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뒤에 오시는 이 (마 3:11-17)

  • 잡초 잡초
  • 486
  • 0

첨부 1


지난주는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통해 회개가 없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는 점을 묵상했습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회개치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려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시간들을 보낼 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죄를 범하기 쉬운 때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오히려 회개하며 천국의 도래를 예비한다면 참으로 하나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천국 백성이 되고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며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회개는 먼저 우리의 지성이 죄를 깨닫는 반응에서 시작합니다. 주로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문득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죄로 인식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던 일이 하나님 앞에 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보통 수치심을 동반합니다. 죄가 뇌리에 떠오를 때, 내 존재의 천박함에 낮이 뜨거워집니다. 죄가 생각날 때, 가슴 저미는 아픔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는 회개할 수도 없는데, 죄에 대한 깨달음은 주로 말씀을 들음에서 생깁니다.

회개의 두 번째 단계는 우리의 감성이 애통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죄를 직시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말씀을 배울수록 잊고 지내던 죄,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죄들이 자꾸 생각나자 괴로워서 말씀 공부를 중단해버렸습니다. 이처럼 죄를 깨닫게 되면 얼른 회피하거나 감추어버리려는 심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때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와 자신의 죄인 됨을 시인하는 것이 회개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슴을 치며 한탄하기도 합니다.

회개의 마지막 단계는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반응을 보입니다. 회개란 죄의 길을 가다가 문득 죄를 깨달아 펑펑 울고 난 후에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향하던 발걸음을 단호히 멈추고, 180도 돌이켜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이제까지는 죄인으로 살아왔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소원으로 하나님을 향해 전진해갑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해 가다가 많이 좌절합니다. 그러나 비록 쓰러질지라도 가는 길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이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을 향하여 조금씩 나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철저한 방향 전환이며 전인격이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그러나 회개가 끝은 아닙니다. 천국은 내가 회개했다고 해서 그 대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이 임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더 중요한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회개를 촉구한 후에 한 분을 소개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1-12)

세례 요한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회개한 사람들에게는 그 표시로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인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는 죄를 깨닫게는 할 수 있었지만 깨끗케는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탁월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죄를 소멸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참으로 회개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심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일들은 그의 뒤에 오시는 분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깨닫기만 하고 끝난다면, 죄를 깨닫지 못한 채 즐겁게 사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죄와 죄인 됨을 애통해하기만 하고 끝난다면, 한 많은 인생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는 의욕만 있을 뿐 힘이 없다면 결코 죄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천국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오히려 지옥에 가까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뒤에 한 분이 오셨습니다. 13절부터 보면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불로 죄를 소멸하고 깨끗케 하실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단지 인간이 아니라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회개한 알곡과 겉으로만 회개한척 한 쭉정이를 정확하게 가려내어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한 자에게는 무한히 은혜로운 분이지만, 동시에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무서운 심판자입니다. 회개한 자는 그 분의 통치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무거운 죄책에서 해방되어 천국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는 자는 그 분의 통치를 도무지 견딜 수 없습니다.

회개는 중요하지만 천국이 우리의 회개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그 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써 죄 값을 모두 청산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 공로 때문에 그분께 죄를 고하며 통회하는 자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얻습니다. 내게 은혜가 베풀어지기 위해 주님께서 감당하셔야 했던 일들을 바라볼 때, 그 은혜는 값없이 주어졌으나 전존재와 전생애의 수난이라는 참으로 값진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현재적으로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메시야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늘보좌에서 이 땅으로 성육신하셨고,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려 하셨습니다. 13-17절은 메시아로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대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으로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습니다. 요한은 당황하고 황송해서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3)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한 표시로 주는 것인데, 죄 없으신 예수님은 회개할 것도 없으시며, 그러한 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의 표로서가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 받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5) 예수님의 사역은 이제까지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에게 이르기까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줄기차게 계시해 오셨던 구속사를 성취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그 사역을 계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세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하늘이 열린 것,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한 것,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16-17). 이는 예수님의 사역 성격을 잘 말해줍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 문을 여는 사역입니다. 인간의 죄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게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땅에서 뿌리 뽑힌 나무처럼 한 동안은 푸른 잎을 유지하지만, 근본적으로 죽은 것이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던 인간은 이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제한된 자신의 한계와 결핍 속에서 늘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공급이 끊어진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웃을 착취해야 했습니다. 인간은 서로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경쟁 속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다가 시들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착취(혹은 성취나 쟁취)할지라도, 무한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던 것과 같은 만족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취할수록 고독하고 심취할수록 허무하며, 그럴수록 더 많은 성취욕에 사로잡히고 또다시 공허감에 시달리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결코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단절되었던 벽이 허물어지고 하늘이 다시 열렸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셨습니다(요 14:6). 그래서 회개하는 영혼은 이 주님 안에서 참 만족을 얻으며 근심과 염려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현재적으로 결핍이 있을지라도 무한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님은 비둘기같이 임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구속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 일에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을 행하셨고, 성령께서도 언제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만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만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보이신 행동들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아무리 신령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며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해서 은혜로 주어집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하여 속죄하신 사실을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택하신 자의 심령 속에 각인시키십니다. 그런데 개인이든 단체든 이런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언제나 회개하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회개하는 일이 없다면 어떤 은혜도 없으며, 오직 주님의 진노만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늘 회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최 동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