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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오직 의인의 믿음으로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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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지옥 설교를 자주 하시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 계셨다. 한번은 어떤 젊은이가 찾아와 목사님께 이렇게 건의했다. “목사님, 죄와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면 현대인들은 식상해 합니다. 젊은이와 지성인들은 교회를 떠날 겁니다. 죄 대신 실수라는 말을 사용해 주시고 지옥보다는 행복론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해 주세요.” 여기에 대해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반문하였다. “젊은이, 독약이 든 병을 꿀병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나? 벼랑 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안전하다고 해야 하나? 암세포가 너무 퍼져 있어 수술로도 도려낼 수 없는 환자에게 별 것 아니니 안심하라고 할 수 있겠나?”
물론 현대 지성인들은 마음을 건드리는 것을 싫어한다. 죄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실종된 느낌을 받는다. 죄라는 말 대신에 “환경에 대한 부적응,” “정서장애,” 또는 “습관성 집착증”등의 심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죄는 심상히 여기면 큰 불행을 자초한다. 죄(Sin)와 실수(Mistake, Error)는 분명히 다르다. 죄는 사망을 가져온다. 그리고 죄의 해결 없이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너가면서 안전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곽주환 목사)

이같이 요즈음에는 죄의식도 많이 사라지는 것 같고 죄에 대한 용어 자체를 거부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이다. 마틴 루터는 바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바울도 역시 죄의 문제에 대해서 괴로워 했던 사람이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원치 않는데 나도 모르게 같은 죄를 반복한다. 그것은 바로 내 속에 거하는 죄이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의 시작은 매우 미약하다. 처음에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것 같다. 마치 죄는 병과 같다. 처음에 병에 걸렸을 때에 그 병은 아주 미미해 보인다. 작아 보인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병은 사람을 결국 죽게 만든다. 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처럼, 나는 의임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셨다.

"죄는 손님으로 들어오고 그런 다음에 죄는 친구가 되어 여러분과 서로 알게 되고 여러분과 서로 좋아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 죄는 종이 된다. 그리고 여러분을 섬기고 여러분에게 기쁨을 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런 그 종은 주인이 되고 그 주인이 폭군이 되며 그리고 폭군은 파괴자가 된다. 죄는 언제나 자유로 시작해서 파괴와 노예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도 바울도 마틴 루터도 내 속에 있는 죄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괴로워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중세 교회의 상황은 내 속의 죄가 있으면 그 죄는 면죄부를 사면 해결해 준다고 가르쳤다. 분명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그것이 아닌데 동전이 떨어지면 영혼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마틴 루터가 95개의 반박문을 서서 개혁을 일으켰다.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용서받는가? 하는 문제이다. 제1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믿는 신자의 삶은 항상 참회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황의 이름으로 된 면죄부를 사면 죄의 형벌을 면죄 받게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면죄부를 산 돈이 돈궤짝에 찰랑 소리 내며 떨어질 때 ‘연옥’에 있던 영혼이 연옥 밖으로 뛰어나온다고 설교하는 것은 허황된 거짓말이다.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제95조, 크리스천은 많은 고난을 거쳐 천국에 가는 것이지 (면죄부를 샀다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루터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천국에 도달하는 날 나는 천국 문에 간판이 하나 꼭 있을텐데 그 간판에는 ‘오직회개한 자’란 글이 쓰여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의롭게 인정받는 것을 가르쳐 준다. 에베소서 2:8 말씀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용서받는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이 되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할 때에 이루어진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불교는 고행을, 힌두교는 업보를 이야기한다. 유대교는 언약을 이야기한다. 이슬람교는 법전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다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과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등을 돌리고 우리 마음대로 살았던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어떻게 면죄부를 산다고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죄의 문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 믿음을 통해서 해결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예수를 영접하는 그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가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영접은 곧 예수를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영접하는 믿음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고백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가? 분명히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레위기 17장 11절 말씀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로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이렇게 죄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 말씀을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생명이고, 둘째는 풍요로운 삶이다.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음을 분명히 말씀한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믿음은 곧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것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성경은 곧 예수에게 대하여 증거하는 책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같이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풍요로움으로 축복해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몇 일간 즐길 수 있는 크루즈 표를 산 다음에 치즈와 과자를 잔뜩 들고 유람선에 올랐다. 항해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선장이 그를 불러 유람선에서 주는 식사가 만족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남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손님께서는 선실에서 치즈와 크래커를 드신다고 하더군요.” 그 남자가 말했다. “배표를 사고 남은 돈이 거의 없어서요. 식사까지 할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손님께서는 표를 사실 때 이미 식사비용까지 다 치르신 것입니다.” 그 남자는 선장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 남자는 오전 식사, 점심, 고기 요리를 곁들인 가벼운 오후 식사, 저녁, 그리고 밤늦도록 갑판 위에서의 연회까지 즐길 수 있었는데 치즈와 크래커를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곧 복음의 내용이다. 죄는 우리를 죽게 만든다. 결국에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강조한 내용이요, 이 시대에 우리가 전해야할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영접하는 믿음이 있기만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고 했으니 죄짓고 용서받고, 죄짓고 용서받고 하면서 죄지으며 세상도 즐기고 구원도 받고 꿩먹고 알먹고 해 보자는 생각이 들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이 귀한 믿음을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좀더 거룩하고 좀더 신실하게 사는 경건의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날 이후"라는 글에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은혜를 베푼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지상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재미있는 글이 있다. 지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한 술주정꾼을 만났다. 거의 폐인이 되어 손발이 심히 떨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형제여,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소?"라고 물었다. 술주정꾼은 예수님을 가만히 보더니 "나를 고쳐 주신 분이군요.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당신이 건강한 다리로 고쳐 주셨지요. 절름발이일 때는 구걸하며 살아도 부끄럽지 않고 그런대로 살아갔는데 두 발로 뛰면서부터는 얻어 먹을 수도 없고 마음에 맞는 직장은 없고 하여 방황하다가 이처럼 되었습니다"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예수님은 깊은 상념 속에서 이번에는 갈릴리로 가셨다. 한 불량자가 선창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오?"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전에 앞을 못 보던 소경이었을 때 당신은 진흙을 발라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뻤고 온 세상이 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눈을 뜨고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화풀이를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고 흐느껴 울었다.

우리는 이 소중한 믿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깨어서 안 된다. 더욱 신실하게 더욱 거룩하게 살려는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그 소중한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란다. (곽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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