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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용기있는 개혁신앙 (대하 3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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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주년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또는 현 정부를 통해서 개혁이라는 말을 정말 신물이 나도록 들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구호가 있습니다. 바로 “개혁”입니다. 어떤 정권이든지 새로 바뀌면 개혁을 앞세웁니다. 그렇게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언제나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구호 앞에 ‘개혁’을 붙입니다. 정치개혁. 행정개혁. 경제개혁. 근로 노동 개혁 . . . ‘개혁’이라는 말은 숭고하고 엄숙한 용어인데 너무 남용되어지고 자기의 정적을 처단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개혁이 제도나 시스템 개혁에 치중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의식과 사람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았는데 제도와 시스템을 바꾼다고 그 개혁이 완성될 리가 없습니다. 의식이 바뀌지 않고, 관행이 바뀌지 않고, 제도나 시스템의 개혁만 부르짖으면 더 불편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문제는 개혁을 주도하려는 세력이 자기는 바꿔지지 않고 누군가를 바꾸겠다고 할 때 더 혼란에 빠지는 것입니다. 개혁에서 나는 빼고 너만 개혁하겠다고 하면 그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사람의 의식, 가치관, 믿음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것 먼저 된 후에 제도도 바꾸고, 시스템도 바꾸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은 단순히 종교구조를 고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화 되는데 있는 것입니다. 교인이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감사하는 자가 되고, 불순종하던 사람들이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고, 신앙고백 없던 자들이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다.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해 주셨다!!.”하고. . . 신앙고백하는 사람들이 되고, ‘내가 했다’가 아니라‘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되고 전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씨뿌리기 전에 논밭을 갈아엎지 않습니까. 그래야 묵은 땅이 서로 섞이게 되어 흙이 힘이 있고, 농작물들이 강해지고 잘됩니다. 굳어버린 논과 밭을 그냥 두고 씨를 뿌려 보십시오. 땅 힘이 다 빠진 산성화된 땅에서 제대로 곡식들이 자라겠습니까?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속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1. 기독교는 개혁하는 종교입니다.

세상에서는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뼈를 바꾸고 태를 벗긴다는 말로써 정치권에서 개혁의 강도의 수위를 한층 높임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이 말 보다 더 근본적인 새로움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회개를 의미합니다. 철저한 자기개혁이 바로 회개이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에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끊임없는 개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만큼 개혁을 강조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성경은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새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한번만 아닙니다. 날마다 . . .

우리나라에 세계 10대교회가 몰려있고, 1,200만 성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선교사 파송 2위의 나라라고 한국교회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실제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부패공화국, 음란공화국, 우상숭배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용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섹시하다’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가 그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 선생님은 섹시하다고 합니다.

참된 개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용기가 없으면 개혁이 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람이 아브라함, 야곱이 이스라엘, 시몬이 베드로, 사울이 바울로 바뀌어진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흔히 “예수 믿는 사람은 좀 답답하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고집 불통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난 사람은 믿음은 절대로 변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간마다 서슴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를 변혁시켜 나가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철학들, 모습들을 다 바꾸었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또 주변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켜 가는 사람입니다. 깡패 김익두가 변화되고 한국 기독교 초기 부흥사로 크게 활약하여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개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기독인의 94%는 한국 교회의 갱신과 개혁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이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이면서도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달라지기는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바꾸려하지는 않습니다. 개혁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자기가 개혁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개신교는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만일 우리가 개신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개혁을 포기한다면 부패하였던 중세기 교회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완전한 교회는 없고 완전한 신앙인도 없습니다. 완전을 지향하고 끊임없이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는 교회와 성도가 있을 때 그들을 가리켜 개신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혁을 하려는 사람은 고통이 따릅니다.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에게 저항을 받습니다. 과거의 관행에 안주하려는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은 488년 전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트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의 벽에 그 당시 잘못된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점, 95가지를 벽에 붙임으로 시작한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부패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 대표적인 사례가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던 중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연옥을 말하면서 이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면 그들이 죄사함을 받고 저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고 면죄부를 샀던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테첼이라는 사제가 파송을 받아 면죄부 판매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여기에서도 면죄부를 판매한 액수의 절반 정도가 알베르트라는 신부의 모인츠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빚을 갚는데 사용되기까지 했습니다. 루터는 이런 부패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정치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성경적이요 하나님 중심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외쳤습니다.

이태리 로마에 가보면 ‘계단 성당’이라고 불리는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에는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가 팔레스틴에서 가져왔다는 계단이 성당 중앙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던 바로 그 계단을 옮겨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계단이 28단인데 나무로 되어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반질반질합니다.
이 성당에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전해져서 오늘도 많은 참배객들이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그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 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사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 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다가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그 때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갈2:16을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로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결코 어쩔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2. 개혁은 말씀을 발견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를 외친 것입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을 부치기 이전에 이미 개혁의 운동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1415년 보헤미야의 훗스라는 사람은 개혁을 부패한 교황청의 개혁을 부르짖다가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화형장에서 “여러분은 지금 조그만 새를 죽이지만 102년이 지난 이후에 나타나는 큰 새는 죽이지 못할것이요!”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 그대로 102년후에 1517년 말틴 루터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후 프랑스의 발도와 이탈리아의 사보라롤라 등은 로마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다가 순교당 하였습니다.
영국에서는 위클리프라는 개혁가가 교회가 성경보다 우위일수가 없고 성경은 신부만의 전용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는 종교 재판하는 중에 밖을 지나가는 목동을 보고 “저 목동 같은 아이들도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읽을 날이 반드시 올것입니다!”. 하고 죽었습니다. 그 예언 그대로 그의 이름을 딴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가 있으며 GBT나 여러 성경번역 선교사들과 단체의 노력으로 이제는 세계3000여 종족의 언어 가운데 2300여 종족이 자기들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이제는 자기 종족의 말로 성경을 읽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해서 피없이 아무런 땀없이 아무런 노력없이 되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남왕국 16번째 임금으로, 8세때 왕이 된 어린 “요시야”왕의 시대 이야기입니다.
요시야 왕은 20살 때, 청년의 정열로 6년간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수많은 제단을 다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우상까지도 다 부수고 불을 태웠습니다. 심지어 우상을 섬기다가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을 다 파헤치고 뼈들을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때려부수고 뼈를 불살라 가루를 내는 개혁은 엄청난 대 역사였습니다만 그런 개혁도 외형적인 개혁에 불과했습니다. 우상 제단은 부수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우상을 섬기는 마음은 부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상은 부수었지만,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고 싶은 불타는 죄의 열망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프트 웨어’는 그대로 두고 ‘하드웨어’ 겁데기만 바꾼다고 개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근본이 중요합니다. 근본적인 개혁이 중요한 것입니다.
6년 후, 요시야는 26세 때 그 동안 200년 동안에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4절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2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팽개쳐 져 있었습니다. 이 전왕 므낫세나, 아몬 같은 왕들은 말씀을 버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을 섬기던 일을 태연하게 저질렀습니다.

요시야가 발견하고 읽었던 말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다”고 한 것을 보면 신명기의 말씀(신6:5)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는 마음과 성품,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요시야 임금의 마음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요시야는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열심 있는 척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발견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활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대한 감리회 교리적 선언은 8가지로 되어 있는데
1)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4) 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 우리는 살아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으로 단된 교회를 믿으며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 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8)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성경은 이 세상에 잠깐 잇다가 없어질 풍조나 사조나 유행이나 사상이나 이런 것들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세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사람은 사람의 유행, 이 세상의 풍조 같은 것이 그들 생활의 표준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 표준은 따로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의 표준입니다. 이 말씀은 천지는 없어져도 이 말씀은 변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말씀입니다. 잣대, 기준, 표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BC 1,400년 경 모세가 기록하기 시작하여 AD 86년 경 사도 요한이 기록을 마친 시기까지는 1,500 여년이란 긴 세월이 걸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시기로 언약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내용들이 37명의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 각 시대와 환경이 다른 때에 동일한 주제로 기록하였습니다.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66권의 책으로 되었으며, 총 1,189장의 이 성경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잣대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의 거울입니다. 성경을 통하여서만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내 모습에서 어디가 어떻게 더럽혀졌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으로 깨끗케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처럼 풍성케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세상의 잡지나 소설을 읽고, T.V 연속극이 우리 삶의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성령의 인도하심 받고 실천하게 합니다.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다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고쳐야 되며, 무엇을 바로 잡아야 될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다시 성경을 붙잡으십시오. 그 속에 모든 진리가 있습니다. 보화가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수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역사하십니다. 이 말씀에 정통으로 한방 맞으면 모두 요시야처럼 됩니다. 재발견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반이 읽을 때, 개혁은 바로 요시야 왕의 마음에서부터 일어났습니다. 요시야는 옷을 찢었습니다. 참회의 진정한 표현입니다.

3. 진정한 개혁은 자기 옷을 찢는 것입니다.

19절 보면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여러분 옷을 찢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의 옷을 찢기 전에 자기 옷을 찢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인들의 옷을 찢기를 원합니다. 혹은 경제인들의 옷을 찢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찢어야 할 옷은 자기 옷입니다.
진정으로 개혁하는 신앙은 요시야처럼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내 탓이요.’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허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고을에 어린 나이로 시집을 온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솥에 쌀을 앉히고는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이르고 잠시 밖으로 일을 보러 나갔습니다. 며느리는 아궁이 앞에 앉아 불장난까지 하면서 불을 때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깜짝 놀라 솥뚜껑을 열어 보니 밥이 새까맣게 타 있었습니다. 식구들의 한 끼니를 고스란히 망쳐 놓았으니 며느리는 그만 부엌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돌아왔는데, 며느리가 엉엉 울고 있으니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냐?” 며느리는 차마 대답을 못하고 손으로 솥을 가리키며 계속 울었다. 시어머니는 솥뚜껑을 열어 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며느리를 다독였습니다. “괜찮다. 내가 늙어서 눈이 어둡다 보니 밥물을 잘못 앉혔구나.” 조금 뒤 아들이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말했습니다. “아이쿠, 아침에 내가 귀찮아서 물을 조금만 길어다 놓았더니 물이 적어서 그랬군요. 제 잘못이에요.” 조금 뒤 또 시아버지가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며느리는 바닥에 앉아 울고 있고 부인과 아들이 서로 자기 잘못이라고 하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부인에게서 사정을 다 듣고 난 시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그만 둬라. 내 잘못이다. 늙은 내가 아침에 근력이 부쳐서 장작을 굵게 패 놓고 말았더니 불이 너무 과해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옷을 잡고 있습니까? 누구의 옷을 찢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33절 보면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말씀을 깨닫고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제하여 버리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시야의 사명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 사명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일’입니다. 요시야가 전에는 몰랐지만 말씀을 듣다보니 그 사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리빙스턴은 선교하면서 여러번 죽음의 고비를 만났는데 그 때 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는데 리빙스턴은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깨달을 때 하나님은 그 사명을 다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권력으로 백성들을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사업장에서(그리스도인 사장으로서), 직장에서(그리스도인 상관으로서) 가정(그리스도인 아빠로서)에서 . . . 말씀 속에서 사명을 발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감당할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 맏습니다.

여러분 루터가 살고 있던 16세기에만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이 사회에도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중세 암흑시대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들도 있습니다.
성도들끼리도 서로 모함하고 중상모략하고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지 간에 자신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이기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교권주의와 향락주의, 물질주의가 만연합니다.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대형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 70%가 기독교인이랍니다.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는 망합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든지 종교가 마지막 보루인데 그 종교가 부패하면 여지없이 나라는 망했습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먼저 자기 개혁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타성이 붙고 요령만 생겨서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믿음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합니다. 형식주의와 외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고 국가가 삽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처럼 시몬이 변하여 베드로가 된 것처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성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낡아서 못쓰는 그릇이나 고철들을 그대로는 사용할 수가 없지만 3천도 이상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 들어가서 녹아져서 새로운 제품의 그릇이 되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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