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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대 통곡하는가?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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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어처구니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된 것 아닐까? 내가 이러고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이러고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렇듯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너무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자신을 보면서 한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좌절합니다.
“나는 안 되는가 보다. 나란 놈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하지만 실망하지 마십시오. 다시금 일어서십시오.
비록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볼 때 이윽고 우리의 삶이 바뀌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조금씩 조금씩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우리가 자신을 향해서건 다른 사람을 향해서건 분노에 차서 외쳐대는 말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 번도 나를 향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조용히 손을 내밀어 잡아주실 뿐입니다. 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이 시간 마음속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을 따르는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순간 칼을 휘두르던 당당함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만 느껴집니다. 왜 그는 당당하게 나도 잡아가라고 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가지 못했을까요? 결국 그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가 칼을 휘두른 것도 어떻게 보면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가 당당했다면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앞을 가로 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슬픔에 겨워 잠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난 그에게는 당당함이 아닌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칼을 빼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거짓 용기도 예수님께서 제사장의 귀를 만져 낫게 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예수님이 밧줄에 묶여 무리들에게 끌려갑니다. 얼핏 몸을 피했던 베드로는 그런 무리들의 뒤를 살금살금 뒤따르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보고자 했을까요? 그때 베드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매우 착잡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게 자기 인생을 걸고 살아왔는데 그래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무리들에게 붙잡혀 가시는 지금의 예수님의 모습 속에 자기의 모든 꿈이 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그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미련은 남아서 예수님의 뒤를 밟고 있지만 자기도 붙잡힐 것이 두려웠는지 그는 멀찍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자신 있었는데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 다짐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도 심지어는 예수님을 부인하다 못해 저주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기로 작정을 하고 난 다음 우리 마음속에 있던 그 기쁨이 어느 순간 다 사라지고 없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셨던 주님을 보며 “정말 주님이시라면 나로 명하여 물 위로 걸으라 하소서” 고백했고 “오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물 위로 걷던 베드로가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속으로 빠져들던 때처럼 어느 순간 우리들 앞에 닥쳐온 어떤 변화로 인해 우리 마음속에 있던 기쁨은 다 사라지고 불안하고 두렵고 속상하고 불편한 마음만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간절히 은혜를 사모하던 그 열심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던 기쁨이 다 사라지게 만든 것일까요?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따르리라 작정했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주위 여건에 매여 버리고 있는 나 자신을 봅니다. 힘내어 새벽 예배에 참석하리라 작정을 하지만 왠지 몸이 무겁습니다. 생각해 보니 많이 피곤합니다. 그래 조금 쉬고 다시 시작하지 하는데 다시 시작하게 되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매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 일을 하기로 작정을 하지만 불편한 몸이 먼저 생각이 납니다. 그래 또 다시 “이런 몸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해. 건강한 사람이 하라고 하지”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주저앉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더 많은 것으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결심도 당장의 삶에 매여서 차일피일 뒤로 미루다 보면 마음만 간절했지 도무지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죄스러움만 더해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때라도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멀찍이 따르던 베드로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는 해도 주님을 믿기는 해도 그냥 대강 대강 따르고 거리를 둔다면 그 두려움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어느 순간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고 말더란 말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이 망가져버린 자신을 보게 될 때의 안타까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하녀 한 사람 앞에 무너져버린 베드로처럼 하찮은 일로 인해 속상해하며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내 자신을 보게 될 때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을 다 팽개쳐버리고 주저앉고 마는 자신을 볼 때 정말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우리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어야 하고 항상 깨어있어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보기에 믿음이 좋아보여도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주님에게서 떨어지게 되면 보잘 것 없는 일로 인해서도 상처를 받고 두려워하며 염려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힘들기에 더욱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기에 더욱 주님의 공급해 주시는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내 생각을 붙잡아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긍정적인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생각에 휘말려들고 맙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우리로 하여금 의심의 안개 속에 헤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뒤를 바짝 따름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시련도 그 어떤 어려움도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을 의지하여 극복하고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통곡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주님의 뒤를 멀찍이 따라 제사장의 집까지 들어갔던 베드로가 사람들이 뜰 한 가운데 불을 펴 놓고 둘러 앉아 있는 자리에 끼어들기까진 했는데 어느 순간 하녀 하나가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하고 말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을 해 버렸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이 너도 한 패라고 하는데 그 자리를 벗어나려니 덩달아서 예수를 모른다고 거듭 부인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문득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때 자기를 바라보시는 예수님과 눈이 딱 마주칩니다. 그때서야 “네가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 하시던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 베드로는 바깥으로 나가서 비통하게 울고 맙니다.
세상에 자기가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후회만이 가득합니다. 그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통곡하며 우는 일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보 바보 나는 바보야” 통곡하며 외쳐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울며 통곡해도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습니다.

그래요 어느 순간 우리가 통곡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우리들 앞에 펼쳐집니다. 속상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미안해서 울고 괴로워서 울 수밖에 없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연약함을 알려주실 때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심으로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도 하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도 합니다. 온전치 못한 부분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한 부분을 깨우쳐 주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며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심을 깨닫게 될 때 그 때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그냥 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고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은혜로 세워가시게 됩니다. 다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실 때 온전히 눈물로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 앞에 자백함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세워지며 잃어버렸던 기쁨과 열심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라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비통하게 울었지만 그러나 그 눈물은 그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바라보시는 안타까운 눈길을 받는 순간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통하게 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주님이 이 말씀을 주시기 전에 하셨던 또 다른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그래요 베드로는 비록 지금은 울 수밖에 없지만 주님의 말씀처럼 다시는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비록 지금은 주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금 주님을 슬프게 해 드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베드로는 주님이 다시 부활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요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지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지다 큰 물고기 153마리가 잡혀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시라는 누군가의 말에 물로 뛰어들어 주님 앞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귀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항상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래서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그래도 주님을 향한 사랑만은 변함이 없는 사람이 귀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네가 그러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하신다 해도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다”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비난한다고 해도 누가 우리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해도 “그래 내가 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여전하지 않습니까? 미움이 가득하다고요? 그래요 미움이 가득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연약하다고 해서 내가 부족하다고 해서 주저앉지 마시란 말입니다. 연약하기에 더욱 주님을 바라보며 부족하기에 더욱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십시오. 그리고 변함없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내 비록 연약하지만 내 비록 부족하지만 그래서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사랑합니다.”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위로와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가득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서로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엇갈린다 싶으면 이제는 사랑도 없는가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비록 잠시 엇갈렸다고 해도 잠시 시선이 딴 곳으로 흩어졌다고 해도 그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좌절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신뢰입니다. 믿음입니다. 그 신뢰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그 주님처럼 우리 역시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마십시오. 끝까지 믿어 주십시오. 밉기에 더 사랑해 주십시오. 속상하기에 더 사랑해 주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의 연약한 부분까지 다 품어 주십시오. 상대방의 추하고 더러운 부분까지도 감싸 안아 주십시오. 그것이 사랑을 얻는 비결입니다. 그럴 때 사랑이 회복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나는 당신을 사랑할 거야” 고백하십시오. 이 사랑만이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상대방을 변화시킵니다. 아니 내가 먼저 변화가 됩니다. 내 부족함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이 또다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따뜻한 사랑을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쉽게 화를 내고 내가 쉽게 실망하지만 그런 나를 여전히 주님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나를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주님 도와주세요” 힘없이 외칠 때 따뜻한 손길로 감싸 안아 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더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을 우리 마음에 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왜 실망합니까? 왜 자신에 대해 좌절합니까?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리는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 하나가 어떻게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지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손을 내밀며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어떻게 주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까? 회개의 눈물, 통곡의 눈물을 통해서입니다. 마음에 고통이 느껴지거든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되거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곡하십시오. 눈물로 회개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지금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나의 연약함입니까? 아니면 다른 누구 때문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다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주님 그렇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의 고백을 또한 나를 실망시킨 다른 사람과도 나누도록 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을 통해 새롭게 세워지며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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