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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 품으로 (눅15: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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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한국 서점 가에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중에 ‘아버지’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어느 가정의 아버지가 췌장암 선고를 받고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내용은 특별하지 않지만 아주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이 책은 당시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문화권에 있는 우리 나라에서 아버지의 인상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특히 학대를 받으며 자란 자녀의 경우는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아버지의 상을 긍정적으로 심어주는데 이 책이 공헌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가족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인상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4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왕’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왕으로, 우리를 백성으로 묘사함으로서 ‘하나님나라’의 중요성을 심어줍니다. 둘째는 ‘목자’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실제 생활과 연결시키기 위함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보호자, 돕는 자, 인도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셋째는 ‘친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를 ‘친구’라 부르셨고 주님을 따르는 자도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친밀감을 상징합니다.
넷째는 ‘아버지’입니다. 즉 가족관계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은 유기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왕, 목자, 친구는 삶에 필요하고 중요하긴 해도 혈연으로 맺어진 불가분의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가족은 다릅니다. 가족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관계를 맺으면 죽을 때까지 가고, 아니 죽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자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끊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과 부모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말씀은 성경에서 이보다 더 뚜렷하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에서 보여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상은 어떤 것일까요?

  우선, 넓고 깊은 이해심입니다. 이 비유의 전반적인 흐름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탕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다른 하나는 그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넓고 깊은 이해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아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탕자가 자기 몫의 재산을 요청하는 것부터 잘못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아버지, 저는 빨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아들을 엄히 다스리고 어쩌면 집에서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버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들의 이런 요구에 말없이 들어주고, 아들의 분깃을 줍니다. 분명 잘못을 알고 상식과 도리에 어긋나는데도 아들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탕자의 잘못은 이렇게 해서 요구한 분깃을 ‘재물로 다 모았다’고 성경은 언급합니다. 이 말은 곧 그 분깃을 현금으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당시 재산은 현금이 아니라 농장이나 땅이었습니다. 1세기의 유대 법에 보면 상속을 받았다고 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땅을 팔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팔아 현금으로 챙긴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분깃을 요청한 것과는 비교되지 않은 잘못입니다. 이 일로 인해 더욱 죄가 번지고 말았습니다. 재산을 요구하는 것은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 가족만이 사실을 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온 동네에 소문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친척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의 분노가 치솟게 된 것입니다. 탕자는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때에도 아들을 이해한 것이 아버지입니다.

  무엇보다도 탕자는 이렇게 해서 얻은 재물을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곧 가족과 사회와 결별을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왜 이 지경까지 가는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말리지 않고, 왜 훈계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아버지가 아들을 잘 아는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표현대로라면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과 동일합니다. 사람을 기계나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과 같이, 여기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잡지 않고 말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행동은 아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습입니다. 비록 아들이 실패하고, 재물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을지라도 스스로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어도, 먹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지를 통해 자기를 책임질 수 있도록 허용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배려하고 이해했습니다. 보통 이해심이 아니라 깊고 넓은 이해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런 이해심은 다윗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며 아버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을 때, 다윗의 부하들과 충신들은 이런 아들을 단호히 처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을 위해 왕권도, 나라도 다 내어줄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아들을 배려하고 이해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모만이 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큼 인간을 이해하는 분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만큼 나를 이해하는 분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만큼 나를 알아주는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성을 알고, 내면을 알고, 사정과 형편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 넓게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는 속일게 없습니다.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심을 마음에 먼저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한없는 기다림입니다. 본문에서 아버지의 아름다운 모습은 집을 나간 아들을 향한 기다림으로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만든 시나 노래에도 대부분 아버지의 기다림을 가장 크게 부각시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한없이,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일까요? 그것을 알면 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1세기의 유대인들이 자기 가족의 유산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준 사람을 벌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qetsatsah (켓삿사)의식’ 이라고 부릅니다. 이 의식은 커다란 질그릇 항아리에 콩과 옥수수를 가득 채워 가지고 와서 그 사람 앞에서 꺼내어 던지면서, 그를 향해 ‘당신은 이제 백성으로부터 끊어졌다’ 라고 외치는 의식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사람과 상종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식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의 땅을 이방인의 손에 내어주는 일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탕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그것을 이방나라에서 허비한 그는 마땅히 돌아오는 즉시 이 의식에 따라 가족과 마을에서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실패할 것을 직감했고, 아들이 다시 돌아올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마을에서 그가 어떤 대접을 받을 지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와도 ‘켓삿사 의식’에 따라 사회에서 버림받고 마음졸이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마치 세리와 창기처럼 그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버림받을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아버지는 이제 아들이 집을 나간 뒤에 아들을 구명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아들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 그를 보기 전에 먼저 아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개적으로 아들을 품어 방패막이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아들을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만나야 했기에 아버지는 해가 뜨면 마을의 길목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한없이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아들임을 확인하자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그를 알아보고 달려갑니다. 당시 긴 옷을 입고 다닌 유대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공적인 장소에서 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천박한 행동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 체면을 벗고 긴 옷을 추켜세운 채 제일 먼저 달려 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입맞추고 가슴에 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장면이 연속되는 과정에서 아들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지만 아버지는 말이 없습니다. 말없이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집을 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알려줍니다. 특히 베드로사도는 그 하나님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나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나약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있어도 당장에 그것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참고 계실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참지 않으신다면 여기에 앉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있기에 우리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다시 바르고 참되게 살기를 깨닫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한없는 기다림으로 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잊지 말고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넘치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이제 계속해서 말없이 이어지는 아버지의 행동을 보십시오. 우선,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을 봅니다. 당시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 아들이 아주 특별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힌 것과 같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 줍니다. 반지는 곧 아버지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신을 신기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제 아들의 위치가 다시 회복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당시 종은 신을 신지 않았지만 아들은 신었습니다. 집을 나갔다 왔지만 품꾼이나 종이 아니라 여전히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잘못해도 신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입니다. 당시 잔치는 특별한 손님이 올 때 합니다. 이것은 탕자를 어느 사람보다도 존귀하게 대하는 따뜻한 사랑과 배려였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아들의 잘못은 가족의 어떤 사람보다, 마을사람보다 아버지께 대한 잘못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오직 아버지에게만 용서받으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용서하면 되는 것이고, 아버지가 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사랑하고 용서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잘못한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짓고 잘못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난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고 용서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탕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틈만 있으면 잘못하고, 죄짓고, 곁길로 나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나를 보면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절망과 낙심과 스스로를 포기한 채 맥없이 주저앉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죄라는 것이 너무도 나를 짓누르고, 나를 약하게 만듭니다. 특히 양심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려는 사람일수록 죄를 범하면 더욱 절망감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잘못하고 어떻게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며 스스로를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죄도 무섭지만, 용서받을 수 없다고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이제 잘못을 다루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에 대하여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랑이었고, 지금도, 마지막도 사랑입니다. 처음부터 용서였고, 지금도 용서이며, 마지막도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과 용서로 나를 대하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것입니다. 그 용서가 우리를 압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한번쯤 들어보았을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중서부 작은 도시에 어느 소녀가 살았습니다. 티없이 맑고 아름답게 자라던 소녀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탈선하기 시작했습니다.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고, 마약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하다가 결국 가출을 했습니다. 나가서 살다보니 먹고살려고 소녀는 매춘도 하고 별 짓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쓸쓸한 마음으로 죽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 순간 문득 고향이 생각이 났습니다. 농사짓는 부모와 순박한 동생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해 준 마을 사람들도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고향 땅을 한번 마지막으로 밟고 싶어 부모에게 편지를 씁니다. 자기가 며칠 후에 기차를 타고 고향마을을 지나갈 예정인데 혹시 자기를 용서한다면 역사 앞에 있는 참나무 가지에 노란 리본을 하나 달아달라고 썼습니다. 기차가 역에 섰을 때 리본이 달려 있으면 내리고, 없으면 그냥 지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소녀는 기차를 타고 고향 역에 가까이 갑니다. 그러나 가슴이 떨려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역에 도착하면 노란 리본이 달려 있는지 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차가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앞에 앉은 사람은 흥분하며 탄성을 외쳤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부터 길가의 나무란 나무는 온통 노란 리본으로 꽃처럼 덮여 있었던 겁니다. 행여나 딸이 못 보고 지나칠까봐 부모는 며칠 밤을 새우며 리본을 매달았고, 온 동네 사람도 함께 마을 전체를 리본으로 수놓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이해하시고, 나에 대하여 한없이 기다리시고, 또한 넘치는 사랑과 용서로 나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늘 내 곁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품으로 가야 합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고, 거기에 가면 반드시 우리의 해답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새롭게 헌신해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한 주간도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 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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