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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교회를 지키는 빛나는 보석 (마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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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기독교는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 가톨릭입니다. 5 세기에 이 로마 가톨릭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신교는 1517 년 다시 로마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갈라질 때마다 중요한 교리 논쟁이 있었습니다. 1517 년 마틴 루터가 잘못된 교회의 정책과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은 명백한 오류들을 범했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았으면 갈라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로마 가톨릭은 루터의 지적을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결국 마틴 루터를 파문했습니다. 이렇게 개혁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개혁교회는 항상 성경 말씀에 비추어 진리를 검증합니다.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면 이를 갱신해 나갑니다. 특히 우리 멋진교회는 이 개혁 정신에 따라 바른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세세무궁토록 개혁과 갱신을 통해 진리를 지키는 멋진교회를 만들어 가십시다.

교회의 개혁정신은 교회를 지키는 빛나는 보석 같은 것입니다. 오랜 관행이 굳어지면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해 왔으니까 그냥 따라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바른 길을 가로막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 개신교는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항상 지금의 것을 갱신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보수파와 미래를 향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진보파입니다.

보수파는 새로 뜯어 고치는 것을 싫어합니다. 지금까지 잘 해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은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있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일을 더 망치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은 거의 보수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대로가 좋다고 여기며 삽니다.

그러나 보수파는 발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진보파는 지금의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편리하고 생산적이면 과감하게 바꿉니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과 꿈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것을 개혁해 나갑니다.

그러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하기 때문에 고독합니다. 대중으로부터 염려어린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음 글은 진보성향의 한 신문사의 광고 내용입니다.

너희는 도대체 누구의 편이냐?
그동안 신물나게 들어온 우문이다.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우리는 먼저 ‘사실’의 편이고,
다음은 ‘인간’의 편이다.
그리고 ‘진보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의 편이다.”

기독교에도 보수 성향의 교인들과 진보 성향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말씀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담는 그릇은 문화입니다. 이 문화는 얼마든지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부분 예배당의 의자는 딱딱하고 긴 나무의자입니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예배당 의자는 당연히 장의자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의자가 아니면 어색해합니다.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위해서는 장의자가 좋습니다. 그러나 장의자를 놓으면 그 공간은 오직 예배 공간으로만 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공간의 여유가 없습니다. 다양하게 이 공간을 써야 합니다. 이곳은 예배도 드리고 식당도 됩니다. 때로는 지역주민들을 위한 극장이 될 수 있고, 카페도 될 수 있고, 체육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엄숙한 예배당 분위기를 포기하고, 개별 의자를 쓰게 되었습니다. 전통보다는 실용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시대의 요구에 맞추는 진보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보성향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파격적인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내용도 아주 진보적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의 한계를 과감하게 지적하시고 더 한 차원 높은 윤리를 교훈하셨습니다.

감히 모세의 율법을 건드리는 것 자체가 파격이고 충격이 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잘못된 율법적 관행들을 깨뜨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몇 가지 파격적인 개혁 정신이 나타납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놀라 자빠질 정도였습니다.

중풍병은 뇌혈관 질환으로 반신마비가 오는 중병입니다. 심하면 언어와 안면 근육까지 마비됩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죽은 뇌세포를 다시 회복시키기 어렵습니다. 약과 재활치료로 증세를 완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완치는 거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번 중풍이 오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요즘에도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중풍병은 정말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평생 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몹시 부담스럽습니다. 환자가 가족들이 병 수발에 지쳐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괴로움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빨리 죽기만 고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중풍병은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병의 원인을 죄로 돌렸습니다. 무엇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 병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 장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맹인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장애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의 죄 때문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 유대인들이 병과 장애의 원인을 죄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씀은 그가 죄책감으로 불안에 떨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선 그의 영적인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사실 많은 육체의 질병 가운데 마음에서 오는 병들이 많습니다. 또 육체의 병도 마음을 굳게 먹으면 낫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몸은 병을 이겨내는 면역체계가 있습니다. 내 병이 나리란 믿음이 있으면 이 면역력이 강해집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기 위해 오신 분은 아닙니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병자들이 찾아 왔을 때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병을 다 낫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늘 그들의 믿음과 영의 구원의 문제에 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네 병이 나았다는 선언을 자주하신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 안심하라는 이 선언도 예수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 죄 사함의 선포가 예수님의 본래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 죄 사함 선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듣기에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아주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인간의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 절에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하고 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생각이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구약과 제사법을 배경으로 볼 때 그 생각은 옳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오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 십자가의 죄용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보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악한 생각을 하는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6 절에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에게 과연 죄 사함의 권세가 있었을까요? 그것을 증명하는 길은 이 죄 사함의 선포로 인해 이 중풍병자가 낫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가 허풍이면 중풍병은 낫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외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죄 때문에 병이 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죄 때문에 병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를 때 하나님의 경고의 방법으로 병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모세가 구스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이 병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 치유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은 어떤 죄인도 용서하실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주님께 가지고 나아와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죄 사함의 권세를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 잠긴 방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평안을 빌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주신 말씀이 바로 이 죄 사함의 권세입니다.

요한복음 20 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 20:22-23>

이제 우리도 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이 이제 나아가 이 죄 사함의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렇게 외칠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이 또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현장에 그의 친구들이 메고 왔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집 안에 사람들이 많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이 병자를 달아서 내렸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극성스럽습니다. 이들의 행동도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 이상입니다. 집 안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남의 집 지붕을 뜯는 행동은 확실히 지나쳤습니다.

이스라엘 가옥 구조는 지붕이 평평한 슬라브 형태의 옥상입니다. 요즘은 철근과 시멘트가 있으니까 튼튼한 슬라브를 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나무를 엮어서 틀을 만들고 그 위를 진흙을 섞어서 덮었습니다. 그런 지붕을 뜯자면 흙먼지가 방 안에 가득하게 떨어집니다.

지붕 아래 방 안에는 예수님을 비롯한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천정에서 흙먼지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침상을 내리기 위해서 구멍을 뚫었으니 얼마나 큰 구멍이었겠습니까? 지붕을 걷어내면서 아래로 떨어진 흙이 반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의도 없고 막무가내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방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고 계셨든지, 병자를 고치고 계셨든지, 이들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은 큰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이들을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믿음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파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환자 본인의 믿음이 아닌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도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이웃의 간절한 기도가 믿음이 연약한 자의 형편과 사정에 은혜를 입힙니다. 친구들이 보여준 믿음은 열정과 간절함이 가득했습니다. 은혜는 이렇게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달려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만한 열정이 가득한 믿음이면 하늘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무례함이 심했지만 한 생명을 살리는 일로 덮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이들은 친구를 살리려는 생각으로 염치 불구하고 도전했습니다. 상식과 예절과 이치는 잠시 뒤로 제쳐두었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이 친구를 내려놓아야 살릴 수 있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를 이렇게 해봅시다. 이 사정 저 사정 봐주면서 생명을 살리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게 때를 맞추고 기다리다가 세월만 갑니다.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산삼전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합니다. 무리한 일임에도 과감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관행과 전통을 깨뜨리고 개혁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 멋진교회는 진보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앞으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 진보적인 분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외로움에 처해 있습니다. 국민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져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요?

저는 연정을 왜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정치에 연정이 왜 필요한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지역 구도를 깨뜨리고 정치가 발전하려면 연정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연정이 뭔지 어떻게 해결되는지 국민들을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진보가 보수를 이기려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보수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긴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보수가 마음으로 동의하고 따르게 해야 합니다. 결국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기다려주고 마냥 늦출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진보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를 위해 이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이 개혁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를 영어로 Protestant 라고 합니다. Protest가 항의한다는 뜻입니다. 개신교가 개혁 정신으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진보는 항상 남보다 뛰어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앞서 나가지 못하면 진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보다 더 공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개혁정신은 교회를 지키는 빛나는 보석입니다. 예수님의 이 개혁정신을 본받아 멋진교회를 아름답게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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