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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성경 (요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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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셨던 주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행동을 따라 사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뜻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운 계획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운 계획은 1. 하나님의 뜻에 적합한가?  2.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인가? 3. 나의 삶에 정말 필요한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진정한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이 한 말을 가만 들어보십시오. 그는 1.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2. 다른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우했나?

우리가 본문에서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야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어떤 점을 주목하셨습니까? 평소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戮?믿음보다는 사람들의 대우 부분에 관심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지난 38년간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그가 오랫동안 연못가에 누워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 물에 들어가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콜롬비아에 몇 차례 다녀오면서, 이 시대에 콜롬비아는 버려진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 콜롬비아의 어린이들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비참함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 보고타에 개척된 교회는 바로 그런 일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나는 콜롬비아에서 온 편지를 소개했습니다. 그 나라 수도 보고타의 교회를 우리교회가 돕는데, 담임목사님은 깔데론입니다. 이번에 온 편지는, 이제 그 교회가 교회당 신축을 위해 대지를 구입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교회는 어떤 성도의 특별헌금으로 1,000불을 보냈습니다. 내가 지난해 12월에 강의하러 가면서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땅 주인이 팔려고 내놓았다는데, 모두 2,500불이라고 했습니다. 1,500불이 모자란 것입니다.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했는데, 꼭 이틀이 지난 지난주 금요일 오후에 소식을 받았습니다. 금문교회에서 세례 받고 신앙생활 하는 어떤 성도가 그 1,500불을 헌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교회 근처의 어떤 중국식당에서 막 음식을 먹으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내로부터, “그 콜롬비아 1,500불 헌금...”이라는 말을 듣자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콜롬비아 성도들이야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이미 엄청난 은혜를 받아버렸습니다.

우리의 선교는, 38년 된 병자를 돌보는 차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그 병자를 예수님께서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은 바로 그때가 안식일이었던 점을 착안하고, 예수님과 그 병자가 매트를 어깨에 메고 걸어갔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님과 그 병자는 안식일을 범한 죄를 지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의 “관심” 혹은 그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단순히 “무얼 원하느냐?” 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원하는 사람 같은데, 그 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lip service로라도 “뭘 원하느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처지를 헤아려 아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미 아시고 묻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지만, 결국 그 말은 “예. 제가 낫고자 합니다” 그런 말이었습니다. 잘 듣고 보면 그런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사람이 아프다고 다 낫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깊이 병든 자는 병이 낫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원에 오래 살아온 환자는, 병이 나아서 병원 문밖으로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투병생활이 오래되면, 병 자체가 ‘친구’처럼 여겨집니다.

감옥생활에 익숙한 장기수가, 출옥한 후,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노예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한 경우는 역사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생활 중에 “애굽으로 되돌아가자. 거기서 우리가 고깃가마 곁에서 먹던 음식이 그립다!” 하지 않았습니까?

적과 친구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싸우는 전쟁터에 길들여진 사람은,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사회생활을 참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전쟁터로 되돌아가려고 하지만, 나이가 많아서 제대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은, 사회생활을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적과 친구를 명확히 구분합니다. 친구에게는 목숨을 바칠 것처럼 잘해주고, 적에게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또, 평소에도 ‘편가르기’에 대단히 열심입니다.

병의 경우, 앓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아이고, 어떻게 해?” 그런 동정 어린 눈빛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거 참 생각할수록 신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병이 낫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확실히 ‘정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병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996년 4월 19일, 한국일보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제니퍼 부시는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이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40번의 수술을 받았고, 200번의 입원을 했습니다. 쓸개, 대장 모두 제거수술 받았습니다. 그런 병골의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 캐시 부시(38)에게는 각계의 온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통령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 여사도 백악관으로 모녀를 초청해 위로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캐시 부시가 급기야는 ‘아동학대’로 기소되면서 아이 제니퍼는 플로리다 주정부 사회복지관에 맡겨졌습니다.

검찰측의 주장에 따르면, 캐시는 “뮌하우젠”이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남들로부터 동정과 관심을 받고싶어 부모가 자기 자식을 고의로 병들게 하고 부상당하게 하는 증상입니다. 캐시는 딸의 영양공급 튜브에 배설물을 섞어 병을 유발하기도 했고, 의사들을 설득해 불필요한 수술을 계속 받게 했다고 했습니다.

캐시는 지난 8년간 딸의 병원비가 300만 달러나 달했다면서 동정을 구했는데, 그 결과로 얻어진 성금으로 수영장, 승용차, 모터사이클 등을 구입했다고 했습니다.

자식에게 병을 계속 공급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병을 공급하거나, 둘 다 비정상입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았다면, 거의 일평생이겠는데, 그는 구걸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걸인이 직업 바꾸기가 참 어렵다고 하는데, “병을 낫겠다고 베데스다 연못 곁에 쭈그려 앉아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애쓰는 그가 ‘믿음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1. 38년 된 병자를 매일같이 보던 사람들 입장에서 말해 봅시다. 우리도 아마 그들 중에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살려고 애쓰는” 병자들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뿐 아닙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허덕이면서, 어뗳게 해서라도 자립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살기를 원하느냐?”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2. 이제는 입장을 조금 바꾸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38년 동안 병들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니요.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요.” 그러시겠습니까?

죄를 지은 죄인이어도, 죄 가운데 그냥 눌러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낭패와 실망 당했어도, 낙오자로, 실패자로 인생을 굳힐 수는 없습니다. 주님,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그냥 거기서 죽으리라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그 골짜기를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만날 것인가? 의심되십니까? 주님께서 과연 우리같은 죄인을 귀히 여기실까? 이렇게 누추한 곳이라도 찾아 오실까?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구약성경에, 주님께서는 죄인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61:1-2의 말씀을 누가복음 4:18-19에서 주님은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말씀을 따라 주님께서 가난한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찾아 오실까?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어린양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길에 두고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만 치유하실 수 있는 심령의 병이었습니다. 그 병 때문에, 고난당했습니다. 삶이 고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치유 받았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이 놀라운 복음이 우리 일평생의 은혜와 사랑의 흔적으로 남아, 우리 갈길을 인도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조 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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