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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어긋난 신앙 (왕상 19:9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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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왕상 19 : 9 - 18
제 목 : 하나님과 어긋난 신앙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물들 세계에 전해지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숲 속에 살던 소와 사자가 사랑을 하게 되었어요.  이 둘은 그야말로 죽도록 사랑을 해서, 다른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결혼에 성공한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나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그들은 맞벌이 부부인지라, 식사 준비는  교대로 하자고 합의를 했습니다.
소가 식사 당번이 되자, 아주 맛있는 무공해 풀들만을 엄선해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사자에게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풀을 먹습니까?
사자는 풀로 만든 음식이 싫었지만, 그래도 차린 정성을 생각해서 참고 먹었습니다.  이제 사자가 식사 당번이 되었습니다.  사자는 기름기가 적고 맛있는 살코기만으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서 소에게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가 또 고기를 먹습니까?  소는 육식이 싫었지만, 그래도 사자의 정성을 생각해서 억지로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부부간의 생활이 잘 될 리가 있겠습니까? 
얼마 못 가서 서로의 참을성에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은 상대방에게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에게 너무 무성의 한 것 아니냐?” 서로가 불평을 하며 다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숲 속 마을에서 아주 떠들썩하게 연애하고 결혼한 그들인지라,  이혼만은 피해볼 생각으로 대화를 계속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에 그들은 가정법원에 가서, 합의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정법원 앞에서 소와 사자는 마지막 작별의 키스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끝날 줄이야!” 하며 허탈해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최선이, 과연 누구를 위한 최선이었는지, 끝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자기 갈 길을 가고 말았다고 하는, 동물의 왕국에서 전해지는, 아주 슬픈 전설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설교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 우리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혹 이와 같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봉사, 정말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리 편케 느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렇게 즐겁게 느껴지질 아니하고,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여전히 입술로 고백하고 있지만, 왠지 내 마음속엔 처음 가졌던 그 사랑이 점차 식어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입술에서 찬양과 감사가 나오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은연중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봉사나 헌신도, 그 강도나  그 열심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에 있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 무엇이 잘못되어진 것입니까?  분명 뭔가가 잘못되어져 있는데, 그 분명한 이유를 잘 모른 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메마른 가운데,  오늘까지 지내 오신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면서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가 한 번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가 이제껏 나타냈던 그 신앙의 열심이, 과연 누구를 위한 열심이었던가?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우리의 열심이 합당하다고 여기고 계실까?  마치 소와 사자의 관계와 같이, 서로간에 어긋난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서로가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긋난 사랑을 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서로 불편해 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서로간의 핀트가 어긋나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처럼 피곤하고, 불편한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소와 사자처럼 둘 다 잘못된 관계는 분명 아닌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 행하시는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누구의 잘못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잘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향한 주파수를, 잘못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예요.  주파수가 맞아야 제대로 된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파수가 맞아야 제대로 된 화면을 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소망하는 평안이 나타나질 않고, 만족이 나타나질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무엇이 나타납니까?  불평과 원망과 같은, 신앙생활에 잡음이나 노이즈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대한 만족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은혜를 선포하시고, 축복을 선포해 주시는데, 그 말씀을 받아 우리 또한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는데, 실제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은혜나 축복이 불투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10월의 첫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데요, 이 10월 달은 우리에게 있어 참 중요한 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10월 달은 1년 중 마지막 분기를 시작하는 첫 달입니다. 
우리는 이미 3/4 분기를 보냈고, 이제 남은 4/4 분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종의 미”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까지의 우리의 신앙생활이 좀 미흡하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많은 부분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이 남은  석 달 동안만이라도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잘 하게 되면, 분명 후회함이 없는 한 해로, 마감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을 잘 지적해 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인물은 누구입니까?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인물입니까?  죽지 않고서 하늘나라에 간 사람입니다.  이 땅에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행하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영적 대결을 벌여 승리했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신앙의 인물인 엘리야도,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하나님과의 주파수가 맞지 않았을 때는, 여지없이 그의 삶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그의 삶에 평안이 상실되어졌습니다.  또한 그의  능력도 상실되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원망까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엘리야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러한 모습이지요. 
그러면,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떠한 부분이 어긋나 있었기에, 이러한 문제점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그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를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을 보게 되면,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지금 엘리야가 머물러 있는 곳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이세벨의 눈을 피해서 호렙 산의 한 동굴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굴이, 하나님이 원치 않는 장소였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엘리야의 직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선지자라는 직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서 전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성읍이지, 결코 아무도 없는 동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있기를 원하셨던 장소는, 그가 지금 숨어 있는 동굴이 아니라, 성읍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피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세벨의 눈을 피해서 숨어있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늘 열심이 특심일 수는 없었습니다.  때로 엘리야도 지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잠시 하나님의 능력을 입기 위해서, 재충전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가 머무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님도 한적한 곳에 나아가 고요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시간을 통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엘리야도 그러했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이  잘 나와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리야가 낙망하며 광야로 찾아가 로뎀 나무아래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위로해 주지 않습니까? 
천사가 그를 어루만져 줍니다.  그리고는 힘을 돋우기 위해 엘리야에게 물과 떡을 공급합니다.  이렇게 하기를 사십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공급받은 엘리야가, 그 다음에 했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힘으로 다시금 성읍을 향해 나아가 그를 대적하는 이세벨을 맞서 싸워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행했던 곳은 성읍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도 없는 동굴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8절 말씀을 보세요.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왜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호렙산은 모세가 출애굽을 한 후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은 산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언약을 맺은 거룩한 성산이었기 때문에,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을 찾아  동굴에 들어가 기도에 힘쓴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우리로서도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2
하나님의 엘리야를 향한 뜻은, 동굴에 들어가 숨어있는 상태로 기도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과, 실제 우리의 행동이 이처럼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심도 좋지만, 그 열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실제 그러한 면들을 많이 보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능력을 입은 성도들이, 그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성도가 기도 없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기도만 하는 신앙은, 전혀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일꾼이지 기도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기도를 통해 받은 능력으로  현장으로 나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명은 망각한 채, 그저 단순한 기도꾼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건강이 부족하여, 또는 나이드신 분들이 기도에 전혀 힘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과 조건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주신 사명, 곧 복음을  전하며, 신실한 신앙을 나타나며,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본을 보이는 일은 소홀히 하고, 계속해서 교회에 머물며 기도에만 힘쓴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게 성전에 모여 예배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각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로다.” 라고 말씀하시며, 계속해서 기도  하라고 격려해 주시는 음성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에게는, “지금 네가 기도  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더불어 세상 속에서 내가 너에게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라.” 고 하는 음성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나라고 하는 여 선지자와 같이, 이제 나이 많이 성전을 지키며 기도해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받은 대로, 이제는 세상 속에 다시금 들어가서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모습을 요구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개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의 심령에, 이런 음성이 들리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있다고 한다면, 이제까지 여러분이 예배하는 가운데,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베푸셨던, 그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다시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다시금 세상 속에 들어가서,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속한 이웃들을, 친척들을 전도  하라고 하는 것이, 그들에게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을 증거  하라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도 엘리야와 같이, 세상과 영적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 주변에도 세상의 신들을 따르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강력한 후원자인, 이세벨과 같은 세상의 세력들도 있습니다. 
이들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는 승리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세벨이라는 강력한 대적에게 밀려 후퇴한 상태에 있습니다. 

전에는 남울산 교회라는 큰 교회에서, 우리가 가진 힘은 적었지만, 다수의 연합된 힘으로 전도하며, 영적인 바알과 아세라 선자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벧엘 교회라는 조그만 교회에서, 적은 숫자의  힘으로 이전보다 더 강력한 이세벨이라고 하는 주변 환경과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전도는 해야겠는데, 그러나 마음에  부담이 너무나도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전도를 못하고, 주저  하면서 지금까지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는 다시금 이세벨과 부딪혀 싸워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그 상대가 이전의 상대보다 더 강력한 상대이지만,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말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제는 우리에게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기도했지 않았습니까?  지난 9월 한 달 동안을 기도 강조 기간으로 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성도들의 성령 충만을 위해,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성도들의 축복된 삶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우리 가운데 다 응답된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사를 동원해 주셔서 위로해 주시고,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물과 떡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 생명의 물과 떡이 무엇입니까?  기도와 말씀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능력을 받았고,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멘!!  이미 우리는 충분히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자꾸만 기도의 자리에만, 예배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이제는 다시금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이 지역의 주민들과 접촉하며 전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의 신앙적 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앙에 하나님과 어긋난 부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혹 이러한 사명에 대한 부분이 아닌지 확인해 보시고, 오늘 여러분에게 새롭게 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긋난 부분,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또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이 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그러나 엘리야에게 있어서 기도의 문제점은, 이런 과정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적시 적소에 캣취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제때 바르게 듣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엘리야가 계속해서 동굴 속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예요.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보세요.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두 번씩이나 음성을 통해 들려 주셨다는 것은,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과 전혀 통하지 않았던 기도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원했던 하나님과의 교통함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크고 강한 바람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지진과 같이 큰 요동함이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불과 같이 임하는, 뜨끈뜨끈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엘리야가 기대하는 그런 모습으로는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임하셨습니까?  전혀 엘리야가 예상하지 못했던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바로 이 세미한 음성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성경에 왜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게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의도되어진 음성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말씀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나 넘는, 적어도 2만명이 된다고 추정되는 그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 높여 크게 외치며 말씀을 전하셨겠습니까?  아니지요?  주님은 평소와 같이 조용한 가운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왜이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싸이클이 맞았기 때문에, 그들을 그 주님의 음성을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게 외쳐도 들을 귀 없는 자는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엘리야의 마음이 너무나도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셔도,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는 신실한 신앙인들은 언제나 그 말씀을 크게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이  들리질 않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작게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심령의 상태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의 동굴에서 기도했지만, 그의 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지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기도하고 끝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음성은 요란하게 요동치며 임하게 된다고 오해하면서, 그런  화끈한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워키토키와 같은 무전기로  통화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무전기는 말하고 나서 상대방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버튼을 놔야 합니다.  그리고 말할 때는 다시 버튼을 누르고 말을 해야 합니다.  기도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되, 그 분의 뜻을 우선으로 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심령의 자세가  되어져 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크게 들을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기도원에 올라가 평소의 습관대로 소나무 기둥을 붙잡고, 뿌리를 뽑아낼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한참을 기도하고 있는데,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눈의 띄였습니다.
잠깐 숨을 고르고, “저분은 무슨 기도를 하나?”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와는 달리 조용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니 무슨 기도를 저렇게 하나?  산에 왔으면 쎄게 부르짖으며 기도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손을 올리고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  하나님 ~ ” 조용히 속삭이는 듯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이 집사님은 충격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평안해 보이고,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없는, 그렇게 쎄게 기도해도 체험하지 못한 평안과 확신을, 저 사람은 체험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에 자신의 기도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 그는 크고 강한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요동치는 지진 속에서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불과 같은 뜨거움 속에서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과 심령을 추스르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 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게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16절에 나타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음성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엘리야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동굴에 머물러 있는 그의 몸이, 이제 다시금 성읍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엘리야는,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이 성전에 모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과 연합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모습으로 임하게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저 우리는 어린 사무엘과 같이,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저와 여러분의 심령이 이러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릴 줄 알 때,  비로서 우리도 하나님의 그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긋난 부분은 어떠한 것입니까?
교만한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성도들 가운데 교만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 있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이 교만하겠습니까?  초신자들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은 교만이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교만하겠습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교회에서 일 좀 한다하는 직분자들이 교만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교만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자기만 일한다고 생각하며, 자기만이 일하는 것처럼 자랑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를 보세요.  하나님께 무엇이라 말을 합니까? 
10절 말씀을 보세요.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지금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특심이라는 겁니다.  그냥 열심이 아니지요?  특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제 주를 위해 일하는 자는,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심이 있는 것이 좋지만, 그 특심이 교만으로 이어지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의 말을 듣고 계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충분히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또한 엘리야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서는, 맨 나중에 이런 엘리야의 교만한 마음을 지적하시며, 일깨워 주십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야, 엘리야야, 네가 하는 말을 내가 잘 들었는데, 지금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미안하지만, 너만 나를 향해 특심한 것이 아니야. 
너만 바알과 아세라 선지지와 싸운 것이 아니야.  너 외에도 7천명이 나를 위해 이와 같이 싸우는 자가 있어.”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자그마치 7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그 말을 들은 엘리야가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아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다면, 그는 부정하며  믿지를 아니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음성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 그는 굉장히 부끄러웠을 줄로  압니다.  왜요?  희소성이 있기에 자기의 열심이 특심이라고 주장했었는데,  자기 외에도 7천명이나 더 있는데, 무슨 그 열심이 무슨 특심이겠습니까? 

또 그들은 선지자인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무명의 용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로 이름이 드러난 유명인이 아닌, 무명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투쟁의 가치는, 선지자로 일한 엘리야의 투쟁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다 갖춰진 상태에서 누가 일 못하겠습니까?  어려운 것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 이러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동굴 속에 있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겸손한 가운데, 그 7천명의 무명의 용사들과 연합하여  끝까지 이세벨과 맞서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했기에, 그는 자기만  일하는 줄 착각했고, 자기만 일한다고 생각하니 힘이 들게 느껴지고, 힘이 들게 느껴지니까, 동굴로 숨어 들어갔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무엇이 어긋나 있었습니까?  먼저는 그의 마음이 어긋나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교만한 그의 마음으로 삐뚤어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의 마음이 이처럼 어긋나 있었기에, 그는 잘못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며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전혀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성읍이 아닌 아무도 없는 동굴에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긋남이 계속된 가운데, 엘리야는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던 선지자의  모습은 상실하고, 힘없고 나약한 보통의 성도들과 같은 모습의 엘리야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이러한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자신만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일을 해도 겸손하게 하지 못하고, 자기만 일하는 것처럼 은연 중 자랑하지는 않았습니까? 
잠 16 :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칫 우리도 교만하게 되어질 때, 우리의 신앙도 엘리야와 같이, 이러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긋남은 없는지 살펴보시고, 그 부분들을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회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1년의 마지막 분기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9월 달을 기도 강조기간으로 삼았는데, 이번 10월 달은 예배 강조기간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더 긴장감을 가지고 예배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더욱 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한 달 동안은 본 교회를  중심으로 주일성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남은 3개월 동안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진, 어긋남이 없는 신앙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며 주의 일을 더 많이 감당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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