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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종교개혁자들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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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인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그는 1512년 10월 19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3일 후부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편을 시작으로(1513-15), 로마서(1515-16), 갈라디아서(1516-17), 그리고 히브리서를 강해 (1517-18)했습니다. 이 강해를 통해 루터는 구원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편을 통해 고뇌하는 인간들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구원을 얻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그는 구원이 인간의 행동이나 어떤 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사와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에 의한 것임을 그는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가하면 정의감이 아주 강하고, 굳센 의지와 힘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종교개혁자인 루터를 보면 그는 아주 두려움이 많고 연약한 인간의 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법학을 전공하여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도 출세하기를 원했습니다. 루터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22살 되던 때에 자기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벼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같이 가던 친구는 그 자리에서 새까맣게 타 죽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이 사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의 글 중에는 자주 “나는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에 대한 심판을 두려움으로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밤을 세웠다”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결국 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수도사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그에 따른 두려움 때문에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도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돌아오는 것은 깊은 죄 의식이었고, 점점 더 깊어 가고 있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그는 “온 몸이 타 버려서 재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죄의식과 죽음 그리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며 어느덧 10년의 세월을 보내던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서 로마서를 강의하던 중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를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괴롭혔던 죽음과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1:17절에 있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오래 동안 붙들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처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외아들을 못 박혀 죽이시는 하나님”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니 죄인은 죽어야 하고, 죄 값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자니 마귀가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할 것이라고 대적할 것이고, 사랑하는 자들을 심판하자니 하나님의 사랑이 훼손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마귀가 말하는 죄에 대한 심판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서의 이 글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갑자기 가슴이 막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심판에 대한 두려운 공포심이 갑자기 부서지면서 바로 그 때 다시 태어난 기쁨으로 내 온몸은 떨렸고 기쁨으로 가득히 차 있었다.” 그가 발견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자기 친 아들을 십자가에서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아버지의 의가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나를 대신하여 그 아들과 나를 바꾸고 죽음의 모든 공포와 죄의 심판에서 나를 해방시킨 그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오직 믿음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교황의 어떤 권위나 해석보다 성경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사망하기 1년 전 작성한 라틴어 저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나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양심으로 화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의 그 말씀에 끈덕지게 매달렸고 아주 열렬히 성 바울이 원하는 것을 알고자 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문맥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그의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 여기서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이전에 미워하였던 것만큼이나 이제 사랑으로 나의 가장 달콤한 단어로 찬양하였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바로 그 구절은 내게 진정으로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첫 번째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말씀 중심의 믿음이었습니다. 38절 말씀을 보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11:3절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개혁주의 신앙의 첫 번째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민수기 23:19절 말씀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그들은 오직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갔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비가 오지 않았지만 120년 동안 계속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갈 방향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며 또 번성케 하리라는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잉태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잉태하는 힘을 얻어 약속의 자녀를 그 나이 90세에 얻었습니다. 80세 노인인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무슨 큰 능력과 재주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오직 자신과 함께 하시다는 그 말씀을 믿고, 이집트의 바로 앞에 섰으며, 홍해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마침내 홍해를 가르고 말았습니다. 앞에서 보는 홍해와 그것을 건넌 후 뒤에서 보는 인생의 홍해는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보십시오.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해와 달과 별과 우주의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으로 창조됩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부터 그분의 말씀에 의지해서 창조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잠언서 12:25절에는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근심이 있어도 선한 말을 해야 그 말이 인생을 바꾸고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 선한 말, 칭찬의 말, 기쁨의 말, 소망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행사에는 꼭 아니마밈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아니마밈의 뜻은 '나는 믿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은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작사 작곡되고 불려진 노래입니다. 그 가사는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라고 해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그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르며 그들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가스실에 끌려 갈 때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고문을 받아 고통을 당할 때도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어떤 고통이 찾아 올 때도 절대로 부정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고통을 당했던 독일의 쾰른 시의 감옥도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글은 돌과 깨어진 유리로 벽을 긁어서 쓴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는 "태양이 빛나지 않아도 나는 태양을 믿는다. 사랑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이 아무 말씀 없으셔도 나는 그분을 믿는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고 정신적인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낙서 하듯이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지금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믿음의 말은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창조할 것입니다. 진실로 이곳에 있는 백성들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은 미래 지향적인 믿음이었습니다. 38절 후반절과 3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11:1절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여기서 물러 날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앞으로 나갈 것인가? 종교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이 결단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통의 결단을 통해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지금과 더불어 미래에는...” 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흑인 운동을 일으킨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운동에 앞장서면서 그의 집에는 협박 전화와 편지가 날마다 날아들었습니다. 집이 폭파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점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밤에 걸려온 전화를 통해 집의 모든 물건과 생명을 함께 빼앗아 가겠다는 협박했습니다. 그는 잠을 잘 수 없어서 침대를 서성거렸습니다. 극도로 피곤해진 상태에서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아주 두렵습니다. 도저히 혼자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그가 기도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에 “정의와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는 말씀과 함께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와 함께 한다”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결단했습니다. 그는 이 결단을 내린 후 언제나 미래에 이루어질 꿈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 중의 하나가 바로 “내게는 꿈이 있다”는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1963년 8월 28일 25만 명이 모인 미국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그는 이 설교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친구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저는 꿈 을 가지고 있다고. 이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 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 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주지사가 늘 연방 정부의 조처에 반대할 수 있다느니, 연방법의 실시를 거부한다느니 하는 말만 하는 앨라배마 주가 변하여, 흑인 소년 소녀들이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 자매처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꿈입니다. 오늘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고,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우리도 꿈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 정신은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미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꿈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예사랑 교회가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교회로서 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형제와 자매들이 언젠가는 함께 모여 예배드리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도 미래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꿈을 가지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은 영혼을 구원하려는 믿음이었습니다. 3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누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영혼을 구원하려는 그 사랑의 열정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정신의 하나가 바로 그들처럼 영혼을 사랑하는 그 믿음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교회 교인들이 통 전도를 하지 않다가 초청 주일을 앞두고 전도하기 위해 지역 전도에 나갔습니다. 두 분의 여 집사님이 교회 입구에 들어오는 약국에 들어가서는 약사에게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앉아 있던 약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전도지를 받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화가 난 얼굴로 두 사람을 노려보더랍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거운 침묵이 흘렸고, 전도하기 위해 갔던 두 집사님은 공포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약사님 예수님 믿읍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약사는 화가 난 얼굴로 “여보세요 내가 이곳에서 약국을 한지가 10년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예배시간 마다 저의 약국 앞을 지나서 예배당에 가면서도 한 사람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거나 교회 나오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교회 교인들은 너무나 저에게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있었습니다. 언성을 높이며 자신들을 책망하는 약사의 말에 그 두 집사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너무나 잘못했다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예수님을 믿자고 권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약사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제 자신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뜨끔하면서 마음에 큰 고통이 임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없는지 우리 제직들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실제로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예수님이 정해 놓은 사람은 꼭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고 전도를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진실로 이 종교개혁 주일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통해 뒤로 물러가지 않고, 침륜에 빠지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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