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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롬 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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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습니다. 조창인 씨의 「가시고기」라는 장편소설입니다. 가시고기는 물고기인데 엄마 가시고기는 알을 낳은 후에 어디론가 달아나고, 아빠 물고기는 남아서 알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내어놓고 싸운답니다. 알들이 깨어나서 새끼 물고기가 되면 이들은 제 길로 떠나고 아빠 물고기만 남는데, 홀로 남은 아빠 물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쳐 박고 죽어 버린답니다. 그 고기가 가시고기 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열 살배기 다움이에게 백혈병이라는 무시무시한 병이 찾아옵니다. 이 아이의 엄마는 부잣집 딸로 자라면서 자기 밖에 모릅니다.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도 너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가족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이가 병이 듭니다. 그래서 아빠 혼자서 아이의 병을 간호하게 됩니다. 백혈병은 혈액의 암이 라고 불리는 정말로 무서운 병이랍니다. 급성인 경우는 며칠을 못 견디고 죽는 경우도 많고, 만성이라 할지라도 대책 없이 떨어지는 적혈구와 대책 없이 많아지는 백혈구로 인해서 몸의 저항력이 뚝뚝 떨어지는 병입니다. 아빠는 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을 합니다. 병원에 입원시켜서 골수 검사도 받게 하고 항암 치료를 받게도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백혈병의 고통으로 몸부림을 칩니다.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가 홀랑 빠지는 것은 두 번째이고, 밤새도록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가고 때로는 호흡 곤란 증상을 보이기도 하고 약을 먹으면 곧 토해내고 낮이나 밤이나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내고 아이는 아주 진저 리를 칩니다. 항암 치료는 어른들도 힘든 것인데, 어린아이가 받아야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읍니까. 다움이의 모든 고통을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서 돌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심정은 또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때에 내 삶도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아버지는 곧 죽을 자식을 위해 과연 어느 길이 바른지 방황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깊은 산 속으로 가서 꿈같은 시간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의 병이 잠깐은 완전히 나은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응급사태가 찾아와 혼수에 빠지면 아이를 안고 산을 내려옵니다. 이 병에 걸린 이후로 2년여 동안 입원과 퇴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데, 10번도 넘게 하였습니다. 아이가 사는 길은 오직 골수이식인데 가난한 아버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기자로서 작가로서의 양심도 팔아 보지만 결국은 실패합니다. 그러던 중 돈 많은 어느 중년 화가와 재혼한 다움이의 엄마가 나타나서 돈으로 아이를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아이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 아이가 조각에 아주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을 보고서 그저 재능에만 욕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 엄마에게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불법인 장기매매를 시도 합니다. 콩팥 하나를 떼어 팔아서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데, 검사를 받다가 그만 자신이 간암이 걸려서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장매매가 불가능해지니까 자신의 눈의 일부분인 각막을 떼어 팔기로 합니다. 결국은 한쪽 시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는 가운데 다움이에게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일본의 어느 젊은이가 나타나서 골수를 기증하겠다고 합니다. 다행히 다움이와 신체조건이 잘 맞아서 골수이식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아이는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지만, 아버지는 간암으로 죽어가게 됩니다. 복수가 차올라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동자까지 노랗게 변할 정도로 황달이 심하고, 65킬로그램의 몸무게가 40킬로그램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니 아이를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합니다. 눈물로 지냅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다움이를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사는 엄마에게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어 가시고기처럼 아빠는 백혈병으로 죽어 가던 아이를 큰사랑으로 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시키나, 자신은 암으로 죽고 만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라 합니다.

이 소설에 일본인이 도와주었다고 했는데 소설 같이 일본 사람이 도움을 주었다는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한 일본인의 따뜻한 인간애가 국경을 넘어 백혈병 소아암으로 투병 중인 생면부지의 한국 어린이에게 05.10. 27일 일본인 중년 남성의 조혈모세포(골수)가 기증됐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최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와 소록도 한센병 환자에 대한 일본 법원의 패소판결 등으로 양국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온 아름다운 이야기여서 더욱 감동을 주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일본인의 조혈모세포가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30분.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의 조혈모세포 코디네이터 팀은 항공기에서 내려진 조혈모세포를 앰뷸런스에 싣고 급히 병원으로 이동했다합니다. 혈액내과 조빈 교수팀은 병원 13층 무균실에서 이를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이정표(11)군의 몸에 이식했다합니다. AB형이었던 정표군의 혈액형은 얼굴도 모르는 일본인의 혈액형인 B형으로 바뀌었다합니다. 정표군은 이식 직후 “학교에 가고 싶다”며 해맑게 웃었다합니다. 정표군의 웃음 뒤엔 7개월 동안의 고통이 있었다합니다. 정표군이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은 지난 3월 말. 갑자기 코피가 쏟아지고 열이 나 동네병원에 들렀다가 “빨리 큰 병원에 가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대답을 들었다합니다. 검진 결과는 소아암 중에서도 가장 발병 빈도가 높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었다합니다. 조혈모세포 이식만 받는다면 5년 후 정상인처럼 활동할 수 있지만 기증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합니다. 유전자 검사결과 가족은 모두 부적합 판정이 났고, 국내 조혈모세포 은행을 통해 찾은 국내 기증 서약자 5명은 가족의 반대 등의 이유로 기증의사를 철회했다합니다. 코디네이터 팀은 곧바로 대만, 일본,미국, 독일 등에 정표군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기증 서약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인 기증 서약자 가운데 정표군과 유전자형이 일치하는 사람이 나왔다합니다. 이 일본인은 이날 오전 일본의 한 병원에서 조혈모세포를 채취해 한국에 보냈다합니다. 정표군은 “꼭 일본에 가보고 싶어요. 우리 가족에겐 고마운 사람이 사는 나라잖아요”라고 말했다합니다. 정표군의 어머니인 김순규(40)씨는 “얼굴도 모르는 정표에게 골수를 기증한 일본인에게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새 생명을 준 기증자를 생각해서라도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합니다.(국민일보)

  사랑은 자신을 희생합니다.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투상황이 아주 불리해져서 후퇴를 하는 중에 한 병사가 뒤에서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한 중대 대원중에 한 사람이 "총에 맞은 저 병사는 내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구출하러 가야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친구는 총에 맞은 자신의 친구를 구출하기 위하여 그 무서운 장소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말렸습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너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고 위험하고 또 보건대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니 자네 친구는 벌써 죽었어. 그러니까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 된다고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그 전쟁터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등에 업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생각대로 친구는 죽었습니다. 업혀 오는 동안에 죽었습니다. 그 때에 중대장이 말하기를 그것보라고 왜 고집스럽게 쓸데없는 일을 했냐. 자네 생명도 참으로 위험했다 그런데 자네가 업고 온 친구는 이미 죽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병사는 말합니다. "아니올시다. 내 친구는 내가 등에 업어서 이리로 데려올 때에 내 등에 업혀서 말하기를 '네가 올 줄 알았다. 네가 반드시 올 줄 알았다. 나는 너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참으로 행복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인터넷 정보 클럽-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도 희생하시는 사랑입니다.

불란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조각품들 중의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의 수작이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물겨운 전설이 있다합니다. 그것은 어느 가난한 조각가가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도 피와 땀을 짜내는 노력의 결과로 걸작품을 완성시켰는데 하루는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기에 조각품이 얼어 상할까봐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덮어놓음으로써 조각품은 보존이 되었지만 그는 얼어 죽고 말았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 얼어 죽기까지 했다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해도 버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켜 가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기 때문이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형식을 좋아 합니다.

  한 전도자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어느 해변에서 한 그리스도인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봅인데 그와 함께 비 그리스도인들 몇 명을 만나 아주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대화는 기독교에 대한 것으로 흘러 활발하고도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우리는 떠나기 전에 서로 주소까지 주고받았습니다. 그 대화에 대해 만족스러웠는데 봅은 왠지 아주 침통해 보였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대화가 완전히 실패라고 생각해요 복음에는 중요한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당신은 두 가지밖에 말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순서도 맞지 않았고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오후에 만났던 그 세 사람의 이름이 뭐든 가요." 물었더니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한 명 아니에요. 아니 그 반대였던가.” 라고 말했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실망해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젊은이였습니다. 또한 지나칠 정도로 종교적이고 신실하며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도에서 네 가지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식에 너무 철저한 나머지 사람들의 실제 삶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리새파 적인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열심 있는 사람들에게 흔한 병이기 때문입니다. 이 학생은 구원의 네 가지 요점을 설명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구원하려고 오셨던 바로 그 사람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개혁해 가야 합니다. 개혁은 성경으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입ㅁ니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습니다.

한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 봅니다. 저희가 이전에 대구에서 살 때 다니던 교회는 {삼덕 장로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이사오기 얼마전 삼덕교회에서는 전 교인에게 '사도신경' 의 새로운 번역문을 인쇄하여 나누고 찬송가 속표지에 붙여두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는 그 새 {사도신경}으로 전 교인이 신앙고백케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구요?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까지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이미 수 십 년 전에 번역된 문장으로 문법도 엉망이고 맞춤법이나 단어도 오류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세월동안 그 잘못된 {사도신경} 하나를 올바로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신경}가운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 중 {저리로서}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불행히도 저는 기독교인이 된 지 10년이 넘어 서야 그 뜻을 알았습니다. 옛날 세례 받을 때야 그 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기만 하면 되었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바보같이 10년이 넘도록 그 말뜻을 알려고도 않고 앵무새처럼 외어 오기만 한 것입니다. 후에야 알았는데 '저리로서'는 '그곳으로부터'라 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러 저리'할 때의 '저리'에 다가(그게 명사가 아니고 부사입니다) 옛날에나 쓰던 '로서(로부터라는 뜻의)'라는 조사를 합성한 모양인데 그게 '그곳으로부터'라는 뜻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참 멍청하였던가 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사도신경}을 외워 왔는지 말입니다. '저리로서'라는 기이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 4∼5년 전의 일인데 이제서야(그것도 겨 우 지방의 한 교회에서) 제대로 정리된 {사도신경}이 성도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보니 한편으론 많이 안타깝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회의 대 강령인데도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나 봅니다. 아니면, '그까짓'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의 문법 몇 개 틀린 것이 무슨 심각한 일이냐고 다들 생각해 왔기 때문일까요? 바라기로는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의 엉망인 문장 하나 못 고치는데 다른 더 큰 문제들을 어떻게 개혁해 나가겠느냐가 아니라, {더 크고 심각한 근원적인 문제들을 우리 한국교회가 개혁해 오느라고 미처 '사도신경' 문법 같은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않았겠느냐}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에 대하여 한기총을 중심한 단체들이 새로운 안을 제시 했으나 채택한 교단도 있고 보류한 교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바꾸는 일은 신학적인 문제들이 배경에 깔려 있어서 쉽지만은 않습니다.

  개혁해야 할 여러 요소 가운데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랑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4,5)합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개인적이니 개개인이 하기는 쉬운 것  같으나 잘 안되고 사랑의 실천도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는 아직도 흑백 인종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한번은 어느 흑인이 예배를 보려고 교회를 찾았으나, 안내를 맡고 있던 백인  교인이 예배당 안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이 흑인은 예배당 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밖의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안에서 울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성가 소리를 들으면서 명상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꿈과 같이 흰 옷을 입은 주님께서 나타나시더니 그 흑인의 어깨를 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그래서 "저의 얼굴이 검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래, 나도 그 예배당엔 못 들어간단다" 하시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 하며 사랑을 실천 합시다.

영국의 성자 스크리븐은 신학교를 다닐 때 해변에서 우연히 한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그 처녀는 몸이 허약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아픔을 견딜 수 없어 얼마 후 유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슬픔과 비애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교회 문 앞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은 거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거지는 스크리븐에게 구원을 해달라고 애원을 하였으나 그는 냉대하였습니다.

얼마 지난 후 그의 가슴속에 "내 너를 위해 피 흘렸건만 넌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었느냐"고 하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네가 한 사람에게 주려던 첫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줌이 마땅하지 않느냐" 하는 심적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사정 아뢰잖아 평화 얻지 못하네. 우리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하는 찬송가를 지었고 그 후 훌륭한 성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말씀 중심할 때 이루어집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유명한 성서 신학자인 오토 파이퍼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이 교수가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하는 말씀이 "자네들 그 종교 개혁을 마틴 루터가 일으킨 줄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일세" 라고 점잖게 말씀하자 학생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게 아니면 누가 한 거냐? 도대체 그럼 누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노교수께서는 다시 천천히,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루터가 그 갈라디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말씀이 그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그 사람을 폭발시켜서 루터는 그 진리를 전파하지 않고는 다른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네." 종교개혁은 루터가 한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의 진리가 한 것이라고 아주 신중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실과 반드시 이김을 주신 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개혁하되 첫 사랑을 회복 하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기로 다짐하며 종교 개혁 주일을 맞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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