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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마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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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도 바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우선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서 하나님 백성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후 여유가 생기고 형편이 갖추어짐에 따라 점차 비본질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 백성다워지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친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무엇이 삶의 본질인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는데 그 목적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험은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받으셨다는 점은 자기 마음의 욕심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특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새 인류의 대표로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좇아 살려는 사람이라면 어느 시대 누구든지 동일한 시험을 직면하게 된다는 점에서 보편성이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온 인류가 마귀에게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히 2:14-15) 다시 한 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셔야 했고 그 시험에서 이기셔야 했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습니다. 구속역사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떤 원칙과 방법으로 섬겨야 할지를 생각하시면서 금식하며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후에 주리셨습니다. 당장이라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육신의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다가가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3) 만약 예수님이 돌을 떡이 되게 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러한 제안은 아무런 시험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과 그 존재와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한 분이기 때문에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은 쉽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성육신 하신 상태에서 심히 주려 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사단의 말을 따르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그러면 사단이 예수님께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한 것이 어떤 점에서 시험일까요?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도 아닙니다. 쓸모없는 돌덩이를 사용해서 자기 능력껏 유용한 음식으로 바꾸어 먹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뜻일까요? 물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이기적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 일보직전에 있는 사람이 한 차례 자신을 위해 능력을 발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자신의 능력 중 최소한의 일부분이라도 자신을 위해 사용해야만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능력껏 일해서 자기를 먼저 먹여 건강을 유지함으로써 의욕적으로 타인을 위해 활동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정당할 뿐 아니라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이 넘는 무리들에게 빵을 만들어 먹이신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자신도 그 빵을 드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시험하고자 했던 핵심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단의 시험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즉, 사단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사람에게는 떡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서 먹었다면 마귀는 말했을 것입니다. ‘그 봐라! 너도 배고프니까 별수 없지. 사람은 일단 먹고 살아야 하나님 일도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에게는 죄로부터의 구원보다 떡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으며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로마제국을 타도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건설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드셨다면, 그 백성들의 절실한 필요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빵의 메시야가 되셔야 하고, 예수님이 세우실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끊임없이 빵을 제공해주는 거대한 빵공장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먹는 문제의 해결은 어느 시대에서나 심각하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경제문제 해결이 가장 비중 있는 공략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곤욕을 치르면서도 경제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에 재선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사람들은 빵의 메시야를 섬기기 원합니다. 사실 빵의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면 시험될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빵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동시에 여기서 시험을 받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떡을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늘 핍절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절한 빵의 필요를 인정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너무 배가 불러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기 쉽지만, 너무 배가 고파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나 몸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늘 먹을 것이 핍절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불안한 삶 속에서 경건하게 생활하며 하나님 나라의 깊은 도리를 묵상하며 살아가기란 정말 탁월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습니다. 여유가 전혀 없는 마음과 생활 속에 건전한 믿음이 깃든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당장 끼니가 걱정인 상태에서 이웃을 돌아보고 세계를 돌아본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양식을 위해서 성실하게 땀 흘리며 수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규모 없이 생활하지 않고, 각각 자기 짐을 져야 할 충분한 필요가 있습니다(갈 6:5).

그런데 이러한 필요성 속에 시험이 함께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드시는 것이 필요하지만, 성령님께서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게 하기 위함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그분의 뜻과 계획과 목적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셨습니다. 지금은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떡을 먹어도 하나님이 살리실 뜻이 없다면 살지 못합니다. 아무리 죽을 지경이 되어도 하나님의 뜻이 살리시는 것이라면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것이지, 떡이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보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을 구합니다. 너무 핍절해서는 하나님을 잘 못 섬기겠다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좀 더 나은 직장과 좀 더 좋은 배우자, 좀 더 좋은 집을 구합니다. 그 자체는 나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양식에 목을 매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떡만 있으면 산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떡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도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떡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일단 하나님의 뜻은 뒷전에 밀쳐두려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으로 산다는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떡의 필요에 접근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무시한 채, 그것 자체만 따로 떼어 내어서 중요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야 어찌 되었던, 우선 내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단은 취직부터 해놓고, 일단은 결혼부터 해놓고, 일단은 빚부터 갚고’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은 가끔 고려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려할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하나님의 뜻을 고려했다면, 중대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주의 깊게 하나님의 뜻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결혼도 준비하고 취직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명예나 지위나 재물이나 학위 등을 추구할지라도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고려하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먹고 사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적극적인 일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본질적으로 현실적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며, 배고픔보다 그 분의 인도하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고려해야 합니다. 많은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고려할 수 있기 바랍니다. 특수한 삶의 정황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은 충분히 고려하고 이해해주면서도, 삶의 본질 문제를 망각하지 않는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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