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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 경배 (삼상 1:19-28, 롬 10:9-12, 요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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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정확하게 대답을 해준 사람이 구약의 미가 선지자입니다. 미가서6:8에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 가장 긴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에덴 동산은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교제하기 위한 장으로 만들어 주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그 동산으로 아담을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아담은 하나님을 만나 마치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은 시편에서 말했듯이 아담에게는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 단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찬양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드렸습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우리 성경 번역대로 아담은 거기서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면 아담은 그리로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머무시면 아담은 또 거기 머물렀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혼자 있어도, 아내와 함께 있어도 늘 하나님으로만 충만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이런 감정을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이 예배하는 사람의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예배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예배"라고 하는 말의 뜻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정하신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바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예배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무엘서가 열려지면서, 아니 이스라엘 왕정시대가 열려지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중의 하나인 한나의 삶은 예배 중심적인 삶이었습니다. 적어도 한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새 역사를 펼쳐나가시게 되신 것도 역시 그녀의 이런 예배 중심적인 삶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1: 서두에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께 매년제를 드리기 위하여 즉 예배드리기 위하여 자기 고향에서 나와서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궤가 안치되어 있는 실로까지 올라갔습니다.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갔다"라고 하는 이 말은 매우 의미 깊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 자기 고향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예배하는 민족으로 살기 위하여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오늘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우리 삶의 변두리 일로 밀어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우선적인 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면 예배도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는 예배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예배가 가치 있는 일이라기 보다 오히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역사의 장을 여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한 한나에게 있어서 예배보다 앞서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삼상1:은 온통 한나를 주축으로 한 엘가나 일가족의 예배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정, 이런 사람들을 주목하시고 그들의 소원보다 넘치게 이루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들으셔서 새 역사 창조라고 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중요시한 이 가정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처음에 "불임(不姙)"이라는 불행에서 임신이라는 복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결핍에서 성취로, 무자식이라는 수욕에서 자녀양육이라는 자랑으로, 슬픈 애가에서 기쁨의 찬양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땅을 두루 살피시며 찾으시는 사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셔서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이 놀라운 은총을 여러분도 받으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복이 예배를 통해서 내리신다는 것은 이미 성경이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검증된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언제나 맨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린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땅을 주셨습니다. 100세에 귀한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낯선 땅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야곱은 고향에서 형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벧엘 광야에서 노숙자로 전락했으나 그가 그 형편에, 그곳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먼 장래까지 보장해 주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바로에게 내건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드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기 원하는 이 민족을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400여 년에 걸친 바로의 압제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출애굽이라고 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마를 연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조상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위 청교도들이었습니다. 당시 그 험하고 먼 대서양 횡단을 왜 그들은 목숨을 담보로 해서까지 단행했습니까? 자유롭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의 대서양 횡단을 끝내고 미 대륙에 상륙해서 맨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예배 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건축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를 더 잘 드리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새 예배당을 건축하는 이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일로 인정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미국 조상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까지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20절에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로다". 예배 중심적인 한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과 복입니다. 한나가 임신하였습니다. 한나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한나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나중에 또 더 많은 자녀들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예배 잘 드려서 받은 복입니다.
이것은 한나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비천한 한 여인에게 그 약속을 지켜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예배 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을 주시는가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예배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에게 얼마나 성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시는 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요리문답에는 그 맨 첫 번째가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3.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구할 때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내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한나가 자기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그러면 한나는 금지옥엽같은 그 아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과연 약속을 지켰습니까? 그리고 지켰다면 언제 지켰습니까?
24절에 보면 겨우 젖뗄 정도가 되었을 때 아직도 어릴 때 한나는 그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실로 여호와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거기 떼어놓았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헌납했습니다. 한나도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서원을 준행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급할 때 하나님께 서원하고, 구하고는 그 때가 지나면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옛날 스코틀랜드의 한 왕족이 항해하다 바다 한 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살아남을 가망이 없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벧엘에서의 야곱처럼 서원했습니다. "만일 살려 주시면 예배당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그 날 풍랑에 배는 다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사일생으로 유일하게 살아 남았습니다.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왔을 때 바다에서 하나님께 서원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자기 재산을 다 정리하여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당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나가 아들을 드린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한나에게 하나님은 3남2녀의 자녀를 덤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 받을 때 서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인들 가운데 그 서약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우리 가운데 직분자들은 임직식 때 엄숙하게 서약을 합니다. 그러나 옛말에 "작심 삼일"이라고 했듯이 오래 가지 않아서 임직식 때의 감격도 살아지고 그 서약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서원은 대부분 이렇게 공수표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원을 지킨다는 것을 꼭 이렇게 거창한 일에만 국한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주일 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그리고 월요일부터 한 주간 세상에 살 때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서나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서원을 지키는 일입니다. 교회와 세상, 주일과 월요일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서원을 지키는 일입니다.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는 반드시 레일 두 개가 평행을 이루어서 깔려 있어야 합니다. 만일 한쪽이 끊어진다든지 평행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큰 사고가 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마치 철로의 레일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철로의 한쪽 레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여기 우리 생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하나의 레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평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반쪽의 예수님만 믿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만 믿는 일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나를 도와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열심히 예배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못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하라"하면 하는 것입니다. "저것을 하라"하면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것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좋을 대로합니다. 이해관계나 감정 따라 행합니다. 이렇게 할 때 나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 대신 내가 나의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나 외에 다른 신들, 또는 다른 주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수아처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확실하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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