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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감사가 메아리 되면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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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마태를 불러 제자를 삼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는 세금을 걷는 세무 관리인이었습니다. 그는 평소대로 세관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마태를 불렀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무엇을 보고 다짜고짜 부르셨을까요? 마태는 마태복음의 저자입니다. 그는 12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레위로 되어 있습니다.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그의 사도명일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사도직을 감당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선택이 탁월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눈에 마태가 제자로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당시 제자가 될 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는 로마 정부의 세금 징수를 청부맡은 직원입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세금을 거뒀다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세리가 하는 일을 억압과 착취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창녀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도 오지 못하게 했고 그 가족들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재판관도 증인도 되지 못했습니다.

동족 사회에서 이런 멸시를 받다보니 세리는 자연히 율법을 지키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율법은 고사하고 탈무드나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것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결법도 무시했고 십일조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폐물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세리들은 종교 생활을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오히려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가망 없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발탁인지 모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한 술 더 뜨셨습니다. 마태의 집에 가서 음식을 잡수신 것입니다. 그것도 마태와 같은 직업을 가진 세리들이 함께 초대되었습니다. 본문 10 절을 보면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했습니다.

이것도 유대인들에게 금기사항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인들과 상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부정을 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런 파격적인 행동은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사게 되었습니다.

11 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우리는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기뻐하며 잔치를 하고 있는 세리들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트집 잡고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하나는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고백 속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감사의 의미를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불평하는 바리새인에게 세리들과 함께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건강한 자들입니다. 세리들은 누가 봐도 병든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돌보기 위해 오신 의사입니다. 지금 이 세리들과의 식탁은 멸시만 받던 이들에게 제대로 사람대접을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타락한 세리들을 멸시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만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신앙은 완벽에 가까웠지만, 내면은 미움과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식처럼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호세아 6 장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제사보다도 인애 즉 긍휼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용서받는 것이 기본입니다. 제사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사를 완벽하게 드린다고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긍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제사는 모순이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빈정거림을 향해 제사의 기본 도리부터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13 절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명분과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사회적 고정관념을 깨뜨리셨습니다. 세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대접받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큽니다. 이것은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한 차원 높은 윤리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기준에 예수님을 맞춰 넣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건건 트집과 원망과 불평입니다. 이들은 은혜를 해석할 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은혜는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세리들은 예수님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세리들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대접해 주신 것이 순전히 은혜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세리에 비하면 엄청난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온갖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 권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단지 자기들이 누리는 것을 세리들도 따라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은혜 중에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멸망에서 건져졌습니다. 저 영화로운 천국을 차지하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나 같은 자를 살리시고 또한 먹이시고 입히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문제는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리고 나면 그제야 누리던 것들이 은혜인 줄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 뒤늦게라도 은혜는 반드시 해석해야 합니다.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마태는 은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를 불러주셨습니다. 집에까지 와 주셨습니다. 함께 친구를 불러 잔치를 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한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마태는 이런 예수님을 목숨을 다해 모시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이렇게 까지 대우해 주시는 분입니다. 생명을 다해 주님을 모실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과연 마태는 주님의 참 제자로 부족함이 없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를 해석하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저버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헤아리십니까? 지난 한 해 동안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감사도 자주 해야 많이 헤아려집니다. 지난주에 한 해 동안의 감사한 일 10 가지를 헤아려 보라고 숙제를 드렸습니다. 한두 가지 꼽고 그 다음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그만큼 평소에 감사가 메말랐다는 증거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메아리입니다. 은혜에 감사로 반응하면 이 감사는 다시 은혜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로 반응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나마 받던 복과 은혜가 끊어집니다.

감사할 일이 없을 때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헤맬 때도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는 어려운 상황을 뒤집는 능력이 됩니다. 고통을 쉽게 견디는 약이 됩니다. 불행하다 생각되면 그나마 다행거리들을 찾아보십시오. 반드시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역전시키는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또 은혜 받을 줄 믿고, 응답될 줄 믿고, 미리 감사하십시오. 아직 은혜를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이 준비된 은혜를 바라보고, 주심에 대해 미리 감사를 해보십시오.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 받을 것을 몇 갑절로 받게 될 것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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