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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공동체 (행 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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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 행복하다. 공동체는 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좋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1) 공동체 구성원끼리 목표가 같고 (2)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3) 헌신적으로 봉사를 해야 한다.

  공동체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유일신 신앙보다, 삼위일체 신앙이다.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시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다(요1:1-3, 창1:1-3).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음 받았기에, 올바른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낀다.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이루어졌는데(행2:1-4), 오순절은 ‘맥추절, 칠칠절’이라고도 한다. 지난주의 맥추절은, 우리나라의 보리를 거두는 시기에 맞춰서 그렇지, 실제는 오순절이 맞다.

  유월절 어린양 희생제물을 드린 지 50일 만에, 호렙산에서 계명을 받았다. 그래서 구약의 광야교회가 탄생했다. 맥추절은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에서도 회당에서도, 밤을 새우며, 십계명과 보리를 거두는 시기의 배경이 되는, 룻기서를 읽는다.

  오순절에는 누룩을 넣어 구운 떡 2개를 드린다. 다른 절기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드려야 한다.  죄악의 상징인 누룩이 첨가됨으로, 죄악으로 더럽혀진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받으신다는 은혜를 보여준다. 성령님으로 인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이 성령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됨을 말한다(고전12:13).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은 서로 하나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방언을 하게 되었다. 서로 말이 통하는 대화의 이적이 나타났다. 여기서 교회 공동체가 탄생했다.

  하나님과 인간, 이방인과 유대인이, 장벽을 허물고 하나되어, 하나님께 나오는 장소다. 교회는 단지 주일날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는 집단이 아니다. 본문을 보면 삶의 현장인 집에서, 날마다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였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날마다 더해 갔고, 천하를 뒤집는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
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힘써야 한다는 말은,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 끝까지 인내해야 하다는 말이다.

1. 배우는데 힘써야 한다(42).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딤후3:17).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자, 믿음이 아름답게 성장했다.

  성도는 목회자의 가르침을 받을 때 성장한다. 일주일 내내 다른 생각에 잡혀 있다가, 주일에 30분 정도 말씀 듣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어리석다. 일주일에 한번 식사를 한다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가 정말 힘들다. 마찬가지다. 어찌 일주일에 한번 예배로, 성장하기 바라는가?

  가끔 사람들은, 교회출석하지 않고, 혼자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되지만, 혼자는 신앙을 지탱하기도 힘들다(행8:31).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성도간의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하셨다.
  목회자는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성도는 배우는 일에 전념할 때, 교회는 바르게 성장한다.
교회문제는 여러 가지 같지만, 문제는 한가지에서 나온다. 교인이 배우지 않고, 목회자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는 히브리어로 탈미드(דיꗬꗡꚜ)다. 계속 가르침을 받는 자라는 말이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될 수 없다. 겸손한 사람이 배운다. 교만하면 배울 수 없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다.

  먹지 않는 아이는, 자라지 않는다. 이처럼 성도가 배우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다. 키 크는 아이는, 금방 먹고 또 먹는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먹을 것이 없나 하고 냉장고를 열어본다. 이런 아이들은 성장한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오래되었는데, 왜 성장하지 못하나? 말씀에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말씀에 뿌리가 없으면, 세상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나 말씀에 뿌리를 깊이 내린 사람은, 뿌리깊은 나무처럼 요동치 않고, 세상의 흐름을 읽고, 세상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 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영적으로 성숙하면,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뤄진다. 그런데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새로운 정보인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우리 생각에 들어올 때, 깨달음을 얻고 변화된다. 생각이 변하게 된다. 생각이 변화될 때, 우리의 시각이 바뀐다.

  시각이 변하면 언어가 변한다. 언어가 변하면 행동이 변화된다.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되고, 좋은 습관은 우리의 인격이 되고, 아름다운 인격은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킨다.

  ‘빅터’라는 사람이 15살이었을 때, 그의 선생님은 그가 결코 학교를 마칠 수 없을 것이니,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를 배우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충고를 받아들여, 그 후 17년 동안 그렇게 했다. 그러나 빅터가 32살이 되었을 때, 깜짝 놀랄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IQ 평가에서 빅터가, 161의 천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그 후 빅터는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책을 쓰고 많은 특허를 냈으며, 성공적인 기업가가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가 국제 멘사(Mensa)협회 회장, 천재 협회 회장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는가? 그는 자신을 저능아라고 생각했을 때, 저능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능아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천재라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 그의 생각은 변화되었다. 천재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 순간 빅터는, 엄청난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있다. 그 정보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비록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 놀라운 변화가 나타난다.

  인생의 문제는, 우리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따라서 변화와 성숙을 위해, 말씀을 충만히 받는데 힘써야 한다.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 말씀에 대해 잘 모른다. 말씀의 뜻도, 의미도 잘 모른다. 맛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받아먹으면, 그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기에, 우리를 변화시킨다. 말씀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건실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아무리 신앙 생활을 오래 해도, 그 안에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적은 사람은 능력이 없다. 쉽게 흔들린다. 그 이유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
  말씀을 배울 때, 자세가 중요하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갈망할 때 채워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려는 열정이 있나요?

2. 교제하는데 힘써야 한다(42).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교제는 지치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교제는 단순히 만났다가, 헤어짐을 말하지 않는다. 서로 부딪쳐서 불꽃이 튀는 만남을 말한다.

  이 충격적인 접촉을 통해 깨어지고, 그 안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나와, 힘과 용기를 얻게된다.
그리면 우리가 교회에 모일 때마다, 누구와 교제해야 하나?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과 교제해야 한다. 수직적인 교제와 수평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이 2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둘 중에 하나가 빠지면, 십자가를 이룰 수 없다. 이처럼 우리의 교제는, 이 2가지 차원의 교제가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교제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

(1)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제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귐이 회복되기까지는, 진정한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 쉴 때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왜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나요? 우리의 죄 때문이다. 이 죄악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내기 때문이다.

  사59:1-2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했다.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해야 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1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하였다.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께 나의 죄를 자백하는 순간, 바로 빛 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내가 다시 교제를 나눌 수 있다(요일1:7, 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마음껏 사귈 수 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날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뗐다(42). 개신교는 일년에 몇 번, 특별한 절기에 성찬을 갖는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모이는 자체가 성찬식이었다. 성찬을 위해 자주 모였다. 성찬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일이다.

  떡을 떼며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몸을 찢으시고 죽으심을 기념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기억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보혈을 잊지 않으려고 날마다 모여서 떡을 떼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날마다 의지하고 사시나요?

  또한 날마다 모여 기도했다. 현대인은 일반적으로 무릎보다, 머리를 많이 쓴다. 하나님보다 자기 실력과 배경을 더 믿기에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힘써야 한다. 구원받은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힘쓰고 있나요?
  하나님과 교제하면 능력이 나타난다. 43절을 보라.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길에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자를 고치는 역사가 있었다. 이 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복음은 힘있게 확산됐다.

  복음을 전하다가, 베드로는 옥에 갇혔다. 그때 성도는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니,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나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기도로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특권을 누리시기 바란다.

(2) 다른 성도들과 수평적 교제
당시의 교인들은 사회에서 냉대를 받았기에, 대개 정말 가난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눌 만큼,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였다.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는 성도의 교제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도록 가르쳤다. 그렇다면 왜 성도의 교제가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나?

  성도들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하였다(롬12:5, 고전12:12-27).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이니, 성도들끼리 서로 나눌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온전한 믿음을 가졌고, 능력이 있다 해도, 그 지체 하나만을 가지고는,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없다. 팔은 역시 팔이다. 다리는 아무리 힘이 있고, 재주가 있어도 다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지체들은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몸의 이 고통을 받으면, 온 몸이 고통을 받는다.

  몸의 한 부분이 영광을 받으면 온 몸이 영광을 받는다.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 마라톤 우승자에게 금메달을 걸어주고, 월계관을 씌워 쥐었다. 정작 고생한 다리에게는 아무 상을 주지 않았다. 모두 몸의 한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교회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이(롬 12:15) 지체된 사람의 생활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족이요, 형제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고 하였다(롬12:8).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형제가 된 사람, 피를 나눈 가족이니 남의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성도의 교제는, 마음과 마음이 하나되는 일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라고 했다.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 나갈 수 있다.

  마음이 하나되면 아무리 외로워도, 아무리 큰 고난이 있어도 이겨 나갈 수 있다.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상부상조하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하였다.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이사하는 날, 온 성도들이 함께 거들어주고, 가정 대사가 있으면 서로 도와주며, 병환으로 고생을 하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찾아뵙는 일이 가족의 삶이요, 우애 있는 형제의 모습이다. 그리고 서로의 사업을 위해 기도해줄 뿐 아니라, 서로 이용해 주어야 한다.

  교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떡을 떼는”일이다. 여기서 성찬이냐, 애찬이냐, 그냥 평범한 식사냐 하는 논란이 있다. 저는 42절의 떡을 떼는 일은 성찬이며, 46절에서 떡을 떼는 일은 애찬과 평범한 식사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도 예배 후에 공동식사를,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하고 있다. 이렇게 함께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나눌 때, 한 형제 의식을 가질 수 있고, 서로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마호메트 시대의 유명한 아랍인 장군인 지이드 알 카일은 낙타를 도둑질한 부랑자를 칼로 키기를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도둑질하기 전에, 몰래 자신의 아버지의 우유를 마셨기 때문이다. 함께 음식을 먹을 때, 환대로 이어지고, 즉시 맹세에 의해서 영원한 연합이 된다.

  따라서 교회에서 식사를 할 때도, 가까운 사람과만 앉을 것이 아니라, 새로 나온 교우나, 아직도 잘 사귀지 못한 분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해 얻은 힘을 가지고,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하는 공동체가 되어서, 우리 주변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는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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