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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주일] 계속되는 개혁 (마 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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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라는 당시 이름도 없고 보잘 것도 없는 한 수도사가 95개조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부착함으로서 하늘을 찌를듯하였던 중세 천주교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교황의 말 한마디가 여러 나라 황제들의 옥좌까지 들었다 놓았던 그런 상황에 마틴 루터는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행동이었습니다. 현실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무지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마틴 루터가 당시 중세 천주교에서 이름을 얻으려면 주변 상황을 빨리 파악해서 적응하고 타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주변의 상황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종교재판장에 선 마틴 루터.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법왕을 대신하는 재판관의 선고는 이랬습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네가 한 모든 말, 네가 쓴 모든 책이 다 잘못되었다고 고백하면 살려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파문하겠다.”
파문.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파문이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파문된 사람은 마치 개나 돼지 같이 취급했습니다. 어느 누가 그를 죽여도 법적으로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엄청난 정죄의 말에 마틴 루터는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는 잠깐 동안 생각할 여유를 달라하였습니다. 그리곤 기도실에 들어가 최후의 간곡한 기도를 드립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순간, 타협하면 그의 생명은 건질 수 있습니다. 중세 천주교에서 자기가 원하는 자리를 요구하는 타협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말에 순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용기를 얻은 루터는 법왕사절 앞에 섰습니다. 그리곤 그 유명한 선언을 합니다.
“나는 내가 한 말, 내가 쓴 책, 어느 하나도 부인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 내가 여기 섰사오니 나를 도우소서!” 힘차게 외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제 그는 파문 되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들어 크게 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주일로 드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할 교회가 그 본질을 잃고 형식과 껍질만 남았다는 데 대한 항의였다는 것입니다.
교황의 말이라면 절대적이었습니다. 임금이 되려면 교황이 왕의 면류관을 씌워주어야 했습니다. 그 권력은 막강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권력 다툼이 생겼습니다. 또한 중세 천주교의 위세를 드러내려니까 겉으로 보이는 교회 건물의 크기도 강조되어 큰 교회 건물 웅장한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돈으로? 그래서 면죄부를 팔았던 겁니다. 성직도 돈으로 사고팔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중세 천주교의 주장이 곧 구원 얻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의 유대주의와 같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곧 공로사상이었습니다. 그것도 남의 공로조차도 돈 주고 사면 된다는 겁니다. 구원을 행동의 공로로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루터의 주장은 그런 것으로 구원 받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내세운 세 가지,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Sola Gracia (오직 은혜로만)
Sola Scripura (오직 말씀으로만)
그것이 종교개혁 정신입니다. 그것이 개신교 정신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역시 형식과 껍질을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 안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이 아침 교회 나올 때 어떤 마음이었어요? 가슴이 설레던가요? 빨리 교회가고 싶은 마음이던가요? 예배의 기쁨, 예배의 감격이 기다려지던가요? 함께 예배드릴 성도들이 보고 싶던가요?
교회에 나오긴 했는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예배는 드리지만 기쁨도 감격도 없다면……. 성도들을 만나서 인사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썩어가는 모습으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모습으로가 아닙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새것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그것은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로는 안 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새롭게 하자는 신앙의 개혁운동인 것입니다.

본문의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 이것은 단순히 오래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사고방식을 의미하며, 또한 삶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름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랬더니 나다나엘의 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그 촌 동네에서 무슨 인물이 나겠느냐?” 그런 말입니다. 아직도 “누군가 내편만 되어주면” 하는 낡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빈들에서(요한복음은 산)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끼니를 거르게 생기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하는데요.”라고 말합니다.
“돈이 있어야” 물론 돈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돈 보다 더 필요한 것 그것이 곧 믿음이입니다.
병자들이 고침 받았습니다. 무엇으로? 예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돈으로 고침 받는다면? 소경이 고침 받을 수 있을까? 거진데……. 12해 혈루증 앓는 여인이 고침 받을 수 있을까? 그동안 병 고치려고 재산을 다 써 버렸는데…….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데, 죽은 12살짜리 소녀가 살아나는 데는 얼마나 돈이 있어야 할까?
그거 아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어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맡기는 믿음이 그들을 살리게 한 것입니다. 내가 먹고 살아야겠다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내어 놓을 줄 아는 것이 믿음이거든요. 그것이 보화를 하늘에 쌓는 것이지요.
그러면? 내세에는 영생을 보장 받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백배의 복을 받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된다는 낡은 생각으로 삽니다. 그게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거냐?”에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권력입니다. 힘입니다. 사람들 권력만 있으면 된다는 낡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요즈음 사회를 보면 권력 참 좋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낮아져라, 겸손해라, 희생하라, 섬겨라, 그러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낳는다고 믿고 그 연못가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래, 물이 움직이면 병이 낫는 효과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에게 그 효력이 다 들어가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그 물이 맹물인가요?
뭐예요? 그래요. 미신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미신의 낡은 옷을 입고 거기 앉아있었던 겁니다. 그런 그가 새로운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의 병은 깨끗이 나았어요.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여전히 잘못 살아온 전통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구습이나 습관을 쫓고 있습니다.
생베조각. 희랍어로 ‘아그나포스’ 이 말은 한번도 세탁하지 않은 베를 말합니다. 새 포도주 역시 한번도 발효되지 않은 것 인데, 여기서 예수님이 문제로 삼는 것은 생베 조각, 새 포도주가 아닙니다.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가 문제인 것입니다.
낡은 베옷에 생베조각을 붙여 꿰매어서 세탁 한 번하고 그 옷을 말리면, 생베조각이 줄어들면서 옷 자체를 또 찢어 놓게 됩니다. 발효하지 않았던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그 포도주가 발효할 때 부대가 감당하지 못해 터져 버립니다.
유대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문제. 유대인들, 그들은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예수님은 생베, 새 포도주 입니다.
마태복음 9:13,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의인을 인정하고 죄인은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안식일 범하고,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생베 조각, 새 포도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38-39, 율법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에게 예수님은 생베 조각, 새 포도주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바뀌어져야 해요?
그럼요.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가 바뀌어져야 해요.
세상지식은 “온고이지신”이라 합니다. 옛것을 지키고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낡은 것 위에 더덕더덕 붙이는 새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아는 지식, 내가 사는 삶에 하나 더 갖다 붙이는 조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세상 지위, 가진 재물, 학식, 젊음 등에다 영생이라는 것을 하나 더 갖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생각, 그의 본질, 그의 삶 자체가 변화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청년은 “가진 것 위에 하나 더” 그러나 예수님은 “가진 것 다 버리면” 그 자체가 변화되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믿으면 “거듭난다.”고 합니다. 여기 거듭난다는 것은 옛것은 죽고 새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릿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합니다.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를 요구합니다. 새 가죽 부대이어야 새 포도주가 발효해도 터지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한 새 가죽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워지기를 거부합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내가 변화되어야 하는데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에 들어온 복음을 내 생각, 내 구미에 맞도록 변질시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내가 어떻게 결단하고 헌신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듣습니다.
성경강해연구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약 20명 정도입니다. 그 다음에 있을 셀목회연구는 약 1000명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단체에서 하는 일인데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많은 목회자의 관심은 성경연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회를 확장(좋게 말하면 부흥) 시키느냐 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체의 프로그램 중 미국교회 탐방, 홍콩교회 탐방이 있습니다. 이들이 찾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짧은 시간에 큰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큰 교회 만드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 했다고 하면, 그래서 커졌다고 하면 몰려갑니다. 한때 다락방 역시 그래서 생긴 결과입니다.
무슨 이야기? 본질이 바꾸어질 생각들은 안하고 환경만 바꾸어지길 요구들 하는 겁니다.
조지 바나(J. Barna)의 글 “주전자 속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ittle)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 잡아서 뜨거운 물 속에 넣으면 저 죽는 줄 알고 펄쩍 뛰쳐나옵니다. 그런데 적당한 물에 넣고 천천히 물의 온도를 높이면 개구리는 자기 몸이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서서히 적응해 간다고 한다. 그래서 물의 온도가 높아지면 한번 펄쩍거려 보지도 못하고 그냥 주전자 안에서 죽고 만다는 겁니다.
참새가 죽어도 짹 한다는데, 이 개구리는 왜 그 뜨거운 물에서 익어서 죽어 가는데도 한 번 펄쩍 뛰어보지도 못하고 죽었을까? 그것은 그냥 환경에 적응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에 더 이상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 말씀은 매 순간마다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욕심을 죽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늘 새로워지기 위한 몸부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삶으로 살고자 하는 생각과 삶을 죽이고, 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베 조각, 새 포도주는 그런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새것 입니다. 새로운 것 입니다. 개혁이란,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개혁은 구호로 되는 것 아닙니다. 개혁은 생각과 삶과 본질이 바꾸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새것으로 오셨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부활로 바꾸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인 것입니다.
새것,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부풀게 합니다. ‘새 해’ ‘새 옷’
아직도 묵은 생각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겁니다. 신천교회 장로님은 “목사는 가난해야 한다.”고 늘 주장합니다. 옛날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지난날은 우리에게 절망을 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보는 것은 ‘옛 하늘’, ‘옛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미래목회” 세미나. 그래서 보면 첨단시설, 대형 멀티비전, 디지털, 무슨 영상예배, 찬송가, 광고 등 앞에 있는 화면에 다 비추어 줍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컴퓨터 못 다룬다고 미래목회 못하는 것 아닙니다. 미래 목회는 미래에 대한 꿈이 있어야 한다고 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가슴이 설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가 보입니까?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렙니까?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란다는 것, 그것은 언제나 새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지나간 것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후회나 탄식만 일으키는 겁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과거입니다. 애굽 땅에 있었을 때 고기 가마 옆에 앉아 실컷 먹었는데……. 애굽 땅에서는 이런 고생 안 했는데……. 사실, 종살이 하던 사람이 무슨 고기를 실컷 먹었겠어요? 종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했겠어요?
문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땅에 대한 기대나 설레임이 없었던 겁니다. 지금 당장 배 두드리며 먹고, 등 따시면 다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 생긴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 있는 사람은 광야 보다 더한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윈스턴 처칠. 어느 날 자신이 졸업한 모교를 방문했습니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위대한 선배이신 처칠의 훈화를 듣기위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처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칠은 자기가 공부하던 교실, 책상 등을 감격스럽게 보며 왔다 갔다 하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Don't give up! Hold on!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
(포기하지 말라. 끝까지 버티라. 결코 포기하지 말라. 결코. 결코. 결코)
보세요. 새 가죽부대에 넣은 새 포도주는 발효합니다. 그러면 새 가죽부대가 터질 듯이 팽창하겠지요. 그러나 새 가죽부대는 결코 터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죽은 행실 회개함,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 이것은 신앙의 골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것들이 시작 곧 초보의 단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있다면……. 때마다 세례를 받고 있어야 한다면……. 아직도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 있느냐 없느냐로 고민한다면……. 그것은 초보의 단계요, 그것은 곧 옛날의 단계입니다. 그것은 잘하는 것 같지만 잘못된 거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과거의 상처를 빨고 앉았습니다. 제발, 징징거리고, 칭얼거리며, 어리광 부리는 일은 그만 합시다.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성경은 곳곳마다 “그러므로”를 강조합니다. “전에는” 그러나 “이제는.” “그러므로”
개혁은 한번이 아닙니다. 매 순간마다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는 한 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간 암울한 시절, 지나간 초보의 신앙, 지나간 왕년에 뭐 한 것, 다 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늘 새롭게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삶과 신앙을 새것으로 개혁시켜 나가는 주님의 일꾼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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