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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점점 더 큰 은혜를 주시는 주님 (행 1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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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우리에게 내일에 대한 삶의 꿈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내일에 대한 꿈과 기대가 있기 때문에 오늘의 어려움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 고통 속에 이 어려움을 참아 극복하면 훨씬 더 큰 기쁨이 있음을 생각하기에 우리는 오늘의 눈물의 골짜기를 건너가며 내일의 소망과 꿈을 바라보고 통과하는 것입니다. 오늘 과연 여한이 없다라는 기쁨을 누린다 해도 내일의 꿈이 없다면 오늘의 꿈같은 삶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내일이면 그 모든 꿈은 사라지고 내게는 웃음을 아프게 추억하는 고통밖에 없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삶의 현재 기쁨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기도해 주시고 배려해 주셔서 지난 두 주간 반 정도의 시간을 현재 삶과 분리된 상태 속에서 보내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삶에 완전한 분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삶의 다른 공간에서 비교적 여러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생각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현실의 세계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만난 사람도 없고 말해야할 사람도 없고 그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이러 저러한 생각의 흐름에 저를 맡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나 교회나 제2기 14년에 사역을 마치고 이제 무엇인가 3기 사역으로 접어든다는 것이 매일 마주 대하던 얼굴을 또 다시 마주 대한다면 실감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매듭을 느껴 보고자 잠깐이나마 단절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홀로 지내던 산을 떠나던 밤에 깜깜한 하늘을 쳐다보기 위하여 인기척 없는 밖을 서성였습니다. 그렇게 추운 지경은 아니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허연 김이 어둠 속에 뿜어져 보였습니다. 하늘의 별들이 쏟아질 만큼 가득히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 별들을 좀더 잘 보려고 목을 점점 저치다 보니 나중에는 목이 아플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여기를 떠나야하고 또 사람들을 만나야하고 삶의 일들을 만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파악해야하고 그것을 제시해야하며 또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하며 성도 각 개인의 사역이 합하여져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무거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나뭇잎 몇 개를 주워서 책갈피 사이에 넣으면서 ‘이제는 정말 사람 사는 동네로 다시 내려가는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자꾸 주지시켰습니다. 낙엽 몇 개를 주우면서 도대체 이렇게 나뭇잎 몇 개를 줍는 마음과 헤쳐 나가고 헤쳐나아가야 할 제 삶의 전투적인 삶의 장면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삶을 향해 내려오는 발걸음이 결코 무거운 발걸음은 아니었습니다. 또 골치 아픈 세상을 향해 내려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었고 날마다 더 큰 은혜를 주셨으니 이제 내려가면 어떠한 역사를 이룰까에 대한 소망과 기대도 있음을 보았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늘 전투이고 상처받고 위로받고 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의 모습이 형성되어 간다라는 사실이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대로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우리 주님을 바라봅니다. 요한복음 1장 50절을 보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모든 것을 전혀 한 번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첫 만남에서 그에게 얘기하자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해서 나를 믿느냐 너는 이제 앞으로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깜짝 놀랐지만 주님을 만남의 시간이 점점 오래 갈수록 더 큰일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점점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지금까지 삶도 그랬고 또 앞으로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늘 주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 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더 큰 은혜 날마다 더 깊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기쁨과 은혜를 주셨고 주님은 언제나 부족한 우리를 책벌만 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여 주셨으며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대와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기대하고 바라보고 소망하며 하루 하루의 삶의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생각 속에 돌아와 저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드릴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정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도성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빌립보에 도착하였고 활발한 복음 전파의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능력과 역사를 행하게 됩니다. 귀신이 들려서 점을 치던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여종으로 말미암아 점을 쳐서 돈을 벌던 사람들이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마음속에 분노를 느껴서 사도 바울을 무고하게 고발함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과 실라 일행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마음에 교차되는 여러 가지 생각을 극복합니다. 마음에 분노도 그리고 억울함도 또 왜 이렇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혀야 하나하는 당황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든 생각을 극복하고 그들은 감옥에서 오히려 기도하고 찬송하던 중에 하나님의 더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흔들이고 옥문이 열리고 그들을 매였던 착고가 벗겨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유자가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으면 이와 같은 은혜는 체험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은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진행되어 갑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와 그리고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오히려 바울과 실라 일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고 ‘내가 어찌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문의해야 합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외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은 구원을 얻으리라’ 이제 이 둘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빌립보 도성에 도착했던 사도 바울의 꿈과 계획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전개될수록 점점 더 예상치 못했던 더 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점점 더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삶에서 좀 억울할지라도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마음의 답답함과 생활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점점 더 큰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기대 이상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좀더 살펴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은 빌립보 감옥에서 사도 바울의 생각과 그리고 여러 가지 교차되는 생각들 사이에 이루어진 결정과 행동입니다.
16장 24-25절 말씀을 보게 되면 그들은 옥에 갇혔고 발에 착고가 튼튼히 채워졌고 그런 중에서도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다 들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선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선에 대한 상급을 받기 보다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당황스러운 사건을 당합니다. 귀신들려 점을 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또 바울과 실라를 따라다니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이라 하며 귀찮게 구는 너무 귀찮게 구는 이와 같은 여종을 생각해서 귀신을 그 여종에게 쫓아내었을 때 이제 그 주인들이 돈을 벌지 못함으로 인하여서 사도 바울과 실라 일행을 고발하게 됩니다.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고발하게 될 때 결국 그들은 주를 위하여 선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요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요즘도 억울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격렬히 대들고 자신과 생각만 달라도 사람들을 해치고 말려는 이 시대에 과연 억울함이 밝혀져 오히려 의인이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정말 억울한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해명할 기회도 없고 해명하지도 않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찬송함으로 당황한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상황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들은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그 감옥가운데서도 억울함 속에서도 오히려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어려움을 겪거나 당황스러운 일을 당할 때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갈 길을 지속적으로 가야합니다. 살다보면 정말 짜증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내가 이런 치졸한 일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와 같은 삶의 자조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의 먼지와 소음에 쌓여 사는 것이니 그것을 인정하고 그런가보다 하며 우리의 삶의 길을 뚜벅이 가야할 것입니다. 작은 일에 집착하여 일일이 매이다 보면 우리가 가야할 곳에 이르지 못하고 우리의 모든 힘을 소진하여 탈진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낙심할 지경으로 피곤할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곤하여 지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합니다.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해야 할 우선적인 생각은 과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나를 이 상황에 갖다 놓았다면 앞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어떻게 전개될까에 대한 마음의 기대와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세계에 대한 운행의 법칙을 안다면 우리는 그 다음에 순서를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고 그 가운데 능력이 나타났고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까? 감옥에 갇혔다면 그러면 그다음에 하나님의 역사는 어떠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복음의 역사가 활약 적으로 일어나고 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고하게 비방과 중상모략을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능력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승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그때는 반드시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고 또 주의 일을 하고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해서 열매와 결과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게 되면 로마로 사도 바울이 죄수가 되어서 호송당하는 호송선을 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배에서도 죄수의 몸으로 가장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나서 배가 난파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사공들이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전혀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안전하다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선장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실 것이다라고 그들에게 확언을 줍니다. 그들은 삶을 포기하고 먹을 것도 다 끊는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오히려 위로 격려 합니다. 시간이 지납니다. 배는 난파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멜리데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멜리데 섬에 다 이르게 되는데 한 가지 또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배가 난파되는 지경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이미 죄수의 신분에서 그 배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멜리데 섬에 도착해서 독사가 사도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토인들이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공의가 분명히 살아있어서 저런 자를 독사가 물어서 죽게 한다라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그 다음의 역사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독사를 떨어버립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아무런 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얘기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저 사람은 신이다.’ 사람의 인심은 순식간에 바뀌어집니다. 사람의 인심은 순식간에 바뀌어져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을 때 저 사람은 살인한 자라 아무리 배가 난파되는 지경에서 살았을지라도 공의가 살아있는 한은 저는 분명히 저렇게 해서 죽는 것이다라고 비난했지만 그 독사를 떨어뜨려 버리고 무사하게 살았을 때 오히려 신이라고 얘기하며 그 멜리데 섬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일순간에 변화되는 것을 봅니다.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순식간에 우리의 모든 위상이 견고해 짐을 체험하기도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상황과 상태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뜻과 계획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의 길을 가게 될 때 마침내 세상의 인심이나 평가라는 것은 순식간에 바뀌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자리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힘을 내어 우리의 삶의 길을 지속적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해도 우리는 어려울 수 있지만 긴 호흡을 가지고 우리의 일을 순차적으로 해야 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어려움이 있으면 그저 만사를 다 포기하고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낙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어려워도 변함없이 그 길을 뚜벅뚜벅 가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더 잘 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축복의 사람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사람의 말과 뜻과 행동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대로 되어집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하고 애쓴 대로 되어지는 것 같으나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점점 더 깊이 체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했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까하는 상황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그들의 길을 가는 사도 바울과 실라의 영적인 여유를 생각합니다. 여러 생각의 교차 속에서 그들은 결국 주님의 은혜로 인한 영적 평안과 승리를 획득하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획득한 이후에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일들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은 한결같이 우리의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있은 후에 즉 내적인 승리 후에 우리의 삶의 실제가 따라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그 갈 길을 향해 간다는 믿음의 역사에 대한 신뢰 나쁜 일을 했거나 혹은 잘못 일을 해서 대가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일을 잘 했고 결과도 좋았고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그 갈 길을 향해 간다는 믿음의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삶의 순간들을 이루어가고 이겨내야 합니다.

이들이 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으며 결국 하나님이 이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것으로 그들은 마음에 확신했기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었기에 그들은 감옥 속에서도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 때문에 혹은 어려움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적인 신뢰입니다.

오늘 새벽에 나오면서 아이들 방에 들렀습니다. 아이들은 이불을 차내고 자잖아요. 그래서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나왔습니다. 늘 새벽에 나올 때마다 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마다 똑같이 드는 생각이 이 아이들은 아빠가 이불 덮어준 것 절대 모를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마 자기들이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의 이불을 덮어줘 봐야 우리도 이렇게 컸구나하는 것을 그때 가야 알 것 같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그거 몰라줘도 괜찮아요. 보살펴줄 수 있는 기쁨의 기회가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것이니까요. 우리가 평생 하늘나라 가기까지 우리는 평생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해요. 아마 천국 가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치 아이들 싫증내며 밥 먹기 싫어할 때 부모가 그 밥을 먹도록 배려해주며 먹기 싫은 밥 억지로 먹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을 때 억지로 그 은혜를 받는 것처럼 누리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며 찬미하며 우리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고 그와 같은 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시편 40편 3절을 보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감옥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미하는 이와 같은 사도 바울과 실라 일행을 볼 때 감옥 속에 있는 모든 죄수들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무엇인가 마음에 깨달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의 순간에 조급해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며 기다리는 시간적인 면에 여유있는 신앙을 생각해봅니다. 왜 주님은 이들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데 옥에 갇히는 순간에 그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지 않았을까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 옥에 갇힐 때 야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옥에 갇히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를 이렇게 옥에 가두실 때 어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겠지 하는 전적인 신뢰의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영적인 조급증이 아닌 영적인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어떤 일이나 상이 필요하다면 그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더 갖추고 싶어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그 상황에 매이지 않고 주님은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을 믿는 상황의 종속되지 않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믿음’ 다시 한번,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믿음’ 지난 주 내내 생각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은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기쁘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된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납할 수 있는 마음의 자신과 용기가 생길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생기게 되고 평안은 실제적인 삶의 기쁨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약 오늘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서 마음이 억울하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분노하고 고달파했다면 오늘의 본문은 어떻게 진행됐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분노는 자신을 불태울 뿐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에 휩싸일 때 우리 주변에 모든 고통의 인자는 지진 틈사이로 흡수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두 번째를 생각합니다.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흔들리고 착고가 풀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장 26절을 보니 홀연히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을 능가합니다. 누가 사도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넣고 그들을 지진을 일으켜서 나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리라 생각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방법은 항상 우리의 생각 이상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가끔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에 원하는 것을 기도하잖아요, 한참 기도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 그러나 기도는 그렇게 했지만 제가 기도한 것 보다 하나님의 더 좋은 계획이 있다면 그렇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들도 그렇게 기도하시지요? 그렇게 기도 안 하세요? 그러면 날마다 여러분이 기도한 만큼만 이루어지도록 소원하세요?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참 기도해보면 내가 기도한 것보다 하나님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고 소원은 했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부모님한테 얘기했어요. 저 만원만 주세요. 저 쓸 때가 있는데, 그런데 부모는 십 만원 주려고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되죠? 저 만원만 주세요. 그런데 뒤에 뭐라고 얘기하세요? 근데 엄마 맘대로 하세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더 좋은 큰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늘 제한되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즐비하게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니? 빌립은 계산합니다.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가 주면 조금씩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우리들의 살아온 삶의 한계로는 그것 밖에 생각이 안되는 것입니다. 내게 뭐가 있어야 되는데, 내게 뭐가 필요한데, 이게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 질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바뀌어지고 그게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생각 이상입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기적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의 한계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내 사고의 한계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내 한계를 하나님의 한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내가 아는 만큼 밖에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의 방법은 우선 내 생각과 지혜로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내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른 이해의 방법은 내 생각과 지혜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셔야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께 대한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어떠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야가 열리며 하나님께 대한 깨달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믿음에 대한 첫 걸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대한 무지와 한계에 대한 깨달음과 겸손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대한 깨달음이 시작됩니다. 어찌 따지면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앎이지만 또한 인간에 대한 앎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를, 그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규모나 양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 한계를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와 규모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대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자신의 상태나 여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한 베풂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점점 더 큰 은혜를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 생각과 규모보다 우리의 계획보다 항상 크시고 앞서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생각의 규모가 하나님의 규모를 내 생각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을 능가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이제까지 삶의 체험과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하고 압니다. 우리의 지식과 규모와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크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계획하고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바라보는 순간 내 마음이 넓어지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넓어진 마음에 임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우리의 엉켰던 삶의 실타래는 한순간에 풀어지게 됨을 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수준을 능가하기 때문에 한순간에 풀어지게 됨을 봅니다. 덧셈 뺄셈 배우다가 나눗셈 곱셈을 배우면 수준이 달라지죠. 2+2+2+2+2=10이다. 2를 다섯 번 더해서 10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런데 "2 곱하기 5는 10이야"라는 것을 깨달으면 전혀 다른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면 어떠한 순간도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도 안 되겠어, 도무지 길이 없어, 방법이 없어.”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어떠한 것도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도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일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됩니다. 수넴 여인은 남편이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 선지사의 축복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과 더불어 아들을 얻습니다. 그 아들이 소년이 되어서 활발하게 되었을 때 죽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급히 찾아가게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그 집으로 초빙되어 옵니다. 와서 기도함으로 그 아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포기가 너무 빠른 것을 우리는 우리 삶에서 느낍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은 빨리 포기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는 결코 포기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방법만으로는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종일 방에서 앉아서 생각을 해도 생각이 안 나던 문제가 어느 날 밖에 나가서 한줄기 바람을 쐴 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않습니까? 내 생각과 방법은 탁상공론으로 그칠 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기대가 있는 백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그 백성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방법까지도 동원하십니다.

여러분 출애굽기의 역사를 아시죠? 9번이나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바로라는 사나이는 끄떡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바로만큼 든든한 사람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아무리 든든해도 하나님 앞에 버티고 설수는 없습니다. 10번째 애굽에 모든 장자를 친 재앙을 주었을 때 그들은 얘기합니다. ‘빨리 떠나라, 빨리 떠나라’ 어떻게 해서든지 네 백성을 데리고 빨리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마음이 편하셨겠습니까? 요나서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싫어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죠. 요나는 민족주의자이고 애국주의자였어요. 그런데 이 니느웨가 어디냐 하면 늘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당시의 민족적인 감정과 애국심으로 볼 때 이 앗수르를 위하여 니느웨에 가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저들을 살린다는 것은 도저히 민족적 감정상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안 되겠습니다.’ 그는 딴 길로 갑니다. 그러나 결국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가게 됩니다. 4장 마지막 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내 백성을 괴롭히는 앗수르의 수도에 있는 니느웨의 백성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애굽의 백성인들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애굽의 백성 모든 장자를 치시면서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구원해내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아끼시는 분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수십 년 일하고 나오게 됩니다. 이 라반이 꾀를 써서 한 푼도 주지 않고 내쫓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역사하셔서 야곱은 그 집에서 그의 모든 품값을 다 받아가지고 나옵니다. 거부가 되서 나옵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백성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것을 다 주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 이고 지고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이 가지고 나오는가 보세요. 광야에서 성막을 짓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아침부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와라 하니까 아침부터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어서 줄을 서서 성막을 짓는데 필요한 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은, 금, 보화, 보석 모든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이 가지고 와서 모세가 뭐라고 합니까? 이제는 그만 가지고 와라, 너희는 돌아가라고 얘기합니다. 광야에서 은금 보석 보화 모든 것이 어디서 났겠습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다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430년 동안의 모든 품값을 다 받아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결코 손해 보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놓았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애굽 백성이 다 주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생각 이상입니다. 누가 그런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겠습니까? 주님의 역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장례행렬을 봅니다. 누가 그 아들이 살아나리라고 예상했겠습니까? 이제 그만 울라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누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제 그만 울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내가 그 아들을 살려 너에게 주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살펴봅니다.
세 번째 더욱 나아가 예기치 못했던 간수와 그 가정의 구원의 역사를 봅니다. 더욱더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점점 더 큰 은혜가 진행됩니다. 사도 바울의 일행은 빌립보 성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기적이 나타나고 귀신을 쫓고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빌립보 성에서 해야 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귀신을 쫓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쫓고 기적을 행하고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모두의 방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말미암아 간수의 가정이 구원을 얻습니다. 위치가 바뀌게 됩니다. 간수가 오히려 바울과 실라의 일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고,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결국 모셔다가 말씀을 듣고, 그들이 매를 맞아서 상처받은 곳을 씻기우고 음식을 먹이고, 결국 그들은 다 구원받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기록은 되어 있지만 그 집은 빌립보 도성에서 복음을 전하는 귀한 전초의 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복음의 길을 터주십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인데 주께서 그것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어려움으로 당해 세상의 능멸을 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영원히 억울할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복음의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항상 확장적인 역사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제한되지 않습니다. 감옥을 넘어서고 강을 넘어서고 산을 넘어서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방법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답답해하고 마음에 조급함이 일 때도 있으며 상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던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오기 전날 뿐 아니라 가끔 잠이 안와서 산속에서 밤에 바깥에 나가 본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발을 내딛을 수 없도록 아주 깜깜한 절벽과 같은 어둠의 공간일 때가 있습니다. 낮에는 햇빛 속에서 자연의 오묘한 아름다움이 있고 밤에는 어둠에 감추어진 새로운 세계의 비밀스런 아름다움이 또한 있습니다. 어두워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가운데도 얼마든지 다닐 수는 있습니다. 인적인 끊긴 산속을 불빛을 비추며 조명 아래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또한 새로운 아름다움이다 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비록 어두움이지만 어떻게 다녔을까요? 조금 있으면 익숙해질까요? 너무 깜깜하니까 그 익숙해지는데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제가 손전등을 가지고 갔습니다. 밤에 산에 다니다가 혹시 어두워지면 어떻게 할까하고 생각해서 전등을 가지고 갔는데 밤에 비취니까 충분히 길을 찾을 수 있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밤이 되면 조금 시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밤에 운전할 때나 또 이렇게 다닐 때 제가 안경을 쓸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안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경을 쓰고 다니니까 괜찮아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준비해놓으면 어려움은 어려움일 뿐이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준비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준비했고 시도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우리는 느끼는 것이 있잖아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오는 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준비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헤쳐 갈 가장 큰 준비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게는 한 없이 가볍습니다. 우리의 삶은 한없이 미천합니다. 우리의 삶의 매너는 한없이 천박합니다. 살다보면 정말 부끄러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한없이 경박하고 미천하고 천박해도 주님은 우리를 박대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우리를 대해주셨고 우리의 잘못 이상으로 우리를 덮어주셨고 주님은 기대 이상으로 채워주셨고 점점 더 큰 은혜로 우리의 삶의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제 우리의 성도들이 참여한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그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기 위하여 그 교회 성도 하나하나를 세우시고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성도 한분 한분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무작정일지언정 기대했을 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해 바라지도 못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은혜까지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한 말씀이라도 제게 부탁하셨던 것, 결코 소홀해하지 않습니다. 기도제목 부탁한 것 결코 작게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헌신하고 싶습니다.’ 하면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기도합니다. 중도에 포기하겠다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성도가 기도한 것이 있고 목사가 기도한 것이 있는데 한때 마음 품은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강력히 말씀드립니다. 목사도 성도도 기도했는데 이제까지 기도한 것이 무엇이냐? 끝까지 가야한다고 강력히 강권합니다.

저는 분명히 믿는 것 하나 있습니다. 기도하면 이루어집니다. 저는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소원을 주신 것이고 그 하나님께 받은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어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평생동안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교회적으로는 지난 14년 동안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평생 주셨던 은혜보다, 지난 14년 동안 주셨던 은혜보다 하나님은 점점 더 큰 은혜를 앞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건 우리의 소망뿐 아니라 실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날마다 점점 더 큰 은혜가 넘쳐서 점점 더 큰 헌신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점점 더 깊고 완숙한 온전한 헌신을 이루시고 주님께 귀히 쓰임 받고 하나님 나라에 임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 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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