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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9) - 은혜 (Grace) (롬 8: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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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은 갈수록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게 될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활은 더 편리해지고, 여가 시간이 점점 더 많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세계는 더 메말라가고, 마음의 여유는 더 없어지고, 평안이 없습니다. 개그나 코미디와 같은 얄팍한 웃음은 있을지 몰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기쁨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수록, 인간관계는 더 삭막해져갑니다. 양성 평등시대를 맞이하여 30, 40대 남성들의 고민이 많습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라난 그들이기에,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몸에 배여 있습니다. 의식은 양성평등의식을 갖고 있지만, 몸은 여전히 가부장적입니다. 의식과 몸이 따로 노는 그 사이에서 갈등을 많이 합니다. 어르신들은 젊은 세대들을 보면서 몹시 불안해합니다. 6.25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들이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또 다른 사상쯤으로 받아들이는 데 대하여 분노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거냐, 이 나라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다고 염려하기도 합니다.

이런 복잡한 사회 갈등을 해소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은혜 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 교회, 사회에 은혜가 메말랐기에 갈등이 치유되기는커녕 심화되고, 문제가 계속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은혜는 자로 잰 듯이 따지지 않습니다.
은혜는 있는 그대로 용납해줍니다.
은혜는 그냥 베푸는 것입니다.
은혜는 댓가 없이 그냥 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저 용납받고, 용서받고, 조건없이 사랑받고, 이해받는 은혜를 사람들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에게 은혜를 부어주소서.”

지금부터 488년전인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신학자요 신부인 마틴 루터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목회하던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당시 교황청의 면죄부 신학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의 문서를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입니다. 루터는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하고 죽음의 상황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함을 느끼고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서 금욕, 순결, 고행, 밤낮없이 기도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어느 수도사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였고, 금식하였지만, 구원의 확신은커녕 몸만 점점 쇠약해져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지고 거룩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고민과 절망을 더 깊이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514-1515년 경,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면서 로마서 1:17을 통해 복음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는 이 구절에서 루터는 복음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벌하는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얻어진 의(passive righteousness)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성질의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해서 얻는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은총을 받아들임으로 의롭게 되는 수동적인 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노력으로, 선행으로 의롭게 될 가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 입니다. 나의 공로나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이나 봉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었습니다.

2.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미국의 스티브 멕베이 목사께서 쓰신 <은혜 영성의 파워>란 책을 읽었습니다. 멕베이 목사님은 27년간 주님을 믿어왔는데, 불과 5년 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삶을 배웠고, 그 진리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수년 동안 하나님께 새로운 헌신을 다짐, 다짐, 또 다짐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렇게 열심을 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곤 했습니다. 그러면 죄책감에 빠집니다. ‘나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어. 나같이 일관성 없고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아’ 이런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급기야 ‘하나님, 나를 죽여주세요’ 라고 외치며 밑바닥까지 떨어집니다. 그러나, 새로운 동기가 주어지면 또 다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자, 이제 나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거야’ 라고 다짐하며 주님을 위해 살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멕베이, 은혜 영성의 파워, p.30-31)

아마 우리들 대부분도 이런 삶을 반복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 마음,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멕베이는 ‘육의 삶’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의입니다. 세상적인 의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가 뭔가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도를 닦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그 반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분의 은혜로 살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받아들인 순간부터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계속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지혜로,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갑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31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러분을 일상적으로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분들이 곁에 계십니까?
괘씸한 것들, 나쁜 것들, 저주받을 것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편이 되신 하나님, 여러분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는 하나님, 여러분을 도와주시는 하나님, 여러분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여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시니 여러분은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할 것입니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외아들까지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다 주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에 대해 너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져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목적은 우리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의 미래에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무도 손 못 댑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요, 의로운 사람으로, 성인으로 만드셨습니다.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을 죄인이라고 정죄할 사람은 사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탄의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죄인이 아닙니다. 이미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넘치는 사랑을 막을 것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떤 환난을 당하여도, 어떤 고통을 당하여도, 가난이나, 질병이나, 위기를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옵니다.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에게 실패와 좌절감을 갖다주는 사건들,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분들은 오늘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의 도움으로 넉넉히 이기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 이게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형통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립니다. 메추라기가 떨어집니다.
반석에서 물이 납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넙니다.
은혜가 있으면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되는 것도 없습니다.
은혜는 만사를 형통케 하는 큰 손, 미다스의 손입니다. 은혜가 닿는 곳마다 막힌 곳은 뚫리고, 약한 것은 강해지고, 가난한 자는 부요해지고, 상처가 치유되고, 잃었던 것이 회복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실한 에서보다 교활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야곱이 축복받았습니다.
시골 촌뜨기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도시의 똑똑한 사람, 왕족들을 뒤로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남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인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았고, 밧세바가 낳은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은혜입은 자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여 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바울이 세계 선교사로 위대한 대 사도로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오른편 강도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 낙원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평생 악한 짓만 하고 살아온 그 강도의 죽음 직전에 “너도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인과응보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조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책에서 “은혜는 산수가 아니다” 란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1+1=2 와 같은 산수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심는대로 거두는 진리, 인과응보의 진리도 작용하지만, 그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은혜의 진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인과응보, 심는대로 거두는 원리를 적용하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란 이유 하나 때문에 은혜를 베풉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무조건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4. 자,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폴 투르니에는 “자신에 대해 가장 철저히 절망한 신자일수록 은혜에 대한 확신을 가장 절실히 고백한다” 고 했습니다. 장로교 창시자인 칼빈은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가난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런 가난한 심령으로, 믿음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시편 90: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되게 해 주소서. 잘 되게 해 주소서.”(쉬운 성경)
시편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은혜가 없는 세상입니다. 가정에도 은혜가 없고 권리주장만 난무합니다. 직장에도, 회사에도, 동네에도 은혜가 없고 일한 만큼만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대물림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은혜를 받아, 은혜 없는 세상에, 은혜를 갈망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의 강물이 흘러가도록 합시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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