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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 아 유 ?(JESUS! Who are You?) (요 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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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103장, ‘참 목자 우리 주’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AD 202년에서 220년 사이에 지어진 곡인데, 그 곡을 지은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라고 알려져 잇습니다.
그 곡의 원제목이 재미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길들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찬양은 새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교육용으로 불려 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입니다.

저는 그 찬송 103장의 바탕이 되었던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 성찬주일에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사도요한에 의해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을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가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케 되면 여러분의 신앙이 견고하게 되고 그 이름을 힘입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은 누구신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저는 택족과 왕제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의 엄마, 아빠의 예수님 말고, 여러분의 예수님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부모님 때문에 주일날 억지로 나와 만나야 하는 분입니까?
주일날 교회 가서 만나지 않으면 부모님이 내 용돈을 깎거나, 다리몽둥이를 뽀샤뜨리는 그런 분은 아니십니까?


1.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는 분입니다.

(3) ‘ 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 당시에 중동지방의 마을에 있는 양의 우리는 나무로 잘 지어졌습니다. 양은 대개 마을의 공동소유로서 여러 목자의 양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문 앞에는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고용된 사람으로서 양들의 이름을 세세히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양의 목자만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양은 눈이 어둡습니다. 눈이 어두운 양은 스스로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디가 길이고 골짜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좇아가야 험한 골짜기나 가시밭길로 가지 아니하고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진리를 알고, 진리를 분별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양이 스스로 길을 수 없는 것처럼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그 스스로 진리를 바라보고 따라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가면 됩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일 넘어지고 매일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순간순간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지명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각각 개별적으로 불러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바라보고, 진리를 따르며, 진리대로 살아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주저 없이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한 사도바울에게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의 이름을 친히 불러 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사도바울의 옛 이름이입니다. 깜짝 놀란 사울이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 바울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고,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주님중심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되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도 누구보다 열심히 주님을 따른다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배반하고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은 베드로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그 부르심 속에서 베드로의 삶의 방향도 바뀌었습니다. 진리를 따라가는 진리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범죄한 아담이 숲 속에서 수치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어김없이 찾아오셔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있느냐?’

화려한 애굽의 왕자의 자리를 잃고 미디안 광야에서 절망에 빠져 양을 치고 있던 모세에게도 주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불의한 재물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세리 삭개오에게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주님께서 이렇게 각각 그 이름을 불러주심 속에서 그들은 모두 진리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베드로와 바울을 부르시고,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신 예수님께서 이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또한 각각 불러주십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알아도 아주 잘, 깊이, 속속들이, 확실하게, 제대로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십니다. 주님을 따라 살려고 했지만 때때로 넘어졌던 모습도 아십니다. 삶의 현장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인했던 모습도 아십니다.

택족, 왕제 여러분!
친구에게 따돌림 받기 싫어서 교회 안다니는 척, 열심이 아닌 척 했던 여러분의 모습도 아십니다. 내가 사람들 몰래 실수했던 모습들도 모두 아십니다.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기기에 연약함 때문에 짓는 여러분의 죄악도 아십니다.
또한 여러분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매한가지입니다. 주의 종이지만, 어쩌면 저는 여러분보다 더 못할 수도 있는 부족하고 연약한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 이 찬양을 좋아합니다.
내 이름 아시죠?
1.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2.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 내가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셨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는 각각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의 연약함을 맡기고 주님을 따라 나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상황 속에 있든 나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따라 진리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3:8‘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표준새번역)


2.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인지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동지방에서는 목자와 양들이 집을 떠나 들판에서 야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일단 야영지가 결정이 되면, 목자는 양들이 무사히 밤을 지낼 수 있도록 임시우리를 만듭니다. 양의 우리는 둥근 모양 아니면 사각의 모양으로 울타리를 칩니다. 그리고 그 위 지붕에는 포도나무로 덮습니다. 그러니까 입구부분만 열려져 있게 됩니다. 특이한 것은 출입구에 문을 따로 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밤이 되어 양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목자 자신이 그 출입구에 누워 스스로 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목자 자신이 양들의 보호막이 되고 또한 문이 되기도 합니다. 밤사이에 도둑이나 맹수가 출입구에 누워 있는 목자 자신을 넘지 않고는 양을 끌고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한밤중에 양들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목자는 양들이 잠자고 있는 양우리의 문이 되어 양들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자, 양의 문이 된 목자가 있기에 양은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목자로 인하여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문이 되어 주시는 분 인줄 믿습니다.
내 인생의 출입구에서 친히 문이 되어주신 주님이십니다.
고난의 인생길에서 나를 지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부모님은 나와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합니다. 형제도 나를 떠납니다. 내 배우자와 친구도 떠납니다. 여러분이 목숨 바쳐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남자친구도 떠납니다.
그러나 양의 문이 되어주신 우리 예수님은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지켜 주시고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중국의 양자강을 소개하는 프로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소개된 한사람을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인 티베트에 거주하는 42세의 ‘까르마’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추운 고원지대에서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촬영을 하는 날 얼마나 추웠던지 카메라가 얼어붙어 작동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곳에 취재하러 갔던 사람들은 텐트 속에서 벌벌 떨면서 모포를 덮고 잠을 자고 있는데, 목자인 까르마씨는 텐트가 아니라 양의 우리에서 모포를 덮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목자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합입니다’
그 혹한 속에서 양들이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그 목자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 기쁨과 평화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양의 문이 되어주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셔서 함께 계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은 선한목자이십니다.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은 이 단락의 열쇠이며 우리가 구역예배를 통해 공부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나는 …….이다’라는 자증의 선언이 담겨져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선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칼로스’입니다. 기아에서 나오는 차이름하고 똑같죠?
영어로는 ‘Good’ 입니다. ‘좋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선한 목자이십니까? 거짓된 삯꾼목자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선한목자이십니다.

맹수들을 쫓아 보내기 위하여 선한 목자는 그저 문 앞에 누워 있지만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다윗이 사자와 곰과 싸우면서 양들을 보호했던 것처럼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생명의 위협도 감수합니다.
그러나 거짓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삯꾼은 양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양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월급만 받으면 되고 자신의 생명이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양들을 보호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의 양 인줄 믿습니다.

겔 34:31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말씀으로 ‘너희는 나의 양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당시에 있는 목자들 중에 아니 지금도... 목자들 중에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있겠습니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양 한 마리가 그런 값어치가 있습니까?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그까이꺼 뭐 대충 잃어버리고 말지 않겠습니까? 아니 양 전부를 잃는다고 해도 여러분이 목자라면 여러분의 목숨을 내놓고 그것들을 지키시겠습니까?

솔직히 전 자신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 무엇으로 값을 치룰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주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비밀이 있습니까?
왜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까? 왜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풍성한 꼴을 먹여 주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우리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죽음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주님의 죽으심을 필요로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니 내 자신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죄와 벗하느라 하나님을 버린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는 모두 죄인이요 죄인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 대신 형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이 가죽채찍에 터지고, 이마가 가시관에 짓이겨지고, 손발에 못이 박혀 찢어지고, 옆구리에는 로마군인의 창에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꼭 쥐고 욕심으로 지은 죄, 발로 지었던 죄, 몸뚱이로 지었던 죄, 남몰래 은밀하게 품었던 음란한 생각들, 마음속으로 지었던 미움의 죄들까지 그 모든 죄값을 빠짐없이 다 치러 주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의 십자가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질병과 저주에서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오늘은 성찬주일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날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연약함을 고백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며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양의 문이 되어주셔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 버리신 주님의 사랑으로 새 생명 주시고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생명을 더럽히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며 따르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을 믿고 담대함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날마다 주님의 집에 거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나의 삶이 늘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포항 안디옥교회 박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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