영혼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사마리아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도 그들이 세상의 두레박으로 물을 길으며, 그들의 영혼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 두레박질을 하지만, 하면 할수록 그 두레박에 담긴 세상의 것들로 인해 더 타는 목마름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충만한 생수 되신 예수님을 퍼 올릴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두렵습니다. 사마리아길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두렵다고, 내게 아픔이 있고 부자연스럽다고 전도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포기하다보면 우리에게는 정말 돌이킬 수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지난 한 주간은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제가 거의 한 달 정도나 어깨와 뒷목이 뻐근했어요.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근육이 뭉쳤고 기분도 아주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병원에 가기도 하고,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았지만 잘 낫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장로님께 물었지요. “장로님 왜 이렇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니까 그 장로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죽을 준비하시죠!” 좀 심하다 싶었지만 저는 죽을 준비했습니다. “전복죽”을....

  그것을 먹고 열심히 운동하기로 했습니다. 근육이 뭉치고 아픈 것은 운동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운동을 하는데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정말 아프고 괴로웠어요.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산에 가서 미친 사람처럼 몸을 꼬고 비틀고 하면서 운동을 하니까 일주일이 지나니까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만약 아프다고, 근육이 땡기고 괴롭다고 그만했다면 아마 저는 더 악화된 상태로 병원에 가거나 그 고통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괴로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것을 하려고 하면 우리 영혼이 삐걱거림을 느낍니다. 잘못된 것인데 우리의 모습은 그렇습니다. 아픔이 전해옵니다. 내 마음이 갈등합니다. 부자연스럽고 왠지 회피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움직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아프다고 그것을 가만 그대로 두면 그 부분은 영영 불구가 됩니다. 아프다고 사용하지 않은 곳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그 한 부분으로 나의 영혼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픈 그 한 부분으로 인해 나의 영혼은 점점 더 아파올 뿐입니다.

  우리는 내가 내딛는 길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두렵다면 주님의 발자국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걸어가신 그 발자국을 따라가십시오. 주님이 내딛은 곳을 내가 따라간다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그 분이 하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우리도 따르기 원합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주님은 잘 아십니다. 가난이 어떠한지를...
스스로 통과 하셨기에 가난에 처한 내 형편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잘 아십니다. 사망의 두려움이 어떠한지를...
골고다 십자가에서 사망의 터널을 통과하셨기에 위험에 처할때 내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잘 아십니다.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육신의 몸으로 스스로 삶을 체험하셨기에 삶에 멍에를 지고 험한 세상을 질때 내 삶의 무게를 잘 아십니다.

주님은 잘 아십니다. 핍박이 어떠한지를...
그 끝을 겪으셨기에 핍박을 받을 때 내 마음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잘 아십니다. 세상 유혹이 어떠한지를...
낮은 자리에서 굶주릴 때 유혹의 시험을 받으셨기에 유혹을 받을때 내 갈등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잘 아십니다. 전도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든 것 베풀어 주시고 스스로 전해보셨기에 복음 전함으로 천대 받을때 내 원함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먼저 겪으셨기에 다 아십니다.
우리는 주님 발자국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나 사랑하십니다. 
- 어느 무명인의 시 -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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