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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밑 군중의 모습 (마 27: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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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형법의 정신은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줌으로써 그것이 또 다른 사람의 죄를 방지한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대로만 된다면 그와 같이 고마운 제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불법이라는 것에 있어 죄가 없는데도 가혹한 벌을 받는 일이 간혹 생겨집니다. 인과응보의 법이나 혹은 일반적 법철학의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큰상을 받으셔야 됩니다.

지금 우리 세상에는 매우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두 가지의 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템플턴상’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벨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경직 목사님과 김대중 前대통령께서 각각 그 상을 타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두 가지 상을 다 받으셔야 되는 분입니다. 절대 불치의 환자들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으니 노벨 의학상감입니다. 오늘날의 의료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문둥병자, 간질병자,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중풍병자 이런 사람들을 현장에서 깨끗하게 치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말로는 다 그런 게 낫는다고 말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없습니다. 제가 소록도를 여러 번 다니면서 그곳에서 10년 이상 목회하신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곳에서 오랫동안 목회하시면서 이곳에 나환자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치료가 되어서 정상인으로 나간 사람이 있나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현장치료를 다 해주셨으니까 볼 것도 없이 노벨상 후보가 됩니다. 또, 예수님은 노벨 물리학상도 받으셔야 됩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 사람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어디 있습니까? 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나시고 물위를 걸어가시고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물리학상 넉넉히 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노벨 평화상 후보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일하셨고 우리가 항상 말하기 좋아하는 비폭력 부저항을 예수님이 얼마나 열심히 실천하셨습니까?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참 진리를 선포하셨으니 최대의 교육자요, 가난하고 병든 인간들에게 즐거운 친구가 되셨으니 최대의 자선가요, 한번 설교하는데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였으니 최대의 설교자요, 무소유로 사셨으니 최대의 청빈자요, 애국자요, 효자요, 노동자이십니다. 또, 어린이 헌장의 선언자이셨으며 여성해방 운동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안 하신 게 없으십니다. 정말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류의 후원자를 높이 받들고 상을 드려야 할 터인데 오늘 말씀의 결과는 정반대로 가장 추악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의 마지막 순간에 현장 모습을 생생하게, 마치 우리가 중계방송을 보는 듯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순 절기에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을 한번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순서를 네 대목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 먼저 홍포를 입으신 예수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수들의 옷은 언제나 유니폼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푸른 수의를 입히기도 했고, 또 죄의 종류에 따라서 색깔 구별하는 나라도 많이 있습니다. 얼룩말 같은 줄기가 있는 죄수복을 입힌 역사도 있었고 가능한대로 안 입힌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입으신 홍포는 본래 죄수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홍포는 그 사회에서 누구든지 한번 입어보고 싶어 하는 영광의 상징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옷은 어깨 위에 걸치는 망토 식으로 되어 있는데 주로 로마의 군인이 장교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걸치고 다니는 옷으로 자주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그 옷은 권위의 상징으로 임금님의 옷 색깔입니다. 로얄 칼라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자주색 옷 입은 사람을 보면 모두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 23장 6절에 보면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준수한 소년 말 타는 자들이라” 이렇게 그 옷 입은 사람들의 권위를 나타냈고, 누가복음 16장 9절에 보면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임금님이나 부자들이나 특별 부류의 사람들이 입는 색깔입니다. 로마 장교들이 망토를 만들어 걸친 것은 로마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고 임금님의 허락으로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그 옷을 입혔는가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희롱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여기 31절을 보시면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네 말대로 왕이 되어 보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는 홍포를 입어야 한다. 왕들이 입는 로얄 칼라를 입어라!” 조롱을 하기 위해서, 희롱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그 옷을 입힌 것입니다. 차라리 이때 그 사회의 죄수복을 입혔더라면 예수님에게는 정신적 부담이 적었을 것입니다. 장난감의 재료를 만들기 위해서 홍포를 입혔습니다. 예수님에게 이것은 더욱 치욕적이었을 것입니다. 저 같은 이런 목사나 신부 같은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다른 죄수들과 똑같은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으면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죄 지은 대로 재판을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희롱한 것처럼 법정에서 신부 가운이나 목사 가운을 다 입혀놓고  “신부님이시여! 예배 강론을 하시려고? 목사님이시여! 오늘 무슨 주제로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했을 때와 똑같은 것입니다. 어릿광대에게 이상한 옷을 입혀놓고 노리갯감으로 삼아 웃고 즐기는 소비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갈대를 오른 손에 들리우고”, 30절에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손에다 갈대를 들려주었는가? 그것을 도로 빼앗아서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갈대도 희롱을 하기 위해서 쥐어준 것입니다. 임금님들은 로얄 칼라의 옷을 입고 그 다음에 손에는 반드시 왕의 홀을 들어야 합니다. 그 홀의 동작에 따라서 사람이 죽고 삽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임금님을 만나러 왔을 때 임금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일 경우 그 홀을 아래로 내려버리면 끌어다 죽이라는 뜻이고 홀을 들으면 들어오라는 뜻입니다. 그 홀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그 희롱하는 사람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홀을 들어야 할 거 아니냐?”라고 갈대 하나를 꺾어다가 “자, 여기 홀이 있다! 이거 들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해봐라!” 이렇게 희롱을 한 것입니다. “네가 왕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왕의 손에 들려준 홀이 여기 있다.” 그 다음에 “왕이 어찌 왕관을 쓰지 아니했느냐?” 가시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우고 이렇게 온갖 희롱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희롱이라는 말은 조롱보다도 더 심한 놀림의 뜻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그랬습니다.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선언할 때까지 십자가 처형 방법은 그대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죄를 처단하는 방법으로 세상에서 많은 종류의 사형 집행이 실시되어 왔습니다. 목을 칼로 쳐서 사형시키는 단두형이 있고, 목을 끈으로 매서 매달아서 숨이 끊어지게 하는 교수형이 있고,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이 있었고, 때려서 죽게 하는 타살형이 있었고, 요즘에는 총이 나왔기 때문에 총으로 쏴 죽이는 총살형이 있고, 선진국에서는 전기 의자형이 있고, 지금은 죽는 사람도 인간의 권리가 있으니 너무 참혹하게 죽이지 말자고 해서 미국에서는 약물투입을 해서 조용히 잠들어 죽게 하는 약물처형방법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사형법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이것은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그리고 그곳으로 피가 다 흘러나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사람이 금방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간단한 의학 상식으로 볼 때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피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심장에서는 그곳에 피가 모자란다고 판단을 해서 피 흐르는 쪽으로 계속해서 피를 보내주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이 큰 것입니다. 우리 손과 발은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심장의 피가 그리로 빠져나갈 때까지 죽지 않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은 십자가에서 며칠동안 있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경우는 6시간동안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형 방법이 십자가형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형인가? 이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흉악범에게 사용되는 사형법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럼, 그 사회에서 누가 가장 흉악범인가? 강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강도들은 단순 강도는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일 만한 죄가 있어서 끌고 왔으니까 사형 강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들을 예수님과 동일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한 것은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의식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형법은 생명이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로운 일이 명예적 고통입니다. 오늘 십자가 밑에 있는 군중들은 모두 지나가면서 머리를 흔들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를 모욕하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이 십자가에 죽는 죄수는 절대 동정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 밑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도 똑같은 명예적 손실이 오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것을 아는 제자들이 그 현장에 하나도 없습니다. 잘못하면 자기도 그렇게 될까봐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특징은 최고의 낮은 자리입니다. 마구간 출생, 나사렛 주민, 식민지 백성, 말단 노동자, 십자가 처형! 또,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세리 출신, 어부 출신, 문둥병자, 중풍병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창녀 출신 이런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최고의 흉악범이던 강도들과 나란히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기 때문에 꼼짝없이 중앙 죄수가 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옷을 다 벗으시고 오직 조그만 옷자락 하나로 수치의 부분만을 가리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화가들의 결정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발가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수치의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최대한의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군중들은 예수님을 무능자로 만드는 작업을 합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못 내려오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무능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때 군중들의 요청은 합리성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권위를 이때 발휘해서 십자가를 날려 보내고 자기를 저주하는 십자가 밑에 저 많은 빌라도의 군졸들, 그리고 대제사장, 바리새인, 욕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다 진멸해버리면 문제가 간단히 끝나는 것을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저렇게 수치스럽게 벌거벗겨서 고통을 받으면서 매달려서 죽어가고 있느냐?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당신은 무능자가 아니냐?” 우리 신앙생활에도 똑같은 문제가 항상 등장합니다. 바로 십자가 밑의 군중들과 똑같은 합리성 주장을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야기를 합니다. 그 소원은 돼도 좋고 안돼도 좋은 소원이 아니고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소원을 하나님께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면 좋은 일이고 그것이 성취되면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기도를 하면서 단언을 합니다. “이것은 이쪽저쪽으로 갈 수 있는 지리산맥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 사건입니다. 만약 이렇게 기도했는데 이것이 안 될 때에는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면 하나님 안 믿겠습니다.” 이렇게 단언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쯤 되어 가지고 내 소원이 크다고 해야 기침 한번 하시면 되는 일인데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도 더 잘 섬기고 나도 좋고 이웃도 좋고 다 좋고 평화스러운데 왜 하나님은 안 들어주시는 것이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 밑에 군중들이 예수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에 대한 구속사적 사건인 것을 우리가 어느 때는 잊어버리고 사욕에 가득 찬 파렴치한 인간들의 얄팍한 요구에 응답의 성취자로 예수를 바라봤을 때 실망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얄팍한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인류 구원의 십자가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나를 보아야 하는데 오늘 당장 내 앞에 어떤 필요가 하나님의 존재를 판가름하는 것과 같은 얄팍한 마음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무당 종교만도 못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무능자로 만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들은 모두 진노의 자식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십자가 위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리고 구원의 소리를 발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채워줄 때 하나님이 계시고 그 성취 욕구가 무시당할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논리나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면 믿겠노라.”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은 한때는 갈등이 계셨음이 겟세마네에서 나타납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 갈등은 그 자리에서 해결이 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내 뜻을 취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 뜻과 결정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 십자가 밑의 군중들과 똑같은 논리의 신앙입니다. 이 사순절에는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이 주님의 고난을 기리기 위해서 내 뜻을 죽이는 괴로움을 겪자고 지키는 기간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아픔과 같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나님 아들됨의 능력과 권위를 우리 눈에 보이게 행사하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보라! 너는 무능자가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면 능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을 터인데….”

이제 예수님은 명예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자리에 떨어지셨습니다. 민중의 시선 앞에 벌거벗긴 몸이 공중에 매달려 말할 수 없는 수치감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상처의 아픔이 현기증을 일으켜서 인내의 한계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때 누군가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아름다운 행사를 하나하는데 당시 마취제로 사용했던 쓸개 탄 포도주 한잔을 선사해 줍니다. 그것을 마시면 고통은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질 때는 아플 때는 아파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지금 이 술 한잔을 받아먹고 내가 그 평안을 얻어야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고난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통한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진리의 입증을 위해서 아플 때는 우리가 지독스럽게 견딜 수 없게 아파야 하나님의 역사는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는 진리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한국 영화가 미국에서 한인들이 아닌 미국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상영된 것이 ‘춘향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미국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 내용의 초점이 뭐냐 하면, 고난을 당하는 한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내가 왕권을 가지고 올 지도 모른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춘향이는 그 말을 믿었기 때문에 온갖 핍박을 당하게 되지 않습니까? 자기가 사랑했던 이 도령의 약속을 지키려면 그 지독한 아픔을 견뎌야 했고 견뎌 냅니다. 그 아픔을 아파야 할 때는 다 견딥니다. 나중에 이 도령이 암행어사라고 하는 왕권의 마패를 들고 나타나서 고난 받는 춘향이를 신부로 맞이했다는 아픔을 견딘 사랑의 성취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 사람들 시장에 내어놓았는데 이해를 잘 못했다고 평가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로 왕권을 가지고 올 것이니 참고 기다리라.” 우리 성도들은 그 약속 하나를 믿고 세상의 온갖 핍박을 견뎌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왕권을 가지고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러 오실 것입니다. 춘향전과 기독교의 사랑의 성취는 아플 때는 아파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플 때는 아파야 합니다.

광주의 오포고개를 넘어서 조금만 가면 정몽주 선생의 묘지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거기에 소풍을 많이 갔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를 잘 알고 있는데, 지금도 선죽교 다리는 비가 오는 날이면 정몽주 선생이 흘린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그러잖아요?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그대로 있는 의인의 피 흔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흔적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 흔적은 아플 때 그 아픔을 견뎠기 때문에 인류 구원의 피 흔적으로 남은 것이란 말입니다. 쓸개 탄 포도주 한잔의 위로는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거절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 정도의 아픔은 내가 참을 수 있어야지!” 이것이 오늘의 진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도 질 것이다. 쓰러져 죽게 되면 죽으리라!’ 사순절 기간 동안에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나의 아픔을 견디고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질 때는 아픔이 있는데 세상적인 쓸개 탄 포도주 한 잔은 거절해야, 아플 때는 아파야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진리를 십자가 사건에서 저희들이 발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는가? 그 진리를 저희들이 깨달아서 사순절 기간 동안에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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