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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의 기도 (왕상 18: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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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기도 (왕상18:41-46)

오늘은 기도의 사람 엘리야에 대하여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 기도의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 엘리야는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으로 꼽힙니다. 아는 대로 엘리야의 기도에 하늘이 삼년 육개월 동안 우로를 멈추고 또 기도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고, 또 다시 기도하니 가물어 메마른 땅에 비가 오는 능력 있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약5장1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이것은 결코 엘리야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면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럼, 엘리야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기에 하늘 문이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했을까요?

1. 엘리야의 기도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한 기도였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든 근거가 왕상 18:1절에 있습니다.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겔36:36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이 또 중요합니다. 37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일지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속이란 그 자체가 은혜적인 것입니다. 약속이란 스스로 걸려 드는 덫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스스로 약속했어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 상 약속을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위한 기도 왜 들어주실까요? 요엘서에 성령강림의 약속이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 붙잡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초대교회는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2. 엘리야의 기도는 겸손의 기도였습니다.

42절에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는 무릎을 꿇을 뿐 아니라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 본래 기도의 자세 는 마음의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그 기도의 모습은 겸손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이 모습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시10:17에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엘리야처럼 성정이 같은 인간일지라도 겸손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요 설교자인 무디(Moody)는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배운 것이 적어 요한복음을 찾기 위해 창세기부터 침을 묻혔습니다. 무디는 일반학교는 물론 성경학교 입학도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무디는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늘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늘 겸손히 하나님께 시간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을 주셔서 세계적인 전도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성령이 무디에게 얼마나 충만했던지 “하나님 이제는 성령을 그만 주세요.”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독교회사에 은혜 그만 달라고 기도한 사람은 아마 무디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기도의 위력입니다.

3. 엘리야의 기도는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

43절에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했습니다. 여기 일곱 번은 문자적으로 일곱 번이지만 우리에게는 끝까지를 의미하는 완전수로 받아들여집니다.

끝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때 사환이 돌아와 보고합니다.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 없다는 말은 바로 기도를 그만 둘 기도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실망하지 않고 사환에게 “다시 가라” “일곱 번까지 다시가라” 말합니다. 그랬더니 일곱 번째 손바닥만 작은 구름이 일어나더니 큰 구름으로 변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기도할 때 응답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약1:6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서기 4세기 교부 크리소스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로마 황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엄명을 받았으나, 그는 죽어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하며 맞섰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신하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게 고독한 개인감방에 집어넣어라" 그러자 그 신하가 울상을 하며 대답하기를 "황제님,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거기다 가두어 넣더라도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으면서 중얼중얼 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한답니다. 그러니까 혼자 두게 하면 그에게 좋은 일만 하는 셈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다시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그러자 신하가 또 고개를 흔들면서 "황제님, 그건 더욱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전도할 기회가 생겼다고 좋아할 것이며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의 사람들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당장!” 그러자 신하가 다시 사색이 되어서 "아이구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처형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한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제일 좋은 것을 안겨주는 셈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아이고 그 놈을 어떻게 할꼬”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우리에게도 크리소스톰과 같은 생명 건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이 시대 우리를 통해서 하늘의 문을 여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엘리야에게서 배우십시다. 엘리야의 기도처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자기를 낮추며 응답하심을 기대하며 낙심하지 않고 계속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기도의 승리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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