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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올바르게 성경읽기 (신 28:58-59, 눅 10: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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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매년마다 가을이 돌아오면 생각나는 과거의 즐거운 일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전광판에 쓰여진 광고를 보고서 문득 어린 시절에 즐거웠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가을이되면 어린 시절에는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70년대에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처음 가봤을 때 거기서는 우리가 흑백 TV로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동대문 운동장에 가면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을 입은 사관학교 생도들이 멋있게 스타디움에서 응원을 하는지, 저에게는 참으로 멋있고도 재미있게 느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라고 하는 것이 무척 사람들에게 가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초대장 받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어린나이에 특권의식을 느끼면서 초대장 들고서 경기장에 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납니다. 청년 시절에 들어서는 그보다 더 재미난 경험을 가을이면 가지게 되었습니다. ‘연고전’이라는 사립학교 대학 간의 체육경기였습니다. 그 장소에 가게 되면 연대와 고대 학생 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이 오는 경우도 있었고 ‘연고전 하는 날은 항상 이대는 휴강’이라는 말이 있듯이 경기장에 여자 친구 하나 데리고 그 장소에 가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있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체육대회가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는 항상 응원이 질서정연하고 멋있고 우리가 볼 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일관성있게 잘할 수 있구나!’를 느끼게 하는 체육대회였습니다. 그러나, ‘연고전’이라는 사립학교 간의 체육대회는 별로 규율적이거나 화려한 경기는 아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놀까? 무엇을 하면 더 재미있게 놀까?’를 찾는 모습이었고, 경기의 승패나 응원을 떠나서 한국사회의 청년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두가지의 체육대회는 과거 우리 사회의 두 부류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있었고, 또 하나는 절제되고 획일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 분위기가 항상 공존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너무 개인적인 삶이 자유스러워도 안되고, 너무 조직의 형식이나 규율에 묶여서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활 가운데는 항상 그러한 규율과 절제된 모범의 모습과 자유스럽고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즐거움을 가지려는 두 가지의 상태가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삶의 모순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가 취할 자세를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대신 반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의 첫째 질문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고 쓰여져 있는지를 묻는 것이겠죠. 그런데 예수님이 두 번째로 던진 “네가(당신은) 어떻게 이것을 읽느냐?” 라는 질문이 우리에게는 조금 어렵게 받아들여지면서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글을 읽으면 읽는 것이지 왜 예수님이 “어떻게 읽느냐?”라는 표현을 써서 율법사에게 질문을 하셨을까요? 글을 읽는 데 어떻게 읽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에 글(성경)을 읽을 적에 빠르게, 천천히, 소리를 높혀서, 낮춰서, 읽는다는 법이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읽느냐?’고 묻는 질문은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유대 당시의 표현으로 ‘어떻게 읽느냐?’라고 썼던 것입니다. 율법사에게 물은 예수님의 질문은 다시 정리해보면 “네가 율법에 쓰여진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율법사가 유대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답을 정확히 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 그는 이 내용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네 대답이 옳도다” 그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단서 조항 하나를 붙였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로 읽어드린 성경의 말씀 기억나십니까? 구약 신명기에 나온 이야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구약시대에는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라’ 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지키지 못하니까 신명기에서 어떤 경고를 줍니까? ‘네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너에게 모든 재앙이 오고 질병에 시달릴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율법사란 사람이 그 내용을 몰랐겠습니까? 충분히 알았겠죠.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알고 있지만 그가 매일같이 잘 알고 외우는 내용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단서 조항으로 확인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행하라’ 알고는 있지만 올바르게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로 읽지 못해서 문제가 된다는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처음 들어갔을 때 그 때만 해도 학생운동이 절정에 오르고 정부에 대한 비난을 격렬하게 할 때였습니다. 또한 대학가에는 사회주의적인 물결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의식화 교재라고 하는 것 중에 이율배반적인 교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교부 장관이 저술한 철학교재가 운동권 학생의 의식화 교재로 나왔습니다. 제목은 ‘앎과 삶’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교부 장관이었던 학자가 의식적인 삶의 목표를 향하여 철학적인 과제를 정리해서 쓴 글입니다. 책의 내용이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교재가 의식화 교재로 쓰였던 것은 거기에 담겨진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설명드리기보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과제는 그렇게 훌륭한 책을 쓰고 그 주제가 삶에 있어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동일해야 철학적인 주제를 쓴 사람이 우리가 보기엔 정당하지 않은 정부의 관료로서 대학 정책을 쥐고 자기 맘대로 옳지 않은 정책을 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적에 우리가 성경을 알고 있는 것과 성경을 아는 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두 가지의 조화가 어울려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 읽는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참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성경읽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문제의식만을 던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올바로 읽고 올바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진실되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을 적에 성경을 올바로 읽고 그 말씀대로 생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을 읽기만 해도 안될 것이며 성경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살아간다고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우리 삶에서는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한가지는 규율적인 삶의 모습이며 또 한가지는 자유로운 삶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는 성경을 읽기만 하고 말씀을 내 생활 속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생활은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을 어느 때는 성경에 따라서 정당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많이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성경 그대로 행하는 것 두 가지는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해나가야 하는 모습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 올바로 읽혀지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려 할 때 올바르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두 가지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올바로 섰을 때 그 믿음 안에서 성경을 읽고 그 성경 말씀대로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을이 왔으니까 가을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끝내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우리 귀에 들리는 가요 중에 좋은 곡이 하나 있습니다. 최양숙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가을편지’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하면서 굉장히 로맨틱하고 들을 때마다 우리에게 가을의 아름다움을 주는 곡입니다. 저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을이 다가왔다는 느낌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았습니다. ‘가을편지’라는 노래의 가사가 그냥 우리가 아는 가요를 만드는 작가가 쓴 글이 아니더라구요. ‘가을편지’는 원래 시였다고 합니다. 그 시인은 우리가 의식화되고 우리사회의 대표적인 시인, 고은 선생님의 시였다고 합니다. 그 시에 아름다운 선율의 곡을 합쳐서 아주 우리에게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가을편지’라는 시 하나를 놓고서 외우려면 외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을편지’라는 싯구에 우리가 듣기 좋은 음률을 맞춰서 할 때, 우리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좋은 싯구에 좋은 음악이 있듯이 좋은 성경말씀에 좋은 행동, 이 두 가지를 합칠 때 그것은 성경의 말씀을 옳게 읽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우리 생활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성경만 읽고 끝내고 생활은 내 생활대로 따로 하는 생활이 되었을 적에 그것은 결코 성경을 올바르게 읽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셨던 질문, “율법이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어떻게 읽느냐?” “어떻게 올바르게 읽고 있느냐?”하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실 때에 무엇이라 대답하고 행동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찾아보는 주일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은 종 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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