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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그리스도인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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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 할 때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란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팔복은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주변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덕에 오르자 제자들이 나아 왔습니다. 후에 무리들도 합류합니다(마 7:28)그들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아름답고 깊은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내용을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첫 부분이 바로 팔복입니다.

원문을 보면 한글성경과는 달리 '복되도다'라는 말이 팔복의 각 문장마다 맨 앞에 나오는데 예수님은 이를 8번이나 반복합니다. '복되도다'로 번역되는 '마카리오스'는 구약 히브리어의 '아쉬레'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대단히 행복한' 혹은 '지극히 운이 좋은'이란 뜻으로서 현 상태 자체가 지극히 행복함을 의미하는 데 사용됩니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행복은 좋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어떤 사람 즉 어떤 인격을 갖추고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고 말씀합니다. 팔복은 바로 그런 사람의 됨됨이를 담고 있습니다.

1복과 8복이 언급하는 복의 내용이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는 8가지 복된 사람의 됨됨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을 가르쳐 줍니다. 한편 1복과 8복은 현재에 누리는 복을 말하는 한편 2복에서 7복은 미래에 누릴 복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말해 줍니다. 팔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현재를 즐기며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됨됨이는 어떠합니까?

1. 심령이 가난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눅 6:20에선 그냥 가난한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가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봐주는 나라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복된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마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적 가난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마태가 전혀 물질적 가난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중심청중은 바로 모든 재산과 직업을 버려 이미 가난한 사람이 된 제자들입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자동적으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부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내면적으로 가난해질 수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물질적 가난을 수용하는 것은 내적 가난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해도 필요조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에게 자랑스럽고 의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비통한 고백이 그런 사람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24). 그러나 자연인에게 가난한 마음을 품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프로이트 같은 사람은 아예 죄와 죄의식이라는 개념과 실체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사회화과정에서 부모와 교사들 그리고 종교로부터 도덕교육을 받으면서 각종 규범들이 내재화되어 초자아 혹은 양심이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죄의식이란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자아가 이 초자아로부터 구박받고 억압받으면서 생긴 신경증세에 불과합니다. 또한 자신의 허물과 약점 그리고 심지어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 만큼 심각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자신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복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눅 18:9-14에서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마음이 풍요합니다. 오직 감사하고 자랑할 것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즉 남의 것을 빼앗는 자, 불의한 자, 간음하는 자, 무엇보다도 세리와는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자신의 경건한 삶 즉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자신의 모든 소득 중에 십일조를 어김없이 바친 것을 감사합니다. 반면에 세리의 마음은 참으로 가난합니다. 그는 성전에 가까이 갈 용기조차 없어 멀찌감치 서서 기도합니다.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곤 가슴을 칩니다. 탄식합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놀랍게도 세리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정확히 발견하려면 우선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비쳐주시는 빛에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그 빛으로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더 깊은 죄인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의 초점을 외형적 삶에 맞추지 말고 내면에 맞춰야 합니다. 모든 악이 내면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에 유념하면 우리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가난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빛을 보기 전 사울이란 이름을 살고 있을 땐 자신이 율법에 비추어볼 때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란 확신 속에 살았지요.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빛 가운데 들어간 순간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신앙경력이 쌓이고 사역이 확대될수록 더욱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 15:9)'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로 그리고 인생의 황혼에 마침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딤전 1:15)'로 자신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발견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 순간 유다처럼 자기연민과 좌절의 심연에 빠져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 마음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헨리 나우웬이 잘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또 하나의 교묘한 함정입니다. 진실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바로 그 순간 베드로처럼 주님께 나아가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체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라고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마치 집으로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풍성한 용서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체험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 기쁨은 야곱이 일생동안 축적한 모든 부와 성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 애통하는 사람

예수님은 또 다시 우리에게 충격을 주십니다. 어떻게 애통한자가 복된 자인가? 우리는 모두 웃고 싶어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슬픔은 두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 슬픔입니다. 자신의 죄나 불행한 일을 당할 때 겪는 슬픔입니다. 우리는 슬픈 일에 부딪히면 황급히 슬픔을 떨쳐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을 정말 가슴 깊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씀합니다. 그 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위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 스머즈는 슬픔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치유해야 할 아픔을 인정하기 전에는,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로 접어들 수 없다. 고통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을 의식하고, 기꺼이 떠맡으며, 자신의 소유로 삼아야 한다...

신앙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울어선 안된다는 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 물론 하염없이 슬퍼만 한다고 그 자체가 어떤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겠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잃었을 때 심히 애통해하며 이스라엘의 딸들에게 사울을 슬퍼하며 울라고 호소합니다(삼하 1:17-27).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간접살인 한 다음 슬픔이 가득한 시를 썼습니다(시 51편).

심지어는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죽음에 이를 정도로 슬퍼하시고 울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러한 슬픔의 감정을 아무런 여과 없이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털어놓으십니다(막 14:33-34). 히브리서는 이 즈음의 예수님의 모습을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슬픈 일을 당하면 참으려고만 한다거나 빨리 벗어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슬픔을 가슴 깊이 받아들입시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과 세상을 위한 슬픔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바라보면 슬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 권력자인 바사왕의 신임을 받으며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앙공동체 이스라엘의 형편없이 무너져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하염없이 웁니다(느 1:4-6). 예레미야가 그러했고(렘 8:21-9:1; 13:17) 바울이 그러했습니다(빌 3:14). 예수님 역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누이들과 동네사람들을 바라보며 같이 우셨고(요 11:35) 곧 무너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눅 19:41).

이렇게 우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하여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5년 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근 400만 명을 서로 죽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한반도는 여전히 원한, 증오 그리고 불신의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지 않습니까?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한없이 가벼운 즐거움에만 빠지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것도 슬픈 일입니다. 그 뿐 아니라 빈부의 금식한 차이로 말미암은 계층간 갈등 그리고 왜곡된 지역주의로 말미암은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회의 아픔을 치료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아픔을 더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교계 어른들 중엔 기회만 있으면 국민의 마음에 북한에 대한 증오와 불신의 불을 지르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계층간 갈등과 지역적 갈등이 교회 안에서조차 그대로 남아있곤 합니다. 복음의 바른 진리에서 벗어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만 있으면 얼마든지 대형교회를 만들어 큰 권력을 누리고 행사합니다. 성도들은 그들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끼며 아낌없는 충성을 다 바칩니다. 그것도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회에서 온갖 불의를 저지르는 지도층 인사들이 교회 안에서도 리더 노릇을 하여 교회는 도적의 소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 이 어찌 가슴을 치며 슬퍼할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참으로 슬퍼해야 합니다. 그때야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계 21:4). 이 위로의 날을 바라보며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합시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3. 온유한 사람

세 번째 복은 시편 37:11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는 또 하나의 역전입니다. 세상에선 '힘이 곧 정의'인 경우가 허다하지요. 힘에서 지면 아무리 옳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 겨루기에서 일단 이기고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신선한 뜻을 품고 정치의 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무너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하여 서양의 속담에도 '양처럼 온순하면 승냥이한테 물릴 터이니 이랑(살쾡이와 이리)을 대하여는 포악해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온유한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온유라 함은 무골호인을 상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유는 절제된 힘입니다. 불의에 대하여 의분심을 갖고 용감하게 대항합니다. 다만 불의를 저지르는 적과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겨 근본적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교정을 권합니다. 그들이 적반하장으로 달려들면 모든 손해와 고통을 온 몸으로 수용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불의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다가올 때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는 순간에도 자신에게 죽음의 고통을 주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 드리십니다. 하나님께마저 버림받는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절규하셨지만 결국 참아내시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고 만족해하십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십니다.

이렇게 온유한 모습을 베드로는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라고 묘사합니다(벧 2:2). 이는 이사야 53:7을 연상시킵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 어떤 성도님이 저에게 '본질적인 것은 미약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를 연상시키는 참 심오한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은 사실 힘보다 무력함(powerlessness)에서 더 잘 드러난다고 성찰한 바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강한 것을 좋아하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들이 결국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라고 축복하십니다.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소외당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섬기는 통치권을 회복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통치권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책 한 권 남기신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인류역사를 바꿔놓으셨을까요?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일세의 영웅 나폴레옹도 성 헬레나 고도에 유배당했을 때, 자신의 처지를 장탄식하며 그렇게 약한 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이 천지를 석권해가고 있는 것을 부러워했다고 하지요?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제 4복에 나타나는 의는 예수의 메시아적 통치를 통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에 의거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지칭합니다(마 5:20; 6:33; 7:21). 물론 세상도 정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의의 명분 없이는 어떤 전쟁도 치러지지 않습니다. 바로 왕의 이스라엘 추격으로부터 히틀러의 대 유대인 학살 그리고 오늘의 비행기 테러와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씨가 정의사회구현을 정책목표로 내놓는 바람에 그 좋은 단어에 대한 기피현상이 생겨버리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내세우는 정의는 이렇게 대체적으로 힘과 이익을 거머쥐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세상이 실제로 목말라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돈과 권력 그리고 성공입니다. 최근 어느 지하댄스그룹이 생방송에서 성기를 드러내며 춤을 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은 목마름의 표출입니다.

하여 이런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삶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 한 성도님의 고민을 최근에 들었습니다. 직장에서 최근 회개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 데 직원들이 자꾸 개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소요비용을 청구하기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직원들은 회사의 관행이었다고 하면서 불평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임자는 그냥 넘어 갔는 데 왜 혼자 잘난척하느냐는 것이죠. 심지어는 대학생들로 정직하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지난 학기에 모 기독교대학교에서 기독교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했습니다. 중간고사 대신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고 요약한 후 소감을 쓰라는 과제물을 내주었습니다. 채점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소감부분에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부분에서 구체적인 반성대목까지 다른 친구 것을 베낀 학생까지 있었습니다. 서로 베낀 것을 골라내느라 무척 고생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직한 대학생활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적당히 정의를 외면하고픈 유혹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정말 목마른 사람, 정말 배고픈 사람은 눈이 뒤집힐 정도이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먹고 마시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100% 완벽하게 매사에 정의를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이미 더럽혀진 세상에서 죄를 짖지 않으려면 지구촌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일정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도 어떤 점에서 인간의 죄와 관련해서 타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시대에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창조질서에 의하면 일부일처가 맞지만 한 때 일부다처를 허용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일정정도 우리와 타협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정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면서 그런 타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정의로운 세상이 어서 도래할 수 있도록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세상이 정의라고 우기는 것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가 잘 간파한 것처럼 기득권층은 종종 실정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거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사 10:1). 현재의 모습에 자족하지 않고 더 정의로운 세상이 실현되기를 열망하며 정진해야 합니다. 물론 과격한 혁명주의자가 되란 말이 아니죠. 현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낭만주의자가 되란 말도 아닙니다. 체 게바라가 신념으로 간직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리얼리스트가 되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배부름을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 긍휼히 여기는(자비로운)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마음이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약자를 무시하고 경멸하기 보다 불쌍히 여깁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애씁니다. 죄인을 보면 그의 잘못만 보지 않고 형편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을 보면 그와 고통을 함께 느낄 줄 압니다. 원수를 바라보면 분노를 품기보다는 그 역시 피해자임을 이해하며 그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먼저 용서합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복 있는 사람일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는 흔히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들을 합니다. 물론 도덕교과서나 언론에서 긍휼이 많은 자비로운 사람을 치켜세우곤 합니다. 그러나 정작 삶의 현장에선 이런 사람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비로운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고 이용해먹고 용도가 다하면 가볍게 폐기처분합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기 주장을 밀어붙이고 목표달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강력한 리더십이 있다고 추앙 받기 일수입니다. 우리 민족이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같고 있는 향수는 대단합니다. 그가 군부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잔인하게 정적들과 반대세력을 짓밟았는지에 대하여는 매우 가볍게 생각합니다. 반면 그가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가져와 오늘날 전세계 12위를 오르내리는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 대하여 한없이 높이 평가합니다. 그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이런 역사의 굴곡을 거쳐온 우리로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자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오늘 소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정치·경제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경제현장에선 살벌한 경쟁의 원칙에 입각해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적인 관계 혹은 작은 공동체로 돌아오면 다시 이웃을 향한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살려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딜레마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비로운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도 모르게 습득한 독한 마음을 다시 걸러내야 합니다. 경쟁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경제현장에서도 최대한 자비로운 마음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왜 하필 사마리아인과 제사장/레위인을 비교하셨을까요(눅 10:30-37)? 일종의 충격요법입니다. 신앙인들이 얼마나 자비심을 잃기 쉬운가를 꼬집고 계신 것입니다. 최근 교계의 분쟁현장을 보면서 목사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독기가 서려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섬짓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정말 기대하는 것은 껍데기뿐인 종교적 열정과 행동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자비심입니다.

주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우리 마음을 흠뻑 적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 몰려오는 것을 바라보며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나환자를 비롯해 각종 병자들이 예수님께 치료받기 위해 몰려들 때 그들을 만져주시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고쳐주셨습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세리와 죄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시고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용납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예수님을 속썩이고 결국 배반한 제자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처절하게 실패한 베드로를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언어와 예술성으로 다 담아내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뿜어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삶에 옮기려고 애쓰는 이들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들만이 궁극적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때 당당할 수는 없습니다. 살길은 그 분의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진실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했으며 주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드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보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6. 마음이 청결한(깨끗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모든 탐욕을 버린 순수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사랑에 떼가 묻어 있지 않은 마음입니다. 바리새인의 형식적인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욕심을 챙기려 하지 않습니다. 이웃돕기를 빙자해서 자기 명예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겉으론 존경하는 듯 하지만 내심 순진하다고 무시합니다. 철없는 낭만주의자로 몰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겐 세상을 맡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훈수를 둡니다. 예수님은 비둘기 같은 순결과 뱀 같은 지혜의 균형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지혜를 빙자해서 순수와 순결을 은근히 경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마음이 청결하고 순결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갈 6:14) 자기 자신의 삶을 이웃을 섬기기 위해 온전히 쏟아 붇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빌 1:17). 마음의 청결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습득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보혈로 씻겨질 때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점을 잘 반영한 것이 '보혈을 지나'라는 CCM입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들이 누릴 축복은 하나님이 얼굴을 보는 감격과 기쁨입니다. 창이 깨끗해야 아름다운 경치를 보듯, 마음의 창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을 전혀 본 적이 없는 남양 열대 사람에게 눈을 아무리 설명한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청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청결한 하나님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온전히 보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역사의 끝에서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 보단 희미하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 볼 수 있는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고후 4:6).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본 모습을 발견합니다(히 1:3).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빌립은 '주여,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줍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요 14:8)라고 애원하였는데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열망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그 열망이 성취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7. 화평케 하는(평화를 만드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각종 갈등관계를 풀어 가는 사람입니다.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과 집단이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사이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화해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겐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평화를 온 세상에 확산시켜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평화는 그냥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누군가 대가를 치러야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평화의 사도를 미워합니다. 분노와 미움을 폭발시킬 통로를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고픈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욕망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평화의 길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처형당하셨고, 종교를 빙자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했던 세력간의 화해를 촉구했던 간디, 백인과 흑인 사이의 평화를 꿈꿨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리고 해방 후 남북통일정부를 이룩하자고 호소했던 김구 선생 모두 권총으로 살해당했습니다.

평화를 만들어가려는 사람은 자기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들으셔야만 했던 조롱, '저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였으되 자기 몸은 구원하지 못하는도다'라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막 15:31). 평화는 순교적 삶의 열매로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원한과 증오를 잠재울 수 있는 힘은 희생적 죽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종종 기독교 지도자들이 원한과 증오를 더 부추기곤 한다는 점입니다. 해방 60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8.15 광복절을 전후해 남북간 여러 가지 행사가 있습니다. 통일축구도 그 일환입니다. 축구 경기하는 동안 태극기도 인공기도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한반도기만 사용을 허락한다고 하니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아직도 원한과 증오가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갈등은 호남과 영남 사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어깨가 무거운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축복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평화의 나라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반열에 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당하고 감내하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7가지 복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삶입니다. 물론 아주 예외적으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잘된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핍박당하고 천수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추구해도 핍박받을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추구하면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삶의 양식과 하나님나라의 삶의 양식이 같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정의를 추구하지만 세상나라는 돈과 권력 그리고 향락과 성공을 추구합니다. 둘의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깝게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직장에서 좀더 광범위한 차원에선 정치현장에서 충돌합니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포기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합니다.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요청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마음과 몸으로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꾸준히 신문을 보고 다양한 논평에도 귀를 기울이며 성경적 사고와 하나님이 주신 일반상식과 양심에 비추어 판단을 내리는 훈련도 쌓아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행동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소유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판이합니다.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온 몸으로 전하기 위하여 수 없는 고생과 핍박을 겪은 바울은(고후 11:23-33) 역설적으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고후 1:3-4).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이 땅에서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고통을 통과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역설적으로 경험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습니다(행 5:41).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기 직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행 7: 55-56). 그는 예수님을 닮은 용서의 기도를 드리며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모습입니까? 오늘 날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피해 세상의 정의로 가장된 불의와 타협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위해 기꺼이 핍박을 받아 복된 사람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맺음말

김교신 선생이 잘 간파한 것처럼 팔복은 예수님의 고매한 인격과 삶에서 우러나온 말씀입니다. 그의 자서전과도 같은 것입니다. 팔복을 대하면서 다시 한번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란 시가 생각납니다. 그는 교회당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고백합니다. 팔복은 생각만 해도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숨이 차 오르는 것 같습니다. 여덟 가지 인격을 묘사하면서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뜻 모르는 추상화를 감상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팔복의 시작이 마음이 가난한 자로 시작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더욱 더욱 가난해질 수 있길 축원합니다. 하여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힙 입어 마침내 팔복의 언덕을 오를 수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보시기에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박 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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