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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우리의 회복을 기다리시고 축복하십니다 (신 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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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나타난 인간들의 상태 그리고 신약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설정되어 있는가에 따라 결정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그들에게는 고통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그들에게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러한 번연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끌림 즉 인간의 쾌락과 감정이라는 덫에 걸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라는 사실을 포기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의 기쁨은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인하여 회복되어지고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인하여 다시 은혜의 장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또한 보게 됩니다.

덫에 걸린 인간들이 고통 가운데 회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찾을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와 축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류의 역사를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을 떠났던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이야기로 기록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인간 속에 사랑을 두셨고 전쟁을 두셨고 서로를 변화함을 주셨고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며 우리 인간들에게 아주 마음 아픈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우리 마음의 상처 즉 흉터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범죄 과거에 하나님을 멀리했던 일 자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흉터를 생각해 볼 때마다 우리들에게는 좌절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주춤거리는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돌아와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모든 방황을 마친 후에 가나안에 입성하기 직전 그들이 선민으로 갖추어야 할 규례와 모습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다시 한번 종합하여 확인시키는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 29장 후반부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 올바르게 살지 못했을 때 그들에게 임하는 저주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30장 부분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게 될 때 이와 같은 새 기쁨을 주시리라는 은혜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회복을 기다리시고 우리가 영적인 회복을 이룰 때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말씀 ‘여호와께 돌아오면’이라는 말씀의 뜻을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즉 여호와께 돌아와 회복할 때 우리를 기다리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속에서 첫 번째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즉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여호와께 돌아오는 내용을 표시하는 구절이 몇 개 있습니다. 2절 말씀에 명한 것을 따라 마음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니 말씀을 순종하고 네게 명한 모든 그 명령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되 그 명령을 따라 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니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께 돌아오면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요약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는 것은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 명령을 그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는 것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나의 입술 나의 손과 발 나의 몸과 마음을 나의 모든 움직여가는 삶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려는 삶을 향하여 달려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이것이 곳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 그 순종의 한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명령을 따라 온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은 순종을 하되 바로 다름이 아니라 마음과 성품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항상 최상급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기대할 때 우리도 역시 최상급을 요구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로 내가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최상급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최상급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에게 돌아오되 너희가 나의 말씀에 순종하되 다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삶에 최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는 내가 생각하고 마음에 두고 품고 있는 최고의 높은 순위가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힘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고 그리고 능력도 부족하고 여건도 허락하지 않아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책상에 메모지에 메모를 해 두었어요. 뭐냐 하면 눈물만큼 적은 시간 이렇게 제가 하나 써놓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눈물 몇 방울만큼 적은 것 같아요. 그 적은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가장 합당한 일에 유용하게 활용해서 그 일을 해야 할 것인가가 우리 인생에 성공실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많으면 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뭐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고 할 텐데 우리에게는 시간이 적은 것 같아요. 우리들의 힘도 그렇고 우리들의 모든 것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최우선 순위에 두어서 선택하여 그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최우선순위가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오늘 교회 올 때 부지런히 옷을 갖춰 입고, 단장하고 나오시려고 할 때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가 와서 "아주 정말 재미있고 중요한 일이라서 내 급히 전화를 하는 것인데 지금 빨리 와서 나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자”그러면 여러분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마음에 갈등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일을 예배 가는 날이야. 그러니까 나는 예배드리기 위해서 미안해 나는 생각할 여력이 없네” 하고 우리는 아마 마음의 결정을 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야 마음에 솔깃해 지는데’라고 생각이 되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마음에 갈등이 들고 별로 행복하지 못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일단 모든 것에 최우선권을 두었으면 흔들리지 않는 내 삶의 전형적인 삶의 우선순위가 이미 결정이 되어 버린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내 삶에 최우선순위를 두는 것 그것이 내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다하는 것은 하나님을 늘 의식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의식할 겁니다.

‘음식이 맛있으면 좀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또 좋은 구경을 보면 경치를 보면 좀 언제 와서 같이 봤으면 좋겠어, 또 좋은 찻집을 보면 여기 한번 같이 와서 차 한번 마실까?’ 이런 생각도 안 든다면 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책이 안드나 본데 적어도 그런 마음이 들어야 된다 이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이면... 마찬가지예요 어딜 가든지. 우리들에게 항상 의식이 되는 거예요. 내가 일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실까 내가 이 순간 내 모습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하나님이 원하실까? 하나님이 행하라고 말씀하실까? 라고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라 이 말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내 마음과 성품을 다한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일을 결과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느냐 에요. 정말 내가 이 일을 이루어서 정말 결과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이일을 이루어서 내 이름을 내고 내가 자아도취에 자아만족에 빠져서 그것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정말 나를 휘두를 것인가? 아니면 정말 일을 이루어 정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릴까 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일을 하십니까? 어떤 일을 계획하십니까? 어떤 일을 이루고 계십니까? 그 일을 이루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와 같이 내 모든 삶의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마음이 바뀌고 우리 생각이 바뀌고 우리 행동이 바뀌고 우리 삶이 바뀌는 이와 같은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시편 51편 17절 말씀하였습니다. 욥기 42장 6절을 보면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에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돌아오되 그와 같은 자신의 처절함을 느끼면 하나님께 돌아와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삶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한다는 말, 이 말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다한다는 말은 또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최상급이다. 또 뿐만 아니라 늘 의식한다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뿐 아니라 다한다는 말은 뜨거운 열정을 가진 불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말씀 명령을 지키기에 우리 가슴이 뜨거운 마음이어야 한다는 불타는 마음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이 뜨거워서 다른 것 생각나지 않을 때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음에 어떤 일에 집중을 하게 되고 그 일에 감동을 받게 되면요 그 순간에는 다른 것이 일절 자리 잡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불타는 마음이 있어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져야 합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수 십년 이 사업에 종사했으니 가치 있는 작품 골라서 구입하고 두었다 팔아 유익을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결정합니까? 이렇게 물으니 그 사람이 "수 십년 동안 같은 직업을 가지지 어느 정도 볼 줄도 알고 구별도 할 줄도 압니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 그 작가의 예술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그 마음이 타오르지 않고 눈에 생기가 없는 사람의 그림은 사지 않습니다." 무엇이지요. 열정을 쏟아 자기 삶을 쏟아 넣은 그림을 얘기할 때 어떻게 가슴이 뜨겁지 않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눈에 생기가 돌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뜨겁지 않을 수가 없어요. 반드시 "오라 이게 최고야 나는 모든 힘을 다 쏟았어" 라고 얘기하는데 그저 힘없이 얘기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마음을 다한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우리 마음이 주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돌아와 그 앞에 산다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마음에 감동이 북 바쳐 올라야 돼요.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전율이 일어나야 되며.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체가 우리 가슴에 뜨거운 열정으로 드려지는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하는데도 왜 그렇게 마음에 감동이 있는지 모를 만큼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돼요. 가슴이 식어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슴이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참 다양한 국면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도 다양한 삶의 국면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꽃밭에 여러 종류의 꽃이 있습니다. 한 가지 꽃으로 이루어진 꽃밭도 아름답겠지만 여러 종류의 꽃들이 어우러져 있는 꽃밭도 또한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빨강 노랑 파랑 주황 자주 여러 가지 꽃 색깔들이 각각의 모양으로 각각의 아름다운 자태로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성령 충만하고 우리가 언제나 뜨겁게 기도하고 아름답게 봉사하고 귀하게 찬송하고 주님 앞에 헌신하는 것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부족하고 잘못하여 하나님께 연약하여 넘어짐이 있다 할지라도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오는 행위, 그것도 또 다른 꽃과 같은 아름다운 주님을 향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로 우리를 받아주셔서 우리를 귀하게 여겨주신다 이 말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함에 대하여 받아주시고 우리의 회복을 기다리시고 회복한 우리를 회복시켜 하나님의 축복을 더하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로는 정상적으로 있어주는 우리를 기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서 돌아오는 우리를 기뻐하여 받아주시기도 한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심하지 말고 비록 죄악의 흉터가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어 하나님을 향하여 다가오기에 걸리적 거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달려갈 때 기뻐하심을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달려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그분은 온전한 사람만을 좋아하는 분은 아닙니다.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하여 달려오는 자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여호와께 돌아오면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추락하는 때가 언제죠? 겸손을 잃어버릴 때가 아닙니까? 우리 인간들이 겸손을 잃어버리면 추락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만하게 되고 내 의를 내세우고 교만이 내세워지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 추락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겸손한가 아닌가 한번 언제든지 우리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죠.

제가 우리 동역자들에게 늘 이런 말씀을 드리는데요. 한번 여러분들도 살면서 인간관계 가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적용이 될 수 있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평가도 받고 이러저러한 얘기도 듣지요. 그 때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 마디밖에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첫째는 ‘감사합니다.’ 감사하잖아요. 두 번째는 ‘죄송합니다.’ 죄송하잖아요. 세 번째는 ‘부족하지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 세 마디 외에 우리가 살아가는데 더 필요한 말이 있겠습니까? 그 세 마디 외에 우리에게 생활하는데 더 필요한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감사한 것뿐이고 우리 부족 때문에 죄송한 것뿐이고 부족하지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할 마음의 각오가 있을 뿐인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누추한 말 구차하게 열어 놓아봐야 그것은 우리들에게 별 의미 없는 이야기의 사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족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회복되어질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의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니 ‘네 포로 된 자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서는 어느 정도냐 하면 ‘너희 쫓겨난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을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서부터 우리를 모아서 회복시키는가 하면 하늘 저 맨 끝가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정말 우리가 더 물러갈 곳 없어 하늘의 맨 가장자리까지 갔을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불러주신다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탕자가 재물을 탕진하고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다 쥐엄열매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어 아비 집에 종을 생각하여 그것이라도 되면 먹을 수 있다 생각하여 아버지 집을 향하여 달려옵니다. 동구 밖에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상거가 먼데 아직 서로간의 거리가 먼데 달려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반겨줍니다. 아버지는 위치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거리가 멀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갈 때 하나님이 달려와 우리를 껴안고 우리를 받아주신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내 물리적 위치가 먼 것 같아도 내 모습이 하나님 앞에 도저히 합당한 것 같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는 자꾸 내 처지를 생각해요. ‘내가 이런 처지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나? 내가 이만한 마음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 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 도저히 내 양심이 용납하지 않아.’ 하나님은 우리 상태를 보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은혜롭게 산다는 게 뭡니까? 우리가 은혜롭게 산다는 게 뭐예요? 내가 뭐든 여건 갖추고 내 인격이 고매하고 내가 모든 것 바르게 산다는 것이 은혜롭게 하는 겁니까? 은혜롭게 산다는 것은요, 하나님이 그의 자비와 긍휼을 우리에게 입혀주셔서 사는 겁니다. 내가 은혜롭다는 것은요 내 의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를 우리에게 입혀주셨기 때문에 내가 의롭다는 뜻이에요. 내가 은혜롭다는 뜻입니다. 내 처지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신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 나갈까 말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우리는 내 자신을 살펴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는 거예요. 나를 받아주실까 받아주시지 않을까를 살펴보고 하나님께 달려가는 것이지 내게 갈 자격이 있나 없나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 갈 만한 자격을 갖출 때가 우리에게 언제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자격을 갖춘 자가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미가 선지자는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꼭 가야 될 때가 세 번 있다고 그러죠. 첫 번째 너무너무 죄가 많아서, 도저히 하나님 앞에 가기 부끄럽고 창피하고 도저히 갈수 없다고 생각될 때, 이때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가야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고 부르시는 때에요.
두 번째 남들이 너무너무 우리를 비난해서 정말 나 자신도 실망하고 정말 도저히 사람 앞에 사람으로 취급도 못 받는 이와 같은 처참한 지경에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될 때입니다.
세 번째 남들은 몰라도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너무 비열하고 치사하고 정말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너무 하찮은 이와 같은 치졸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져 도저히 사람들 앞에 내가 나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와 같은 처참한 지경일 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때이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야될 때인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와 같은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니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나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거예요. 내가 의롭고 내가 여건을 갖추고 능력을 갖추고 내가 고매해서 내가 충만한 은혜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주니까 우리가 은혜의 생활을 하는 겁니다.
여기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지 않으면 내 의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긍휼과 자비를 구하며 우리는 어떤 일이 잘되어도 내가 나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바라보며 겸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자기의 공과를 드러내는 사람처럼 악취가 나는 사람들은 너무 드물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저 겸손하게 지낼 수 있을 뿐입니다.

가끔 산꼭대기에 올라가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산꼭대기에서 이렇게 아래 내려다보면 모든 사물이 다 작아 보이잖아요. 그 커다란 집도 요만한 성냥갑처럼 보이고요 자동차 지나가는 것도 그저 개미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은 잘 보이지도 않고요. 조금 아래 부분 가서도 사람이 얼마나 조그마합니까? 그런데 그것 보면요 우리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어요? 저런 괘씸한 것들. 그런 마음이 드나요? 안 올라가 보셨어요? 여러분 작은 걸 보면요 이상하게 가엽다는 생각이 들고 안됐다는 생각이 들지 그것 참 괘씸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여러분 사실 괘씸하다는 것은요 커 보일 때 괘씸한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전에 서로 사랑해 보셨죠? 상대가 커 보여요? 작아 보여요? 모르시는군요. 그거 한번 해보세요. 사람이 참 작아 보이는 겁니다. 내가 보호해줘야지 사랑해줘야지 내가 모든 걸 다 베풀어 줘야지. 여러분 높은데서 보면요 그저 마음이 넓어지고, 다 안됐다 우리 인간들, 하나님이 저 높은데서 보는데 우리 인간들이 괘씸하면 얼마나 괘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꼬무락거리는 사람들의 모습, 조그만 촌락과 이루어지는 모든 모습들이 참 귀엽고 재밌고 작아지게 보일 때 한없이 가엾어지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괘씸해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덮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거지요.

저는 사단은 항상 우리들에게 이런 유혹을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악 한 개를 가지고 그것에 고리를 걸어서 끌고 다니는 거예요. 고리를 걸어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한 가지 잘못하면 언제나 그걸 고리를 걸어서 우리를 끌고 다니는 거예요.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해요. 그러나 우리는 분연히 죄악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심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새로운 믿음의 백성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늘 말씀드리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의로운 것은 내가 의로운 요건과 의로운 모든 상황을 갖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그에게 돌아오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가지고 기다리시고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보니까 너희는 너희 이전을 허락하여 땅을 넓게 하실 것이라 하고 5절에 말씀합니다.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의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유업을 주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주십니다. 네 자손과 네 마음에 할례를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마침내 그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손으로 한 모든 일 네 모든 소산과 소생을 많게 하시고 다시 너를 기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일 많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이 말입니다.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 네 모든 소산을 많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던 모든 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산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켜 주신다 이 말입니다. 어떤 자에게요? 하나님 앞에 돌아온 자에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회복하기 원하는 자에게 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보면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은혜를 은혜로 갚나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가 사람을 키우는 것도 열 사람 쯤 키우면 그 사람 중에 한 두 사람정도 은혜를 알고 바로 설까요?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 환자를 고쳐 주시지요. ‘가라’ 가다가 10명이 다 나았어요. 그런데 그 중에 몇 사람만 돌아오죠? 한사람만 돌아와요. 한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하며 인사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섭섭하지요. 아홉은 어디 갔느냐? 그러면서 특별히 돌아와 감사하는 그 한사람의 문둥병 환자를 예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이래요. 언제든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언제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가 그 은혜를 아는 한 사람이 되어 주님 앞에 돌아와 주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들도 그렇죠? 정말 섭섭해 하더라도 또 오래간만에 어떤 마음에 회복되었는지 돌아와서 ‘참 감사합니다.’ 인사라도 한 마디 하면 그동안 마음에 있었던 섭섭한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섭섭하게 이 세상의 죄악을 헤매다가도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보시지 않고 우리를 다시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어떤 의를 행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입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우수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간구하여 나의 죄악을 하나님께 돌이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 언약을 이루는 겁니다.
사람이 이 조그마한 손으로 우리 수고해봐야 한계가 있지 않아요? 하나님의 큰 손으로 축복해야 되지요. 자 오늘도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의 큰 손으로 축복하게 합시다.’ 이 손으로 거두어 봐야 얼마나 거두겠습니까? 하나님의 큰 손으로 축복하셔야 되요. 하나님의 큰 손으로 축복하셔야 되요.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도 나무 얘기 하나 해드려야겠는데요. 아주 큰 나무 있지요. 거목이에요. 저는 이런 나무들을 보면 참 마음속에 감동이 있는 것 같아요. 하루 이틀 그 자리에 있어서 그런 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일이년 있어서 그 자리에 있지 않아요. 한자리에 수십 년 수백 년 있어서 그런 나무가 되지 않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자리에 그저 오래오래 수십 년 있어지므로 그저 믿음의 거목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왜 박차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왜 마음의 갈등이 없었고 왜 이러저러한 심정적인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다 참고 인내하고 감내하고 이겨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말 장대한 일을 보면 참 마음속에 큰 감사가 있지요. 그런데 그런 나무들 다가가 보면요 대부분 나뭇잎이 푸르스름한 것 같아도 가면 다 벌레 먹고 구멍 뻥뻥 뚫린 잎들 다 있습니다. 그리고 벌레 먹어서 이리저리 다 상흔들이 다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거 벌레 먹은 나무야, 저 나뭇잎 다 벌레 먹었어. 이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야 참 훌륭한 나무다. 참 큰 나무구나.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숨겨져 있는 작은 것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지는 않아요. 어리석은 사람은 눈에 보이는 작은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작은 결점을 보시고 우리들을 다 판단해 버리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해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비록 흠이 좀 있어도 연약함이 좀 있어도 잘못이 있어도 그래도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도는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성도가 훌륭한 성도가 아니에요. 훌륭한 성도라는 것은 자기의 부족을 알고 자기의 연약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살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성도는 모든 것을 갖추고 능력 있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입니다. 저는 여기 계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우리의 허물이 가리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우리의 모든 연약이 가리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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