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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한 교회, 한 성도 (갈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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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두 한인 교회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합동감사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소식을 가끔 듣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뉴스에는 의례히 ‘아름다운 연합’이니 ‘화목 정신의 실천’이니 하는 미사여구의 논평이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한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서 둘로 나누어지게 되는 소식보다는 분명히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 합동이란 것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만일 두 교회가 하나로 합쳐지는 일이 그렇게 좋은 일이라면, 교회가 작으면서도 다른 교회와 합동하지 않고 그냥 따로따로 남아 있는 것은 나쁜 일이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을 좀 더 확대시켜 생각해 보자면, ‘부근 지역에 있는 여러 작은 교회들을 다 합쳐서 각 동네마다 큰 교회 한 개씩만 남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라는 사고방식으로도 전환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생각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전 세계의 산하 교회들을 한 조직 속에 확고하게 결속시키고 있는 로마카톨릭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형태로 여겨지게 될 것이고, 반면에 비록 총회나 노회가 있다고 하지만 각 지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게다가 그 총회조차도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져 있는 개신교회는 상대적으로 어수선하고 비능률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비판이 정당한 것이라면, 우리 개신교도들이야말로 모두가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천주교처럼 외형적으로도 전 세계의 교회들을 하나의 총회 안에다 모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더 이상 무슨 신구교 하고 따질 것 없이 그저 하나님 이름 부르기만 한다면 무조건 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도무지 그럴 필요도 없고 절대로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외적으로 온 세계 교회와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의 눈에는 그럴듯하게 보이겠지만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비록 모든 교회가 한 총회 안에 모아지지 않고 모든 성도가 같은 교단에 속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땅 위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주적 교회(the catholic church)’를 내면적으로 확실하게 세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각 교회가 참된 복음진리를 지키는 것이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로 통일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 시절에 예루살렘교회와 이방 교회들이 실질적으로 하나가 되었던 길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1절 이하 10절에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건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처음으로 일종의 공식 접견을 했을 때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비록 14년 전에도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이 두 사람만 잠시 만났을 뿐이었으며 무슨 별달리 기록에 남길 만한 일도 없이 끝났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보다 구체적인 동기가 있었는데, 바로 2절에서 “계시를 인하여”라고 밝힌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에게 내리신 어떤 계시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그와 같은 특별 지시를 내리신 이유는 그 당시의 초대교회의 상황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도 베드로를 주축으로 한 예루살렘교회와 사도 바울이 전도하여 세우고 있던 이방 지역의 초대 교회들 사이에 일종의 긴장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쪽의 입장에서 보면, 이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이 지금은 개심을 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이방 지역에 많은 교회들을 설립하고 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해 듣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 대부분은 아직 이 바울을 직접 대면하여 만나본 적이 없었으며 십 수 년 동안 그저 소문으로만 듣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방 지역에 교회들이 늘어간다는 소식은 반가운 것이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과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그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오리지널 복음과 꼭 같은 것인지 아닌지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열렬한 유대교 극단주의자였던 그의 과거를 보아도 그랬고, 자기네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삼년을 지냈지만 바울은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도 그랬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아직도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던 자들이 남아 있어서, 그와 같은 이방인 출신의 기독신자들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도록 만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배우고 자란 이방 교회의 신자들에게 괴리감을 조성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초대 교회는 한 진통을 겪고 있었고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특별 계시를 내리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걸음을 내디딘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그동안 독자적으로 “이방 가운데서 전해왔던 복음”을 예루살렘교회의 유명한 사도들에게 공식적으로 “제출”했습니다.
  바울이 그처럼 했던 이유는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에 관해서 그들로부터 무슨 인가를 받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지금까지 행해 왔던 복음 전파 사역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원래의 복음과 다른 것을 이방인에게 맞게 새로 만들어내어 전하고 있다.’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말이 거짓임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더 이상 오해나 방해를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그가 지금까지 예루살렘교회와 아무 공식 접촉이나 지시 받은 것도 없이 혼자서 전해 왔던 “복음의 진리”를 그 동안 서로 잘 알지도 못하고 대부분 만나 보지도 못했던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 내어놓았을 때에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바울이 찾아와서 제출한 복음을 살펴보고 그 내용이 그들의 것과 조금도 차이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조금도 더하여 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피차 전하는 복음의 진리 그 자체는 조금도 차이가 없고 단지 베드로는 “할례자(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사도”로 각각 그 대상만 다르게 임명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자, 그들은 서로를 같은 복음을 위해 같은 사도로 세워 주신 주님 앞에서 동역자로서의 “교제의 악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장면이요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두어 사람을 제외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피차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혀 가 보지도 못한 교회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난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피차 믿고 전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가 일치됨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교회나 이방 교회들이나 그 복음 안에서 이미 하나의 교회가 되어 있었음을 즉각 공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참된 ‘우주적인 교회’요 진짜 ‘보편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지구상에 셀 수 없는 많은 교회가 흩어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름이 다른 교단들이 너무 많이 있으니 이래서야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있나?’라고 의심해서도 결코 아니 됩니다.
  지상의 교회들은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어쩔 수 없이 나누어져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수많은 각 지교회들이 오직 참된 복음의 진리만을 지키면 그런 참된 교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단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는 이미 절로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 안에서 정당들이 여러 개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표방하는 당론이나 정책에 있어서 부분적인 차이들이 있는 까닭에 당들은 나누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개개의 당들이 꼭 같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면서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정당들이라면 공산주의 같은 독재정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하나 같이 마음과 뜻이 일치될 것입니다.

  교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 지상 교회들이 여러 교단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각 지교회들이 꼭 같은 구원 신앙을 가르치고 꼭 같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면 이미 영적으로는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참된 교회와 교단들은 이단 교회를 배격하고 타파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늘 힘을 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일당 독재를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는 어떠합니까?
  겉으로 볼 때에야 이것보다 더 잘 통일되고 화합된 나라가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이것보다 더 사람의 사상을 오염시키고 백성의 삶을 억압하는 제도가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겉으로 한 교단을 이루고 가장 이상적으로 짜여 있는 것 같은 로마카톨릭교회 역시 실제적으로는 ‘총체적인 이단’으로서 사람의 영혼을 ‘이행득구’ 사상으로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교회, 보편적인 교회는 교황 같은 한 사람의 권위로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베드로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석 사도가 할 수 있는 일도 결코 아니라, 오직 교회의 유일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신앙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오직 참된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있는 진짜 교회들만을 가려내어 오늘도 단 하나의 우주적 교회를 세우고 계시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각 성도가 바른 신앙행위를 지키는 것이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이 한 형제자매 되는 진정한 방법입니다.

  우선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로 이 방법으로써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을 구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함으로써 복음 안에 있는 자유를 성도들로부터 빼앗아 자기네들의 육신적 권위 아래 종으로 삼고자 한 이단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출신 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이 점에 대해서는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고”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경우에는 할례를 받게 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약한 형제’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양보한 것이었고(행16:1-3), 이 경우에는 ‘거짓 형제’들이 그 상대였으므로 끝까지 단호하게 대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다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대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이 할례 여부를 구원 문제와 직결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공히 오직 복음만으로 역사하심을 재확인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신앙행위를 똑바로 지키고자 했을 때, 그는 참된 형제들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게 되었으며 거짓 형제들을 함께 몰아내는 일석이조의 열매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또한 본문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과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에 꼭 같이 마음이 하나가 됨으로써 또 한 번 성도의 우애를 확인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유대 지방의 가난한 성도들을 이방 교회 성도들이 구제해 주기를 요청했고 바울은 그런 부탁 듣기 전부터 이미 그런 것을 생각하고 힘써 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믿음에 따른 바른 행위는 할례가 아니라 구제에 있었음을 바울이나 베드로나 꼭 같이 공감했던 것이며 이것이 그들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교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로 기이한 방법으로 성도의 사랑을 서로 확인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본문 11절부터 14절에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고 기록했습니다.

  “게바” 즉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했을 때 자연히 그는 이방인 신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는 당시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들에게는 금기사항에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 즉 유대주의자들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마침 그리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무슨 비난을 듣게 될까 두려워서 식사 도중에 황망히 자리를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 유명한 ‘보자기의 계시’를 받고 이방인도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을 깨닫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식탁을 나누는 일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을 정도가 되었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만 다른 사람의 눈과 말을 겁내다가 그와 같은 외식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그 곁에 있던 다른 유대인 신자들과 바나바까지 꼭 같이 따라함으로써 집단적 외식을 저지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울은 당장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유대인이면서도 완전한 유대인 생활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줄 알면서 왜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도록 만들려고 하느냐?”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와 같은 행위는 바로 그 자리를 찾아오고 있던 유대주의자들, 즉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유대인의 할례를 강요하는 자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셈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처럼 신랄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책망 받아 마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결코 하기 쉬운 일도 아니었고, 베드로가 그런 책망을 듣는 일도 결코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이고 사도 중에 첫 번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베드로를 자기 말마따나 ‘제일 꼴찌로 사도된’ 바울이,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신랄하게 책망을 했던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갓 목사 안수 받은 새파란 후배가 까마득한 선배 총회장 목사님을 공석에서 책망한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베드로로서는 얼마나 창피한 일이었겠습니까?
  아무리 같은 동역자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한 베드로의 입에서 실로 놀라운 말을 나중에 듣게 됩니다.
  나중에 베드로후서 3장 15-16절에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바로 베드로의 유서와 같은 마지막 서신입니다.
  순교를 앞에 두고 자기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피맺힌 교훈을 들려 준 후에 그는 덧붙이기를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내가 지금 너희에게 전한 말과 꼭 같은 말씀을 너희들에게 전하지 않았느냐? 나의 글과 꼭 마찬가지로 그의 서신들도 너희들이 함부로 해석해서는 아니 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바울을 지칭하면서 ‘사도 바울’이라는 공식적인 명칭 대신에 유독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라는 가장 친근한 표현을 썼습니다.
  옛날에 자기에게 그처럼 큰 수모를 안겨준 그 바울을 가리켜서 베드로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있는 주님 안의 형제’라고, 그야말로 뜨겁고 진실한 성도의 사랑이 한음절 한음절마다 진하게 묻어나오는 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떻게 바울 같은 새파란 후배가 선배 사도를 공중 앞에서 그처럼 감히 책망할 수 있으며, 어떻게 베드로는 자기에게 그처럼 큰 수모를 준 바울을 가리켜 그와 같은 형제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두 사람 다 꼭 같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는’(14절) 이 한 가지 사실에 있어서 완전히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이건 평신도이건 무엇이 어찌되었던지 간에 신앙행위만큼은 똑바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바울은 그 점에 대하여 책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베드로는 그 점에 대하여 책망듣기를 달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악감정도 생기지 않았고 무슨 서먹서먹한 관계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신앙행위의 정결함을 함께 지키고자 애쓸 줄 아는 성도끼리만 나눌 수 있는 진정한 형제 사랑만이 더욱 진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대로 바로 행하며 살려고 해야만 거짓 형제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분명히 잘못 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다 사랑하고 포용한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함만 있으면 교리를 두고 이단이니 무엇이니 하고 따지지 말고 무조건 하나가 되자.’라는 구호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인들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교황 한 사람 밑에 똘똘 뭉쳐 있고, 또한 그 교황은 유대교도들을 향해서는 “우리의 형님들”이라고 부르고 개신교도들을 향하여 “나누어진 형제들”이라고 점잖기 짝이 없는 말로 부르면서 소위 포용의 마음과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장단을 맞추어서 빌리 그래함 같은 유명한 복음주의 목사는 “나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서 아무런 신앙의 차이점을 발견한 수 없다.”라고 공공연히 선언하면서 신구교 연합 운동의 기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천주교를 향하여 오늘도 ‘총체적인 이단’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개혁주의 교회와 신자들은 정말 ‘형제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앞뒤 꽉 막힌 독선주의자들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그런 값싼 형제사랑, 그처럼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연합하는’ 혼탁한 연대란 결국 같이 멸망으로 빠지는 길일뿐임을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로 믿고 그 믿는 대로 바로 행하며 살고자 할 때 그 같은 신행일치의 신앙생활 안에서 참된 형제를 반드시 찾게 되고 진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함께 악수하고 포옹만 하는 사이로서가 아니라 함께 선한 일을 힘쓰는 가운데서 만나게 되고, 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비진리의 연합관계’에서가 아니라 서로의 잘못된 것을 정확하게 비판해 주고 권면 받을 줄 아는 수준에서 교제할 때 더욱 굳게 되는 것이 진짜 한 형제자매의 사랑인 것을 꼭 바로 깨닫고 체험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종교개혁 제488주년 기념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날을 지키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기념일부터 없애야 하고 마틴 루터의 무덤에 침을 뱉어야 하고 모든 개신교의 간판을 떼어 버리고 개신교 모두가 천주교로, 소위 ‘어머니 교회’로 복귀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정 그렇게 못하겠으면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 대신에 차라리 ‘대한예수교 연합회, 화목회, 통일회’ 따위로 바꾸어놓고서라도 새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종교개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또다시 로마카톨릭교회의 영적 암흑시대를 재현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여지없는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제4위 하나님’이라 칭하고, 십계명의 제1계명을 왜곡하고 제2계명은 아예 없애버리고, 선교라는 것을 하면서 원주민들 고유의 미신과 우상신도 그대로 인정하고, 성모뿐 아니라 성자들까지도 중보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등, 천주교의 이단성은 ‘이행득구’ 사상뿐 아니라 정말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런 천주교와의 화해에 발 벗고 앞장 서는 목사들, 진리를 사수하기보다는 이단과 연합하는 일에 열을 올리는 교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은 실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사도신경에서 주일마다 고백하는 대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거룩한 공회’는 세계적인 연합 교단에 가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교회를 하나의 조직 속에 연결시켜 놓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의 거룩한 공회’는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복음의 진리가 변색되거나 대체되지 않도록 끝까지 수호하고 있는 교회들을 당신의 ‘하늘의 총회’ 속에 모으심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통’은 어떻게 믿느냐에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 이름을 부른다고만 하면 서로 웃어 주고 손을 맞잡아 주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실로 이 땅의 모든 ‘참된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교통’하는 길은 단 한 가지 방법, 피차가 바른 믿음을 따라 바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돕고자 하는 가운데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처럼 복음 진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가운데 ‘거룩한 공회’에 속하며 우리 성도님들이 바른 신앙행위의 결백을 지키는 가운데 이런 뜨거운 ‘성도의 교통’을 누림으로써, 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한 교회, 진실한 한 형제자매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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