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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 (미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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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 또는 물질을 통한 보상심리의 응답으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가 보상입니다. 첫째는 “남에게 진 빚 또는 받은 물건을 갚는 보상(報償)”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이용하여 “어떤 행위를 촉진하거나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사람이나 동물에게 물질이나 칭찬”을 주는 보상(報償)이 이루어집니다. 둘째는 “남에게 끼친 손해를 갚는 보상(補償)”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열등함을 의식할 때, 다른 측면의 일을 잘 해냄으로써 그것을 보충하려는 마음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보상심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인위적인 공동체”에서 서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공동체를 유지해 갈 수 있도록 부여된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원칙에 근거하여 각종 제도와 법칙을 만들어 왔습니다. 보상심리는 개인의 자존감을 세워주며, 타인의 존엄성을 인정하게 하는 기본적인 심리입니다. 남에게 진 빚을 갚거나, 남에게 끼친 손해를 갚음으로서 공동체의 질서가 유지되며, 그는 그 문제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공동체”에서 보상심리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심리입니다. 인위적인 비인격적 공동체에서 보상심리는 한 인격체의 정상적인 책임과 의무지만, 사랑의 공동체에서 보상심리는 교만입니다. 가정이나 교회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은혜를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은혜의 수단으로 한 몸이 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가 어떤 일이나 물질로 그 은혜를 갚음으로써 은혜를 주신 분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서려는 교만은 은혜를 물리치는 파괴 행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보상심리에 젖어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보상을 통하여 떳떳하고 당당해지고자 합니다. 세상의 인위적인 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 공동체 속에서까지도 보상심리를 통하여 자신의 당당함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세상 가치관은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사단은 성도들의 마음을 보상심리로 물들여서 가정과 교회 공동체들도 세상 집단으로 전락시킵니다. 사랑과 은혜가 사라진 공동체로 만듭니다.

보상심리에 익숙한 우리의 삶의 경험들은 하나님 앞에 나설 때도 그러한 심리와 태도로 나서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보상심리는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자존심과 교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진 빚이나 손해를 어떤 일이나 물질로 갚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해지고자 하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빚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끼친 손해는 결코 우리가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보상심리로 나가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들은 보상심리에 따라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할까?”를 생각합니다. “무엇과 어떤 일”은 하나님을 향한 보상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함과 자유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그러나 보상심리에 이끌려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 사실을 모르며, 지금도 “무엇과 어떤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보상심리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받아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도 보상심리에 물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세상에서 죄악 중에 살아갈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나아가 보상할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그 죄책을 보상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무엇과 어떤 일을 보상으로 제시하며, 죄악 중에 있었던 자신의 삶의 당당함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보상을 향한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보상과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멸망으로 향하던 유다 백성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유다에 임박한 심판과 종교적 부패, 그리고 사회적 불의를 지적하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보상심리로 접근하려는 시도들을 가로막습니다. 미 6:6-8은 보상심리에 물들어 여전히 불순종과 타락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2. 삶의 태도를 바꾸는 방향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아가는 방법은 보상심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무엇과 어떤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보상하여 드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무엇과 어떤 일”을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소외”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에 “무엇과 어떤 일”을 요구하는 존재를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지도자들은 “무엇과 어떤 일”을 하나님께 들고 나가기 위하여 힘없고, 가난한 자들까지도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며 행하는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부패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모습을 “불의”라고 정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보상에의 움직임은 결국 우상숭배와 불의로 전락했습니다. 보상을 향한 열심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아 소외를 경험할 때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보상을 향한 열심이 백성들에게 압력으로 미칠 때 공동체가 부패하여 불의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상숭배와 불의는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멸망시키시는 원인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불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가 선지자는 미 6:6-7에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라고 반어법을 사용하며 보상심리를 고백하며 고발합니다.

이 고백은 “번제물”의 보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일 년 된 송아지의 최고의 희생 제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상하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수천마리의 수양”이나 “강물같이 넘쳐흐르는 기름”의 풍성한 제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상하여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제물이 될 수 없는 자신의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드려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상하여도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라는 고민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죄와 허물이라는 피해를 드리며 빚을 진자들이 하나님께 드릴 것은 보상심리에 따른 “무엇”이나 “어떤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보상심리가 교만의 결과임을 잘 아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미 6:8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밝힙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은 보상심리에 물들어 우상숭배와 불의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갚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보상심리로 하나님께 나오기 전에 먼저 삶의 태도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이미 “선한 것”이 무엇임을 보이셨습니다. 그 선한 것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한 것 세 가지 중의 첫째인 “공의(미쉬파트)”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들고 나오는 가장 좋은 제물이나 풍성한 제물, 최고의 제물보다도 그것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구하십니다.

둘째인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사랑으로 행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인자(헤세드)”는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으로서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충성스런 사랑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보상심리로 나아오기 전에 먼저 세상 사람들을 향한 우리들의 진실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그 사랑을 나타태기를 원하십니다.

셋째인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겸손히(짜나)”란 단어는 낮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고 가리켜 주시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상심리의 반응보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길에서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상 세 가지의 삶 모두 삶의 태도의 변화 요구입니다.

3.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가리키는 길을 함께 걷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보상심리로 무엇인가를 드리며,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먼저 세상 속에서 삶의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삶의 현장에서 삶의 태도를 바꿀 때 하나님은 우리들을 만나주시며, 우리와 함께하는 사랑과 은혜의 공동체가 되어주십니다. “공의”와 “인자의 사랑”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상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서 그러한 삶의 모습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를 원하시며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요구하시는 것이 세상 속에서의 삶의 태도 변화임을 모르고, 여전히 무엇인가 갚을 것을 갚고자 하는 보상심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우상숭배와 불의 가운데 빠집니다. 눅 15:19에 보면 집을 떠났다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탕자가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보상심리입니다.

그는 방탕했던 삶을 품군으로 일하며 보상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아들의 신분으로 맞아하며 아들로서의 삶의 태도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만일 그가 여전히 보상심리 가운데 아버지 집에서 품군처럼 살아간다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과 공동체를 향하여 어떤 태도의 변화로 나아갈까에 대한 관심보다 무엇을 들고 나아갈까, 어떤 일을 하며 나아갈까에 더 집중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구하시는 것은 어떤 일이 아닙니다. 어떤 물질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공동체 속에서의 삶의 태도 변화입니다. 병들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공의와 인자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외당하여 우상숭배에 빠진 세상 가운데서, 그리고 부패한 세상의 불의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선한 것”을 이루어 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삶의 태도 변화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우상숭배와 불의 가운데 타락한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정한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판단의 길을 따라갈 때만 공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보상심리의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기초한 불변의 사랑인 “인자(仁慈)”의 길을 보여주실 때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만 가운데 있는 보상심리의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의 길을 보이실 때만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공의”와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결국 하나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에서 “행한다(하라크)”는 단어는 “걷는다(야라크)”와 같은 어근에 속하는 단어입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공평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공의를 이루어 갑니다. 그 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에녹과 노아는 불의와 부패한 세상, 우상숭배로 가득한 세상의 압력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동행하도록 보여 주시는 길은 우상숭배와 불의로 가득한 세상 한 가운데 가늘게 나타난 외로운 길입니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좁은 문입니다. 에녹의 시대처럼, 노아의 시대처럼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는 보잘 것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온갖 고난과 비난과 역경 속에서, 그리고 수많은 물질과 시간과 육체의 손실을 입으면서도 그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을 통한 하나님과의 동행만이 세상에 공의를 표현하며, 하나님의 불변하는 인자의 사랑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러한 삶을 구하고 계십니다. 이 길의 동행을 위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한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들고 갈까, 하나님께 어떤 일을 행할까에 대한 관심을 뒤로하고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내게 보여주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행의 삶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라는 물질의 예물이나 “어떤 일”이라는 사역적인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세상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 “공의”를 행하고, “인자”의 사랑을 공급하며, 흔들림 없이 그 길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삶의 변화입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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