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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입니까? (눅 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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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어도 자기 혼자만 믿고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 한 번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견딜 수 없어 속이 불붙는 것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구나 야구 등 경기에서도 시합 내내 주전으로 뛰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경기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뛰어보지도 못하고 벤치에 앉아 구경만하다가 경기장을 나오는 선수도 있습니다.

경기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가 바로 예수의 제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모 신학대학에 지원한 어느 학생은 “왜 당신은 신학 공부를 하며, 목사가 되기로 결단했습니까?”라는 질문에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출세해서 자가용을 몰고 나타나신 분은 다름 아닌 목사님이셨습니다. 나도 그 목사님처럼 교회를 성장시켜서 성공한 목사님이란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대형 교회와 성공한 목회자만이 신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병든 모습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가장 정의롭고 경건해야 할 신학대학마저도 물질주의로 오염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의 소명부재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사랑하는 우리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은 모두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시므로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을 변화시켜나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실 때,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간 예수께서 베푸신 수많은 기적과 능력, 그리고 권세있는 교훈에 이끌려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허다한 무리”들은 조만간 예수가 자기 민족의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할 것으로 잔뜩 기대를 걸고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의 이러한 기대를 모르실리 없으신 예수께서 “돌이키사”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기 “돌이키사” 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멈추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따르는 무리들의 빗나간 생각과 기대에 대해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길을 멈추게 하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의 삶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면, 먼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만 합니다.” 이는 관계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라는 혈육의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더 우선시해야 하고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혈육과 더불어 자신까지도 미워하라는 말씀에서 “미워한다.”는 말의 헬라어 ‘미세이’(misei)는 ‘조금 사랑한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혈육을 사랑하되 하나님보다 덜 사 랑해야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정, 사정, 애정, 동정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흘히 하거나 뒷전으로 밀려서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혈육의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가장 소중히, 아니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겨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100세의 할아버지 아브람과 90세의 할머니 사래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은 최고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최고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렇게 힘들게 얻게 하시고서 그 아들을 달란 말인가? 기껏 키워놓았더니 번제물로  바치라고 주셨단 말인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지체 없이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칼을 들이댈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칼을 붙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너를 하나님 경외하는 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피붙이 이삭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일 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엄청난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우선순위로 놓는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부모나 친척이나 이웃이나 자식의 요구 그리고 나 자신의 욕심보다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각종 계중, 종친회, 친목회, 동기동창회, 등 혈연, 학연, 지연 등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를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입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가 깨질까봐 우선순위를 뒤바꿔 행동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이 신자들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 낮 11시에 예수 믿지 않는 친척이나 형제자매, 친구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을 경우 여러분은 주일예배를 우선하시겠습니까?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우선하시겠습니까?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선순위가 되지 않고서는 결단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참된 예수의 제자이고 싶으시면 이렇게 관계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아사왕은 나라 민족의 개혁을 위해 2차에 걸쳐 철처하게 종교 개혁을 단행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개혁 성공으로 나라는 크게 부강해졌고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사왕의 개혁은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는 일과 우상숭배를 척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사왕의 개혁에 걸림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모친이자 태후인 마아가가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왕은 주저하지 않고 우상 숭배하는 태후의 위를 폐위시켜버리므로 철저하게 처벌했습니 다.(대하15:16) 당시 태후는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터라 우상 숭배한다고 해서 태후의 위를 폐위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연의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고 엄정하고 공정하게 처리했습니다. 이러한 아사왕의 단호한 개혁의지가 성공하여 온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드라빔(가정 수호신)이라는 우상을 철폐하는 개혁의 성공을 가져온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부모공경은 인간관계 계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째 계명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을 앞둔 처녀 총각이 예수 믿지 않는 부모가 궁합을 보고 사주팔자를 보란다고 해서 궁합을 보고 사주팔자를 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지 않는 부모가 결혼식에 먼데 친척이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일날 결혼식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의 말이라도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순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혈연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보다 영적으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우선하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춤을 추며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모세는 그들에게 십계명판을 던지고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오라” 그러자 레위 자손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우상숭배한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각각 자기 아들과 자기 형제와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가차없이 칼로 쳐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상숭배하는 자기 아들과 자기 형제를 칼로 쳐 죽였는데 무려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두고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수행한 레위인들이 헌신된 참된 ‘제자’라는 뜻입니다. 

(출32:26-29)....(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레위 족속은 우상 숭배하는 혈육의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혈육의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아픔과 고통을 참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를 두고 훗날 모세를 통해 받은 축복은(신33:9-11)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며 예배드리는 복, 재산 풍족케 되며 그의 하는 일마다 복이 되며, 일어나는 대적마다 제압하는 영적 권세의 복을 받았습니다.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으로 변화되어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는 참된 예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토록 소중함을 깨우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 검(칼,劍)은 분명 폭력의 도구입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것이 물질이나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검이 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 고통과 아픔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 믿는데는 애정의 단절이라는 대가도 치룰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삶에 있어 가족간의 애정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가정을 창조하신 분이며 가정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결코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랑으로 이룩한 부부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관계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결국 예수 믿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 가족 관계가 깨어진다 하더라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가족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지 천국에서는 가족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는 영원한 것이고 인간관계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영원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것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되는데 드는 엄청난 대가와 비용을 헤아려 보라며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28-32절) 어느 농부가 농사기구와 곡식을 보관하고 도둑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망대가 필요했습니다. 이 농부는 망대를 세움으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유익함만을 생각하고 망대 건축에 드는 재료와 비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공사를 시작해서 기초 공사를 마치었습니다.

그런데 망대의 골조가 올라가기도 전에 공사비가 다 떨어져서 공사 자체를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짓다만 망대는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만 날리고 동네에서도 신망을 잃고 말았습니다. 비웃음거리만 되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철저하게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다가 도중에 그만두게 되면 짓다만 망대처럼 보기 흉할 뿐 만 아니라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문제가 참으로 중대한 것이어서 또 다른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군사 1만을 거느린 어떤 임금이 2만 군사를 거느린 이웃 나라와 전쟁이 하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임금이라면 과연 1만의 군사로 2만의 군사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신속히 사신을 보내 평화협상을 벌이든지 아니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군들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포로들이 계곡의 큰 다리를 건설하는데 투입되었습니다. 포로 중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진 니콜슨 대령이 부하들에게 모든 정성과 기술을 다하여 멋진 다리를 만들자고 독려 했습니다. 그것은 성취의 기쁨을 포로들에게 가지게 함으로써 포로생활의 좌절감을 극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다리가 완성된 후 니콜슨은 몹시 놀랐습니다. 동맹군인 미군이 이 다리폭파를 위한 특공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포로 생활 중에 하나의 성취감을 만족시키는 작품으로 다리 건설을 가볍게 생각했고, 실의와 좌절감을 임시로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적군 일본의 군사 목적을 성공시키는 이적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포로들에게 성취감을 안겨주었던 <콰이강의 다리>는 무참하게 폭파되고 맙니다. 니콜슨 대령은 뒤늦게나마 깨닫고 절규합니다. “내가 뭘 했지?” 일순간에 무너져내린 콰이강의 다리의 처참한 모습에 군의관이 비틀거리며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야”를 외치며 영화 <콰이강의 다리>는 막을 내립니다. 일생일대의 최선을 다해, 그리고 포로들의 생명을 희생해 가며 완공한 <콰이강의 다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다리를 완공했던 니콜슨 대령처럼 “내가 뭘 했지?”라며 후회막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생을 통해 이루어놓은 일들이 <콰이강의 다리>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투자를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선택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수 믿고 예수의 참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왕에 예수 믿으려면 자신과 이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를 영어로 ‘disciple’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훈련’을 뜻하는 ‘discipline’이란 말과 어근이 같습니다. 아무런 훈련없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을 제자 삼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로 연단하시고 훈련하십니다. 때로는 환난과 역경, 아픔과 실패, 고난과 슬픔등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을 훈련하시고자 하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훈련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더라도 제자가 되는 것이 더 큰 하늘의 축복입니다.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 레위 자손들에게 주신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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