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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기 (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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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러분에게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질문은 어떤 회사가 직원을 고용하는 필기시험 중에 나온 문제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그곳에는 세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은 단 한 명만을 차에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시겠습니까? 선택하시고, 설명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답을 적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일종의 성격테스트입니다. 어떠한 답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죽어가는 할머니를 태워 그녀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의사를 태움으로써 그의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사에게 보답하는 것은 나중에도 가능한데 반해,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응시자중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적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더 이상을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뭐라고 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제 차의 열쇠를 드리죠.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도록.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우리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욕심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모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나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는 당대의 훌륭한 학문과 사상을 고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족의 일원으로서 지도층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피는 당시의 노예인 이스라엘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살인자였습니다. 애굽의 관원을 죽인 살인자였으며 그로 인해 도망치는 신세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분을 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살인한 범죄자의 모습을 보신 것도 아니며 도망자의 신세를 보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바로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 바로 믿음 말입니다.
노예출신으로서 우연히 공주의 눈에 띄어 그 아들이 되었고, 왕궁에서 학문을 배우며 성장하다가 애굽사람을 죽인 모세에게 믿음이란게 도대체 있었습니까? 과연 믿음이 있었다면 어떤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보신 모세의 믿음의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1.기득권을 포기하는 믿음입니다.
모세는 이미 알려진 또는 이미 주어진 권리와 신분을 포기하였습니다. 그가 특별히 앞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진, 이미 자신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쌓아올린 공든탑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와 부가 보장된 신분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그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도 바로 이것에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삼위일체중 제2위가 되신 성자 하나님, 하늘나라가 그분의 거처가 되시며 창조의 사역에도 참여하시고 만유의 주 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보장된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한 모세의 마음을 성경은 믿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2.적극적으로 고난에 동참한 믿음입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고난속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모세는 권리만 포기한 채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실참여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애굽사람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 사람을 바로 땅에 파묻었으나 이튿날 자신의 살인이 발견된 것을 알고 미디안광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성경은 이 고난속으로 들어간 것을 또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백성들은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천하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초석이 됩니다. 고난 없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물로 뿌리는 씨앗이 있을 때에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진리가 우리 기독교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예수님의 죽음의 고난후에 부활의 찬란한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고난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난은 신비입니다. 고난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송가 장 가사에 “고난의 신비 알고자 천사도 흠모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4:13절에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니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고난받기를 좋하했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표현이 적절한 표현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고난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모세라도 그것을 좋아했을까? 제가 가진 영어성경에는 ‘좋하한다’라는 표현 대신 ‘선택한다’(choice)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더욱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죄의 일시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학대받는 길을 택했다](공동)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낫다고 택했다](새성경) 킹제임스성경이나 다른 영역본도 모두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고 ?L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 선택의 문제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고난은 분명 고통스럽고 뼈를 깎는 아픔이 수반되어 집니다. 고난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그 아픔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며 때로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고난을 감내하는 이유가 무었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잠시’라는 단어입니다. [죄악의 낙을 잠시다]라고 성경은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2: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고후4:18[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벧전1:6[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그렇습니다. 잠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때에 선택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가치있게 생각하는 가치관은 더 이상 이세상의 것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빌3: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상 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히10:34[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큰 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담대함을 버리지 마시고 당당히 고난에 맞서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시89:50[주는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
시23: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포항 안디옥교회 박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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