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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능력적 사랑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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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서 어머니가 되기 좋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그래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비영리 구호단체가 여러 조건으로 조사를 해서 1위에서부터 20위까지 발표한 것이 신문에 나왔습니다. 거기 보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나라들이 1, 2, 3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16번째로 상위권에 들어가는 나라로 나왔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좋은 것인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출산율이 너무나도 저조하기 때문에 아기 낳는 여자를 크게 우대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의 한 나라에 적어도 우리 한국에서 보낸 입양아들이 평균 5,000명 정도는 가 있습니다. 아기들을 하도 안 낳으니까 입양이라도 해야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렇게 많이 입양을 하여 기르는데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많이 입양을 하여 갔는지 영광인지 수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린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병원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는 것의 택시비용, 어린아이 기저귀까지 국가가 다 대줍니다. 경비를 다 지출해 줍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에서는 아기 많이 낳는 여성은 굉장히 우대를 받기 때문에 어머니 되기 좋은 나라로 1, 2, 3위라고 발표했습니다. 어머니 되기 좋은 나라가 아니고 아내가 되기 좋은 나라로 조사를 한다면 제 느낌으로는 한국이 상위권에 든다고 생각이 됩니다. 선진국들은 여성을 우대 문화가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나라보다 앞서갑니다. 그러나 아내가 되는 문제는 한국 문화가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그래도 우리 한국의 남자들은 대다수가 생활의 경제 책임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집안 살림과 아이들 양육만 잘해주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선진국일수록 생활에 대한 경제 책임을 부부가 공동책임으로 지고 살기 때문에 여성 인격을 대우하는 문화가 되었지만 여자들이 힘이 들어 합니다. 옛날에 못살던 시대에는 우리 한국 여성들이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서 아내가 되기 좋은 나라 중에 한국은 이제 상위권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그렇게 많은 나라를 다녀봤는데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이 됩니다. 요즘에는 오히려 한국의 여인들이 얼마나 자기 주장이 강해졌는지 남자들이 쩔쩔매는 그런 문화의 분위기입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어떻게 이런 말을 많아 들었는지 정리가 잘 안됩니다. 이사갈 때 남자를 버리고 갈까봐 먼저 차를 집어탄다는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젊었을 때는 그토록 질투하면서 남편을 챙기더니 이제는 아무나 데리고 가려면 데리고 가라고 내놓기도 하고, 제일 인기 만점인 사람이 돈 많이 벌어놓고 일찍 죽는 남자라고 합니다. 이 정도 분위기로 보면 세계에서 아내 되기는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는데 그 속에 어떤 비밀과 행복이 있도록 지으셨는가에 절대 창조의 가치가 있습니다. 남자들의 생각과 여자들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다름에 대한 조화를 잘 해야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정도입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온 사람과 서로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제1차적으로 나아가는 현상을 보면 남자들은 평생을 통해서 가장 큰 희망이 뭐냐 하면 성취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정복을 희망합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정복하라고 했는데 남자들의 성취 의욕이 얼마나 강한지 성취에 방해가 되는 다른 조건들은 다 버릴 수가 있습니다. 사랑도 버립니다. 왜? 성취에 방해가 될 때는 그렇습니다. 이것이 남자들이 갖는 생각입니다. 성취가 제일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전쟁도 많이 하고 성취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세상 끝까지 달려가는 게 바로 남자들이란 말입니다. 등산가는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 얼음산 맨 꼭대기 얼음벽을 기어오르는데 그게 뭐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올라가 봤자 도로 내려올 산을 올라가는 것은 바로 성취감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여자들의 제일 희망의 조건은 애정,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사랑을 위해서는 성취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게 좀 다르단 말입니다. 남자들은 성취 이야기라든가 세상을 정복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눈에서 서광이 비췹니다. 그런 이야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또,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나도 거기 좀 가입할 수 없을까?” 혁명도 일으키고 전쟁에 나가고 이런 일에 마음을 쓴단 말입니다. 남자들은 모이면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여자들은 모여 앉아 사랑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반짝 합니다. 거기에 마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제일 부자는 록펠러 가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계에서 돈이 제일 많았고 뉴욕의 시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다 준비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찬물을 끼얹어 버렸습니다. “우리 이혼해요!!” 아니, 세계에서 제일 큰 부자인 남편이고 뉴욕의 시장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될 겁니다.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돈 관리하고 정치만 하면 행복하냐? 날마다 돈 관리하러 돌아다녀 정치한다고 돌아다녀 바쁘다고 하고 나는 언제 사랑해 줄 거냐? 나는 이런 생활 싫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혼을 재기했습니다.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란 말입니다. 다 똑같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 이민 간 한국 가정의 문제를 제가 많이 상담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맞벌이가 제일 큰 문제의 요인이 됩니다. 외국에서 하루 8시간의 노동 시간 정한 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어서입니다. 이럭저럭 시간 때우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선진국의 그 8시간은 얼마나 그 시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지, 만약 5분 늦게 오면 그 5분의 월급을 깎아버립니다. 5분 일찍 가도 그 일찍 간 것만큼 깎아버립니다. 타임카드를 딱 찍어놓고 완전히 그 일한 시간만 계산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힘이 들어서 못합니다. 영어도 말도 잘 안 통하는 사회에 나가서 온갖 스트레스 다 받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런데 또 저녁에 가정의 식사를 여자가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치우고 하는 것이 매일같이 반복되니까 우선 건강 유지가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 남자들은 조금 권위주의가 있지 않습니까? 여자가 좀 집안일을 잘 안하면 책망하고 여자가 뭐라고 얘기하면 “저 사람이 한국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는 달라졌다! 마음이 변했느냐?” 이런 말이 나오고 그러면서 다툼이 많아지고 평화가 깨어지고 급기야는 “그러면 우리 따로 살자!” 그래서 이혼율이 아주 높아집니다.

어쩔 수 없이 두 가지의 자녀 문제에 큰 진통을 겪게 됩니다. 하나는 대학 진학 문제입니다. 한국 부모들에게 자녀의 장래는 정해져 있습니다. 의사, 변호사, 교수, 사업가 이런 순서로 나갑니다. 소방대원, 농부, 요리사 등을 직업으로 하는 것은 보통 싫어합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한국 부모들이 정하는 그런 직업들은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습니다. 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오셔서 상담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민 와서 고생하면서 아들과 딸을 열심히 길렀는데 자녀들이 직업 선택을 잘못하고 있어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목사님이 좀 도와주세요. 우리 아들이 지금 소방대원이 된다고 하니 그 위험한 일을 어떻게 시키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은 “제가 딸이 하나 있는데 미국 해병대에 가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말리죠?” 그러셔서 “정 하겠다면 그대로 두십시오.” 그랬더니 나한테 화를 벌컥 내면서 “목사님은 목사님 딸이 해병대에 나가겠다면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목사님 아들이 소방대원이 된다고 하면 말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요, 우리 아들이 목사가 된다고 한다면 말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것은 자기가 좋다면 그냥 두겠습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대학 진학 문제에 관해 부모들이 얼마나 자녀들과 싸워야 되는지 그게 아주 큰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는 결혼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부모들의 결혼관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서 사위를 얻을 때 이력서가 좋아야 됩니다. 가문이 좋아야 됩니다. 연령 차이는 여자보다 조금 많은 것을 선호합니다. 돈은 많을수록 좋아합니다. 이민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국제결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아이들 문화는 부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가정은 6남매가 있었는데, 6남매가 모두가 다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집 행사가 있어 가보면 국제회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모르게 연령 차이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도 그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제가 결혼 주례했던 사람 가운데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부부를 기억합니다. 남자 27살, 여자 52살입니다. 남자는 총각 초혼이요, 여자는 세 번째 결혼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와서 주례해 달라고 졸라대니 말입니다. 제가 주례 해주었습니다. 그게 문화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교포 가정에서는 아이들과 문제 때문에 얼마나 다투는지 모릅니다. 장래 문제, 결혼 문제에 부모가 세밀하게 참견하는 것을 아이들이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가정 평화에 위기가 옵니다. 제가 잘 아는 가정에는 아들이 결혼 문제 때문에 자살을 했습니다. 왜? 부모가 얼마나 반대를 했느냐 하면 “만약 네가 그 아가씨와 결혼을 하면 엄마, 아빠는 자살해서 죽겠다.” 항상 이렇게 말했니까 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말 뒤에 숨어있는 참 의미를 모릅니다. ‘아! 우리 엄마, 아빠가 정말 죽을지 모른다. 그러면 내가 죽는 게 낫겠다.’ 그리고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도 그런 분위기로 점차 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어머니 모습으로 한국 어머니가 세계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어머니가 헌신하는 아름다운 여인상을 가진 한국 여인이 인정받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제일 가까운 이웃이 어머니가 됩니다. 언제 불러도 영원히 평안한 이름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언어는 세계가 공통으로 어머니, 엄마, Mommy입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나의 어떤 괴로움도 감싸주는 존재이며 나의 어떤 실수도 용서해주는 존재이며 나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어머니이다.” 우리는 그렇게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로교를 창설한 칼빈 선생의 교회론에 보면 “교회가 어떤 곳인가? 교회는 어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사랑해 주고 싶고 누구나 잘되기를 바라고 누구의 실수도 용서하며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구에게나 나를 내어주는 곳이며 영혼의 양식을 몸에 체온을 담아 젖을 먹여주며 양육하는 곳이다. 교회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주님의 그림자요, 하늘나라 모형이요 안식처다.” 그래서 교회가 어머니 주일, 혹은 어버이 주일을 정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훌륭하게 조명된 존재!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근래에 와서 선진국에서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여자 목사가 저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번 했는데 “기도합시다.” 그러더니 “하나님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교우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면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약간은 개혁적인 정신으로 그런 말을 씁니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 됩니다. 이유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사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부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그 많은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의 설교가 가장 유명해진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조명해서 썼기 때문입니다. 십계 영화에서 모세 역할을 주연으로 담당한 배우가 영화 촬영이 끝난 후에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을 때 정말 모세가 된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주연 배우를 하고 나서 자기 신앙이 굉장히 발전됐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예수님을 배경으로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예수님 역할의 배우들은 한결같이 그 역할을 맡으면서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기도하면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끝난 다음에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인 십자가에서 죽을 때는 자신이 예수가 된 듯한 느낌에 들었다고 이것을 통해 나는 주님에 대한 이해가 커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 제일 거룩한 것이 생명의 출생인데, 이 생명의 출생은 하나님이 혼자 “나와라! 들어가라!”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을 시켜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시켜서 출생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 출산 창조에 가장 크게 쓰임을 받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조명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일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일이 때로는 고난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큰 축복입니다. 아버지가 되는 기쁨, 어머니가 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 어머니는 교육적 효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교육시켜서 훌륭하게 만드는데 가장 좋은 시기가 언제인가?”라고 하는 연구의 가장 많은 대답이 “태아에서 6세까지”입니다. 어른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벌써 고정관념이 굳어져 있어 그것을 변화시키는 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해도 잘 안 된다고 합니다. 태아에서 6세까지 누구와 시간을 보냅니까? 엄마입니다. 이때 엄마는 교육학 전공해서 아이를 기른다거나 책보면서 키우지 않아도 됩니다. 영양가 따져가며 밥을 먹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젖만 내주면 됩니다. 사랑의 부족만 느끼지 않도록 하면 그 아이의 기초 교육은 끝났습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사랑이 풍성한 분위기 가정에서 엄마의 젖을 먹으며 다른 사람이 아닌, 엄마의 손길을 통해서 7살까지 키워졌다면 그 아이는 기초교육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아이들 문제가 왜 이렇게 심각한 위험 수준입니까? 특별한 교육 수준으로 그렇게 좋은 시설이 있는 선진국에서 왜 더 문제가 큰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선진국은 우선 모유를 안 먹입니다. 엄마의 사랑의 진액을 먹고 자라야 사랑을 느끼는데 모유를 안 먹여놓으니까 벌써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사회생활을 아이들 키우는 것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엄마들이 아기는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사회 활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선진국에서는 아기를 보는 일을 다른 인종들이 와서 봐줍니다. 그러면 인종이 다른 사람이 와서 그 아이를 기를 때 애정을 가지고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수면제를 숟가락에 타서 먹여 잠재우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이고 말 안 들으면 그냥 막 때리면서 분풀이하고 그러면 가장 진한 엄마의 진액을 받으면서 살아야 될 그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런 학대 비슷한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삐뚤어진 마음에다 그 이후에 교육 시설을 아무리 좋게 해주고 아무리 훌륭한 교육자가 와서 가르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세상에 문제가 많아지는 겁니다. 이제는 학교도 교육 내용이 변했습니다. 지금의 도덕, 윤리, 음악 과목 시간은 선진국에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서교육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그런 것 해봤자 뭐하냐? 생산 교육만 시킵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군들이 독일에 들어가서 고아원을 많이 세웠습니다. 왜? 아빠들이 전쟁하느라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평소 자기 집의 시설보다 더 좋은 시설에서 더 좋은 음식을 먹고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미군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기 때문에 먹을 것을 최고로 좋은 것만 보내줍니다. 소를 잡으면 제일 좋은 부위는 모두 군대의 식량으로 나갑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도 옛날 청와대에서 먹는 음식은 미8군의 것을 갖다가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의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었습니다. 이유가 뭐냐? 이렇게 잘해주는데 왜 병들어 죽어 가느냐? 사랑의 결핍증입니다. 다른 나라 병사들이 와서 잘해주는 고기나 먹이는 게 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결핍 때문에 최고의 좋은 시설에서도 죽어간단 말입니다. 어머니는 좀 무식해도 괜찮습니다. 교육학 전공해서 자기 자녀 기르는 엄마가 몇 됩니까? 진한 사랑만 주면됩니다. 떡 장수를 해 한석봉을 길렀다는 문필가의 역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이율곡, 정몽주, 김유신 같은 위인들은 다 엄마들이 길렀습니다. 미국에도 조지 워싱턴, 아브라함 링컨도 유명한 사람의 배경이 다 기도하는 어머니입니다. 성경에도 요게벳이 모세를 길렀고, 유니게가 디모데를 길렀고 이스라엘의 최고 영적 지도가 된 사무엘은 한나가 낳아 기도하며 길렀잖아요?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맡기셨습니다. 보편적으로 여인들은 20대라는 10년 기간에 결혼하게 되고 그때 하나 둘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일평생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게 되는데, 아내나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는 일이 무엇일까? 보편적 통계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인의 행복이 뭐냐? 작은 것이라고 합니다. 세심한 관심을 제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번다든지, 어렵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 귀가 제일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언어를 줄 때 여인은 제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선진국 사람들은 그렇게 “I love you.”라는 말을 함으로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아름다움이 인정받을 때, 그 다음에 헌신적 삶의 존중을 좋아하는 게 이것이 여인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여인은 행복하게 산다고 통계학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서 여기 여인 하나가 나타나는데 엄마로 나타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유대 나라 맨 북쪽에 있는 갈릴리와 국경을 같이 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 지방 사람입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이 지방 사람들을 개로 취급을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유대 역사 가운데 유대 백성의 정신사를 가장 흐리게 만들었던 왕비가 하나 있었습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이세벨입니다. 이 지방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지방이라면 완전히 저주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그는 유대 왕비로 와서 유대 사람들이 믿는 유일신인 야훼 종교를 다 말살해 버리고 자기 나라의 바알 종교를 심는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영원한 유대인들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은 헬라 혈통을 가지고 있는 족속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를 데리고 여기에 왔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불평이 났습니다. “뭐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여기는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옛날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다 개로 취급했습니다. 뭐 하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제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향해 불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 하나가 엄마가 된 자로서 예수님께 지금 요청을 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자들이 예수께 요청합니다. “저 여자를 빨리 보내소서.” 지금 문제는 이 여인의 요청보다는 제자들의 원망이 예수님께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그래? 그러면 내가 저 여자에게 묻겠다. 여인이여! 나는 이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내가 하려는 전도의 대상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너는 아니다.”라고 예수님이 말을 했지만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줄기차게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또 제자들 앞에서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두 번째로 저 여자에게 너희들의 생각을 전하겠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제자들은 이때 속이 시원했습니다. “두로와 시돈 가나안 사람들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개로 취급했으니까 예수님 잘하셨습니다.”하지만 이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나이다. 주소서.” 그때 예수님이 “봐라! 여자야! 너의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응답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 여인은 왜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존심 상하게 끝까지 예수님께 그런 요청을 하였는가?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딸의 문제이기 때문에 엄마로서 요청한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헌신은 “내가 어떤 시궁창 같은 자리에 떨어진다 하여도 내 딸에게 돌아갈 수 있는 위로가 있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입니다.

제가 많은 장례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3살인 어린 남자아이가 죽었습니다. 제가 장례 집례를 하는데 그 엄마는 아들이 주님 곁으로 갔으니까 참고 침착하게 잘 견디고 예배에 조용히 드렸습니다. 외할머니는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우시는데 나는 집례를 해야 되겠기에 “집사님! 엄마는 저렇게 잘 견디고 있잖아요? 할머니가 너무 정신없이 이러시면 저 엄마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엄마를 생각해서 할머니가 좀 잘 참으세요.” 저한테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나는 하늘나라로 간 그 어린아이를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그 아이의 엄마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없는 겁니다.” 자기 딸 아닙니까? “이제 내 딸이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 그 하늘나라에 간 아이의 문제도 아니요, 내 문제도 아니에요. 내 딸의 문제예요. 그래서 내가 견디지 못하는 거예요.” 오늘은 각자 부모님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적 진리의 바탕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 자신이 아버지, 어머니가 된 것에 대해 감사를 하는 날입니다. 왜 어머니, 아버지가 이렇게 귀중한 것인가? 하나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보다도 더 큰 거룩성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서 조명된 사랑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돌아가고 싶은 곳이 세 곳이 있습니다. 고향, 어머니,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교회 오신 모든 어머니,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사랑의 어머니, 아버지를 주심으로 나의 존재가 성립되었고 우리가 또한 아버지, 어머니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관계된 영적 교훈을 우리가 잘 깨달아서 그렇게 훌륭하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조명하면서 살아가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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