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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벨과 다락방 (창 11:1~9, 행 2:5~12, 눅 2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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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일 동안 하나님의 은혜 속에 지내셨는지요. 언론에서는 기쁜 소식 한 가지와 마음 아픈 소식 한 가지가 보도되었습니다. 기쁜 소식은 어릴 때부터 자폐증으로 고생하던 젊은이가 수영에서 금메달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과 의지 또한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자폐증은 의학적으로 일종의 정신 질환입니다. 그런데 의학보다도, 심리학보다도, 어느 상담보다도 수영과 사랑이 훨씬 유용한 치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치유를 받고 떳떳하게 세상에 나설 수 있는 인간승리의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반면 정말 가슴이 아팠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농사를 지을 때 아무리 어려워도 최소한 호미라도 가지고서 밭을 일궜습니다. 저도 옛날에 호미를 들고서 밭을 일구고, 감자를 캐고, 삽질을 해서 땅을 갈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살기 좋아져서 불도저로 땅을 일구고 농사도 짓습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의 이 문명 시대에 불도저는 고사하고 호미도 없이, 조개껍질만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우리 동포들입니다. 이들은 옛날 소련 연방 때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살다가 소련 연방제가 붕괴를 하면서 쫓겨났습니다. 그리하여 6000km를 정처 없이 떠돌면서 바다로, 바다로 걸어오다가 러시아 연해주에 둥지를 트게 되었습니다. 그 숫자가 2만에서 3만 명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문명, 디지털 문명이 널리 퍼진 가운데 조개껍질로 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 조선인들. 상상이 되십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오늘 창세기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 이야기는 아마 최소 3천 년에서 4천 년 전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기록에 보면, 당시에 벌써 인간의 문명이 엄청나게 발전을 해서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벽돌을 모아서 역청으로 이어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우선 그 당시에 흙을 굽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벽돌 사이를 역청으로 이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청은 헬라어 원어로 아스팔토스, 즉 지금 아스팔트의 원형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이라크인 바벨론 지역에서 기름처럼 솟아올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건축할 때 많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쌓은 탑의 높이가 얼마나 높았던지, 당시 사람들은 하늘 끝까지 닿을 만큼 탑을 쌓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또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벽돌 하나하나마다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고, 이것이 하늘 끝까지 닿게 하여 우리 모두의 이름을 하나님과 온 세상에 알리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그 안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인간들의 욕망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 언어를 통해서 욕망을 한 곳에 모으려 했던 사람들의 언어를 분쇄하기로 하셨습니다. 한 가지 언어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서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바벨’이란 무슨 특별한 탑의 이름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말 중에는 ‘발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발랄’은 뒤섞는다는 뜻도 되고 혼란시킨다는 뜻도 있으며 흩어진다는 뜻도 있습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이 ‘발랄’이라는 말이 발벨이라고 바뀌어졌다가, 나중에 ‘발’자의 받침 ㄹ이 없어지고 바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일을 할 때에는 여지없이 분노로 다스리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만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만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래서 바벨은 21세기의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들보다도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은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이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이 만들었다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또 페르시아 왕이 와서 다시 제 2의 성전을 건설하도록 하여 예수님의 시대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이 멸망하리라 예언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시긴 했으나,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가져다 준 전시물일 뿐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법궤는 있으나 하나님이 없다. 고로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서기 70년에 완전히 무너집니다.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66년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온 총독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있던 헌금 중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해갔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계략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하여 분노한 유대인들은 데모를 일으키고, 이것을 계기로 네로 황제는 군대를 파송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한 후에 독립운동하고 저항운동하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게 됩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성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망가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폭정에 저항했던 4년의 기간 동안에 유대인 11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9만 70명이 로마로 압송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외부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있으면 목숨은 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성전에 모였는데, 성전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압사를 당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이 없는 성전은 성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 이후로, 유대 백성들은 한 번도 성전을 가지지 못한 채 금세기까지 지내왔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성의 탑이든, 과학 문명의 탑이든, 하나님이 없는 탑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 무너진다. 바벨탑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신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진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짓고 이곳이 성전입니다 말하지만, 그 곳에 하나님이 없으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 가슴속에 성전을 하나씩 짓고 살지만, 그 속에 진실로 하나님이 없으면 무너져 버립니다. 파멸, 멸망, 좌절, 실패. 이 모든 것은 실은 저희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성전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다시 짓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고백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성전의 건축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다락방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50일이 지난 후에 120명의 사람들이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언어를 썼으나 서로의 언어를 알아들었습니다. 바벨탑 사건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각기 쓰는 언어를 다 구슬처럼 꿰매시고 모두가 알아듣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신문을 읽다가 한국 갤럽의 여론조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1997년, 바로 7년 전의 통계였습니다. 우리나라 종교 인구를 보았더니 개신교가 20.3%로 가장 많았습니다. 불교는 그보다 2%가 적은 18.3% 였고, 천주교는 7.4% 였습니다. 나왔습니다. 그 때만 해도 이 땅에는 개신교의 인구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리고 7년이 흘러 2004년도에 다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그 많은 전도와 선교와 부흥회와 집회에도 불구하고, 단 1%만 성장했습니다. 완전히 성장이 둔화가 된 것입니다. 천주교도 6.7%로 감소했습니다. 그런데 18%였던 불교는 24%로 급성장했습니다.

불교의 성장을 시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가 발전하는 것은 오히려 격려해주면서 그 안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도 개신교에게서 찬송가를 가져가서 찬불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불교를 보면서 우리가 반성하고 배울 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불교는 성장했고 기독교는 둔화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런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물적인 욕구가 충족이 되고, 기술적으로는 편리해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갈증은 점점 급증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마음의 갈증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인간의 타락한 모습만 보고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문명으로 재단되는 것 말고 무언가 인간을 뛰어넘는 신비한 삶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갈급함에 교회를 갔더니, 엄청나게 시끄럽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찬송을 한다고 떠드는데, 그건 엔터테인먼트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빙자한 자기 충족이며 자기 만족처럼 보일 뿐입니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왜 하나님을 찾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곳에 가면 영적인 감동과 신비의 발견은 고사하고 너무 마음이 허전해서 그냥 돌아오게 됩니다. 기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에 피해줄 일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왜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까. 조용히 이야기해도 하나님은 다 들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절을 명상의 집으로 만들어서 일에 지친 외국인과 한국인에게 템플 스테이를 제공합니다. 와서 명상하고 자신을 발견하면서 지내보라고 권유합니다. 이렇게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나를 찾고 싶은 욕구가 불교로 귀의케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를 지어놓고, 기도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곳에 내가 있고 내 욕망이 있고 내 욕망을 풀고 싶은 엔터테인먼트가 있고 소리 지름은 있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얼과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는지요.

저는 경동교회에서 섬기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들어가 봉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동교회가 바벨탑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만으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서 매일매일 갱신의 영을 주시는 하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진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그런 명상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조용하고 깊고 넓은 장소를 주어서 진실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은혜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앞으로 경동교회가 이 세상의 영적 체험을 위해 할 일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세상 삶의 바탕이요 중심주로서의 우리 교회와, 하나님을 신비한 체험 속에 만나서 감동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우리 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오셨지요. 성경에 쓰여 있는 이야기를 많이 공부해 오셨지요. 신학 공부도 많이 하셨지요.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만져봅시다. 하나님의 가슴을 끌어안고 대화를 나눠봅시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역사.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감동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도 좋지만, 그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 있어야 감동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서 우리 마음이 움직이면 함께 손잡고 살 수 있습니다. 感動(감동)이란 말은 있으나 知(알 지)자를 쓰는 知動(지동)이란 말은 없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움직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 관해서 많이 아는 것만으로 집을 짓지 말고 나와 손잡음으로 인해 함께 집짓고 살자. 이것이 바로 감동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다락방의 역사입니다. 나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나의 영을 직접 그대들에게 베풀어주겠다. 언어가 다르면 어떻습니까. 문화가 다르면 어떻습니까. 인종이 다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구슬을 꿰었더니,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방언의 역사라 이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빈부의 격차, 인종의 차이와 상관없이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감동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실패하여 좌절할 때 함께 눈물 흘리시는 방법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공해서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방법으로 함께 하십니다. 어디를 가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까.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었던 십자가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곳에 가면 죄를 모두 털어놓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털어놓은 죄는 영생을 받아서 부활이라 이름하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길로 가시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감동을 경험하고 새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 곳 경동교회에서 감동의 사람들로 거듭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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