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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로 제사를 (시 5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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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감격이 있다. 눈물이 있다. 기쁨의 노래가 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감사는 구원받은 사람의 열매다. 만약 감사를 모른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며,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다. 이처럼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반드시 감사가 따른다. 미신이나 다른 종교에는 은혜가 없기에, 간절한 기원은 있지만, 감사는 없다. 노래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은혜가 있기에, 감사가 있고 노래가 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마지못해 다니는 사람이 있다. 안 다니면 하나님께 얻어 맞을까봐,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취미로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종교인에 불과하다.
눅7:36-46절을 보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과 한 여인이 등장한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는, 자기가 하나님을 잘 섬겨, 이 정도 산다고 과시하면서, 예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 동네에 사는 여인이 들어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감사를 드렸다. 얼마나 감사했던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다 적실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눈물에 젖은 예수님의 발을 다 씻어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을 예수님의 발에다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향유를 예수님께 다 부어드렸다(눅7:38). 이 모습을 통해서, 의식에 불과한 신앙과, 살아있는 신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감사의 조건을 따지면, 시몬은 복을 많이 받아, 복에 취해서 살 정도가 되었으니, 시몬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데도 그의 감사는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창녀로 (죄인) 용서를 받았기에, 감사가 넘쳤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감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감사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그 신앙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다.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이유는, 당시의 국교 성공회는, 의식적이고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공회는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상실한 채, 그들의 신앙은 죽어있었다.

  오히려 종교적인 교권을 내세워, 참 신앙을 간절히 찾는 청교도를, 오히려 이단으로 몰아 박해를 했다. 견디다 못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과 가족까지 버리고, 조국을 떠났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낯선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102명은, 63일만에 신대륙에 착륙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식층이었기에, 농사도 잘 몰랐고, 집을 지을 줄도 몰랐다. 이국 땅에서 첫 겨울, 추위와 굶주림으로 47명이 죽었다. 봄이 되자 우호적인 인근의 인디언들에게, 농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제공한 밀, 보리, 옥수수 씨앗을 심었고, 가을이 되자 상상 밖의 큰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교회와 가정에서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축제를 베풀었다. 따라서 신앙이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는, 감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종교인들은 기쁜 마음으로,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없다.

1. 감사의 종류와 수준

(1) 현재 받았기에 드리는 감사
  지금 무엇인가 받았으니까 하는 감사다. 감사는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다(눅17:15-19).
어떤 사람은 많이 받았으면서도, 감사를 못하는 사람이 있다. 또 많이 받았는데도,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또 다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짐승은 감사할 수 없다. 말세가 되면, 감사가 사라지기에 감사만 해도,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감사헌금을 보면, 사업에 성공했기에 감사하고, 건강하기에…, 다치지 않아서…, 건강을 되찾아서…, 학교와 들어가서…, 취직해서…, 좋은 집을 사서…, 아이가 생겨서 감사한다.

  이런 감사를 “어린 아이 감사”라 한다. 어린 아이는 무엇인가 받아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받았기에 드리는 감사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 순간뿐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감사도 지나간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를 드리는 경우는, 진정한 감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2) 지난날을 기억하며 드리는 감사
은혜는 항상 받을 수 없다. 홍해는 항상 갈라지지 않는다. 반석에서 생수가 항상 쏟아지지 않는다. 만나가 하늘에서 계속 내리지 않는다. 요단강이 항상 갈라지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에 주는 은혜다.

  홍해는 두 번 건널 수 없다. 한번 있었던 그 은혜를 붙잡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홍해를 건넜을 때의 감격을 잊지 말라고 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축복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신8장). 이 은혜를 놓치게 되면, 죽음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늘 기억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도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자. 주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음을 아는가? 가정에는 평화가 있었는가?

  주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렇게 건강할 수 있는가? 기쁨 가운데 살 수 있는가?
교만하지 말자. 주님의 은혜를 안다면,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 안다. 부끄러움뿐이다.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자.

(3) 앞으로 주실 줄 믿고 드리는 감사
사람들은 지나간 것들은, 곧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지나가면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은 일이라도, 되어질 일들을 기대하면 행복하다.

  그러므로 희망이 있을 때, 감사가 있고, 행복하다. 지금은 비록 현실이 암담하지만, 장래에 좋은 것을 주신다는 약속을 기대하면서, 감사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귀에 들리지 않고, 내 손에 잡히는 것이 없지만, 앞으로 반드시 생긴다는 생각하면 즐겁고 기쁘다.

  내일을 향한 기대와 약속이 있으면, 찬송이 있고 감사가 있다. 결혼도 하기 전까지는, 기대가 있어서 행복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의견이 잘 맞지 않고, 사소한 문제로 현실적인 문제로, 다투고 싸운다. 그러나 자녀들을 바라볼 때, 소망이 있기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아무 것이 없어도, 감사할 수 있다. 절망 중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는,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다 성공할 사람이다. 이 사실을 믿고 감사하자.

(4) 실패했음에도 드리는 감사
미국 남북전쟁 때, 어느 무명의 한 병사가 이런 드렸다.
  주님, 저는 출세를 위해 힘을 구했으나, 당신은 순종을 배우도록 저에게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저는 위대한 일을 하고자 건강을 구했으나, 당신은 그보다 더 선한 일을 하도록, 제게 병을 주셨습니다. 저는 행복을 위해 부귀를 구했으나, 당신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저에게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자가 되려고 명예를 구했으나, 당신은 저를 비참하게 하시어 당신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저는 삶의 즐거움을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구했으나,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삶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주님, 비록 제가 당신께 기도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당신이 저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주시었으니, 참으로 감사 드립니다.

  또한 이런 기도도 있다. “어느 환자의 고백”이라는 기도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제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로 인해 인간 된 보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데 힘겹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눈물로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나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모든 일로 감사할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멋있고 수준이 있는 감사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멋있는 성도가 되자.

2. 감사하려면

(1) 하나님을 잊지 않아 감사할 수 있다(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무섭게 말씀하셨다.

  시편 50편은, 아삽의 시라고 되어 있다.
아삽은 찬양대 대장인데, 도저히 찬양대 대장을 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고라 후손이었다(대상26:1). 고라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기를 들어,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이 갈려져, 고라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런 반란군 후손이지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찬양대의 일을 하게 하시며, 찬양대장의 일을 수행하게 하셨기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잊으면 사람도 아니다. 잊었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유태인 신학자 몽테 피오르는 “생각하고 감사하라”고(Think and Thank)했다.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체가 이적이다. 깊이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다. 경제학자 존 카우츠키(J. Kautsky)는, 「신생 국가의 경제 성장」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그 책에서 “사람은 항상 불만으로 가득 찬 채, 살아가게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사람은 아무리 잘살게 되어도, 여전히 불만을 해소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엄청나게 잘살고 있는데도, 현재 나의 생활보다 더 잘사는 타인이 있고, 또 그와 비교하기에 나는 언제나 부족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카우츠키는 “상대적 빈곤”이라고 했다. 상대적 빈곤 때문에, 평생 만족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특별히 결혼하는 자녀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상대적 빈곤 때문에, 부모님의 뼈와 골수까지, 다 빼가려는 경향이 있다. 은혜를 잊어버려 모르기 때문이다. 이만큼 키워주었으면 더 주시려고 해도, 되었다고 해야 하는데, 더 주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몽테 피오르는 “생각하고 감사하라” 했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보면, 반드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내게 생명을 주시고, 키워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과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자. 받은 은혜를 잊지 말자.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동임을 깨달아야 감사할 수 있다(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하였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동임을 깨달아야 감사할 수 있다.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없다. 깨달은 사람만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 그런데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에 감사할 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은혜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은혜는, 깨달음의 은혜다. 그래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라고 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내 백성이 깨닫지 못하여 망하는도다”(호4:6)며 탄식했다. 감사는 깨달음에서 출발하고, 결국에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된다. 아무리 좋은 축복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한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깨달았을 때,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있으면, 고난도 감사할 수 있다. 깨닫는 은혜가 있기 바란다.

(3) 믿음이 있어야 한다(23).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였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옳은 행동이다. 이 약속을 붙들면 감사할 수 있다.

  따라서 감사는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이 지배하기에 감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성공했는데, 믿음이 없기에 ‘내일은 어떻게 될까?’하며 불안에 떨었다. 오늘은 돈이 있지만, 내일은 사업이 안 될지도 몰라. 오늘은 건강하지만, 내일은 건강하지 못할지도 몰라…,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 불안해한다면,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을 보이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감사할 수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믿는다면, 감사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믿음의 이적이 나타난다. 감사는 이적을 끌어오는 자석과도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오병이어를 일으키시기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게 됨은, 감사할 때였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풀려남은, 감사할 때였다.

  억지로라도 감사하며 살면, 자신에게 축복이 된다.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찌’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귀국하여,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리 만치 피폐해 있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짜증이 났고, 불평 불만이 쌓여 갔다. 그러다가 그는 전신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병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다행히 정신치료가 ‘후찌다’를 만나게 되었다. 후찌다는 그에게 매일 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억지로라도 만 번씩 하라고 했다. 기이찌는 자리에 누운 채로 하기 싫었지만, 낫기 위해 매일 밤 계속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계속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들이 감 2개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 감 잡수세요”라고 말했다. 그 때는 매일 계속해서 감사를 했기에, 감사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밀자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였고, 차츰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던 목도 움직여졌다.

  말로만 하던 감사가, 불치병을 낫게 했다. 하물며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과 은혜로 사는 우리들이 감사할 때, 얼마나 큰 이적이 나타날까? 감사로 제사 드리게 될 때, 어떤 어려운 문제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함을 맛보게 된다.

  결론이다. 오늘은 맥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를 주시면서,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감사는 연습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할 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는 희생이 없이는 진정으로 감사할 수 없다. 수고가 없는 성취는, 기쁨이 될 수 없다.

  왜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큰가? 일반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수고를 더 했기 때문이다.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감사가 있다. 우리 교회가 이전을 하는데, 수고와 헌신이 없는 성도는 “야! 참 좋다”라며, 감탄은 할지 몰라도, 감사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교회를 짓기 위하여, 피땀과 눈물을 바친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감탄 정도가 아니라 감격과 감사가 있다. 교회를 생각만 해도, 기쁨이 솟아나고, 눈물이 난다.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시기 바란다. 희생을 통하여 기쁨이 더욱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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