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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릴 것이 있습니다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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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그러니까 현재 월드컵 상암 경기장의 주변 일대를 ‘난지도’라고 부릅니다. 난지도는 한강과 갈라진 난지 샛강이 행주산성 쪽에서 다시 합쳐지면서 생긴 섬입니다. 이곳을 ‘난지’로 부르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난지(蘭芝)는 난초(蘭草)와 지초(芝草)를 합한 말입니다. 꽃 중에 난(蘭)과 지(芝)는 모두 은은한 향기를 지닌 식물로서, 난지라는 말은 흔히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곳은 좋은 이름과 함께 서울의 명소였습니다. 해마다 난초와 지초가 자라고 철 따라 온갖 꽃이 만발하던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나라의 정사가 잘 되는지를 알려면 난지도에 핀 꽃을 보면 안다고 하였습니다. 난지도는 언제나 꽃이 만발해 있어 '꽃섬' 이라 불리기도 했고,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의미의 '중초도(中草島)'로 불렀습니다. 또한 오리가 물에 떠있는 모습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오리 섬'이라고 불렀고, 수많은 철새가 겨울을 나기 위해 한강으로 날아들면서 바로 난지도 위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한다고 하여 옛 시인들은 '문섬(門島)'이라 미화해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이곳이 언제부터인가 쓰레기매립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의 온갖 더러운 쓰레기는 이곳으로 다 모았습니다. 그 아름답던 곳이 쓰레기로 뒤덮이고 악취가 풍기고 오물이 넘쳐나는 쓰레기 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난지도’ 하면 오물을 연상할 만큼 더러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벗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쓰레기의 인상이 강렬한 것입니다.

  쓰레기는 더러운 것이요,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동네에 오래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난지도로 모은 것입니다. 만약 동네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것이 치우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는 버려야 하고, 오물은 치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버려야 할 쓰레기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속에서 악취가 나고, 오물로 뒤덮여 우리가 온전한 생활, 깨끗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신앙에 쓰레기와 같은 오물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날마다 버려야 할 더러운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은 본문을 통해 이것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분노입니다. 본문은 계속되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내용은 하나이지만 적어도 3가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 탕자, 그리고 맏아들의 관점입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아버지와 탕자의 관점을 보았는데 오늘은 마지막으로 맏아들의 관점입니다. 맏아들의 모습을 이 비유는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포함한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이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맏아들은 아버지와 탕자에 대한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의 첫 번째 반응은 바로 분노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27절과 28절에서 잘 알려줍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여기 우리말의 분노는 강도가 얼마나 센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말하는 이 말은 보통 분노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늘 끝까지 치밀어오는 분노를 가리킵니다. 이성을 잃은 분노, 불같은 분노를 말합니다. 이처럼 분노가 치밀었으니 맏아들의 행동은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밖에서 흥분하면서 욕하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 분명합니다. 풍류소리와 사람들의 즐거운 소리가 아니면 벌써 잔치분위기를 깰 판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맏아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분노할 때 아버지를 보았으니 그의 행동이 짐작이 갑니다.

  맏아들의 이런 분노를 보면서 우리는 인류의 최초 살인자였던 가인이 생각납니다.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이유로 그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결국 분노는 동생을 죽이는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와 똑같은 현상이 여기에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결과는 뻔합니다. 살인도 가능합니다. 자기에게 해롭고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를 자제하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절제는 곧 자기를 조절의 힘을 말합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조절하는 힘이 바로 성령의 사람이요, 믿음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기를 조절하고, 분노의 현장에서도 자기를 침착하게 만듭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성령의 통제를 받기 전에 그는 거칠고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는 조절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이것이 돋보입니다. 기질이나 성품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모습이 가능할까요? 바로 조절하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분명 우리가 버릴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분노입니다. 분노를 성령의 능력으로 조절해야 합니다. 이제는 분노대신에 이해가 필요합니다. 지금 맏아들의 행동은 이해하지 못한 현상입니다. 그가 조금 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면, 동생을 헤아렸다면 분노를 발했겠습니까? 이해가 없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 분노가 치밀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두 지옥 불로 떨어지고 거기에서 고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대신 이해하고, 사랑하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이해가 내가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 분노를 버리고, 이해를 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불평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의 이런 말에는 온통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세히 그의 말을 분석해 보면 앞부분에서는 아버지께 대한 불평이고, 뒷부분은 동생을 향한 불만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불평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고, 사람에게 대한 불평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사람에게 불평하는 것이 여기 맏아들에게서 나타난 모습입니다.

  이 같은 불평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생각합니다. 노예로 살면서 지긋지긋하게 고생하던 그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으로 가는데 그들은 늘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힐 때 그들은 처음 원망했습니다. 애굽의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바다 한 가운데 죽게 하느냐고 화를 내고 불평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계속해서 불평합니다.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물을 주니까 이젠 양식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니까 이젠 매일 같은 음식만 먹는다고 불평합니다. 가나안에는 언제 가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보여달라, 광야에서는 불편해서 못살겠다고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두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원망과 불평입니다. 이런 불평에 대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을 밟아보지 못하고 모두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불평은 신앙의 무서운 적임을 잊지 마십시오. 불만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불만입니다. 부정적으로 사물을 보면 늘 부정적인 것만 보입니다. 우리의 자세를 좀더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낙관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불평은 결국 불평을 낳습니다. 처음 불평을 시작하니까 그 불평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내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의 뿌리와 근원을 잘라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 거울로 삼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고 호소합니다. 불평의 결과가 뻔한데 그것을 따라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제 원망을 버려야 합니다. 불평의 냄새를 제거해야 합니다. 불평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삶에 늘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날씨와 같이 햇빛도 내리쬐고, 비도 오고, 바람도 불고 그러다가 게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순환됩니다. 인생에 햇빛이 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비가 내리면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비판입니다. 30절을 보면 맏아들은 동생에 대해 판단과 정죄를 서슴치 않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옳은 것도 있지만 옳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맏아들은 탕자를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급한 판단입니다. 맏아들은 들에서 방금 와서 탕자에 대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고, 또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더욱 탕자와 대화한 적도 없어서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성급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기 창기와 함께 살림을 탕진했다는 말은 이 비유에서 오직 맏아들만이 언급하고 있을 뿐, 아버지도, 탕자도,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탕자가 밖에서 재산을 허랑방탕했다는 것을 짐작할 뿐, 사실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맏아들은 너무 성급히 판단한 것입니다.

  또한 맏아들은 동생 탕자를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맏아들이 호칭한 ‘이 아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동생을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동생에 대한 욕이고, 나아가서 자기는 동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고, 동생이나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매우 교만한 말입니다. 맏아들은 지금 자기가 동생과는 다르다는 교만에서 이렇게 판단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탕자에 대한 맏아들의 입장은 한마디로 ‘원칙론’이었습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무슨 용서고, 무슨 잔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바리새인들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맏아들은 바리새인을 상징합니다. 세리나 창기들은 분명 잘못한 사람이고 또 이런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고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데 왜 그들을 가까이하느냐 것입니다.

  물론 원칙론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사회와 공동체에는 어떤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원칙으로 정한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또 인간이 원래부터 악하기 때문에 원칙은 세워놓고, 늘 사랑이나 예외만 강조하면 그것을 이용하여 더 큰 범죄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분명 원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원칙론의 약점이 있습니다. 원칙론은 죄는 정확히 파악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의 마음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분명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암 덩어리와 같아서 가만 두면 온몸에 번지기에 수술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하나님의 마음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당시 바리새인들은 ‘원칙’만 알았지 ‘사랑’은 몰랐습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의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이 하루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마땅히 돌로 치라 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듣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하나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지금 죄인이 아니더라도 나도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인입니다. 죄에 대하여 피해갈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이 아니라고 장래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다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합니까?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옳다고, 죄 없다고, 떳떳하다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외에 자신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티와 들보를 예로 말씀하셨습니다. 티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집에 기둥을 바치고 있는 큰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작은 티가 있다면 나에게는 들보가 있습니다. 자기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쉽게 정죄 하지 마십시오.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아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정죄 대신 사랑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맏아들의 반응에 대한 아버지의 따뜻한 대답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지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단다 그러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니?...”
그러나 아쉽게도 아버지의 말에 대한 맏아들의 대답은 없습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계속된다면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말했을까요? 주님의 비유는 16장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결국 16장 14절에서 반응이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비웃음이 반응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도 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들의 악함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주님은 이 말씀 앞에 이젠 우리의 반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중세기에 성자 프란시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과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경건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새들이나 꽃과도 말을 나눌만큼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은 대표적인 기도문 중에 ‘평화의 도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제 이 고백이 우리의 기도,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분노대신 이해를, 불평대신 감사를, 정죄대신 사랑을 심게 하소서...” 우리가 날마다 버릴 것이 있습니다. 분노와 불평과 비판입니다. 그리고 취할 것이 있습니다. 이해와 감사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이제 평화의 도구로, 신앙의 사람으로 주님을 닮아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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