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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든 사람 (고전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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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는 전국의 산과 들, 거의 모든 나무의 잎들이 아름답게 단풍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사람의 얼굴도 홍조를 띠듯 살아 있는 생명체인 나무도 날씨에 몹시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가 봅니다. 단풍에 대한 과학적인 표현은 “기온변화에 따른 나뭇잎의 색소 변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상식으로 말하면 나뭇잎의 수명이 다하여 색깔이 바래져 결국 낙엽이 되는 나뭇잎의 소멸과정입니다.

단풍이란 따지고 보면 죽음의 서곡인데도 왜 가을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열심히 단풍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단풍과 낙엽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돋아날 새싹을 예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아름다움이란 본질적으로 단조롭고 메마른 것입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는 또 어디에 있나요? 얼마 못가 떨어지는 낙엽은 병든 모습인데도, 단풍은 왜 아름다운 자태를 내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단풍은 병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늙음입니다. 낙엽은 떨어진 죽은 이파리인데도 추하지 않은 것은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떨어진 나뭇잎의 자태이기에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싱싱할 때 꺾은 나뭇잎을 푸른 젊음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아름답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단풍은 왜 가을에 물들고 가을은 왜 겨울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요? 단풍이 겨울의 목전에서 아름답듯이 인생도 황혼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무가 자기 몸의 변화에 따라 늙어가며 처음의 싱싱함을 잃었는데도 아름다운 것 같이 사람이 늙어 피부의 싱싱함을 잃고 몸의 윤기와 색깔을 잃었다고 해서 추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풍의 색깔 변화는 엄격히 말해서 나뭇잎이 병든 모습이지만 단풍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병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 가을처럼 아름다운 사람이고 늙은 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단풍처럼 아름답게 물든 사람이며, 죽음을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낙엽처럼 담담한 사람인 것입니다. 단풍과 낙엽은 나무 생명의 절정이듯 사람의 병듦과 늙음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석양에 물든 하늘처럼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색깔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병들거나 장애가 된 몸도 아름다울 수 있고, 늙음에도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나무가 싹이 나서 자라며 꽃을 피우며 과일을 맺고 단풍으로 물들고 낙엽으로 떨어지는 모든 모습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의 모든 과정도 다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한 인생의 이치라면 장애를 입고 원치 않는 삶을 살더라도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단풍은 말해 줍니다.

세 유형의 사람들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빠랑 가위바위보 할까? 네가 이기면, 부탁하는 것은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그래서 가위바위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위바위보를 할 때마다, 아들은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이 매번 이겼고 그래서 가지고 싶은 장난감, 먹고 싶은 모든 것을 다 사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즐거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버지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기뻐하는 아들을 보면서, 자신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가 매 번 아들에게 일부러 져 준 것을, 아들은 아직 어려서 알지 못합니다. 아들은 오직 주먹밖에 낼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손가락이 없는 조막손으로 태어나, 오직 주먹밖에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주먹밖에 낼 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릴 때까지, 아버지는 계속 져 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서 세 유형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유형은 아들처럼 자신의 한계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배우려 하지 않고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에게 대듭니다. 둘째 유형은 첫째 유형의 사람보다 수준이 높아서 첫째 유형 사람의 한계를 볼 수 있지만 그런 사람에게 늘 이겨 냅니다. 상대방을 깔보고, 자신에 대해 흡족해 합니다. 셋째 유형은 역시 첫째 유형의 사람보다 수준이 높습니다. 그런 상대방을 만나, 일부러 져 줍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격려해 줍니다. 여러분은 현재 어떤 유형입니까? 어떤 유형이고 싶습니까?

만약 셋째 유형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실력이 더 월등하게 높아져야 합니다. 아이와 같은 실력이 아니라, 어른과 같은 실력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준이 높아져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훤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앞의 첫째 유형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실력을 높일 수 있을까요?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하지요. 머리만 좋다고 실력이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적으로 실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인생에 대한 공부, 인간에 대한 공부, 하나님의 거룩한 삶의 원리에 대한 공부, 이런 종류의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인생은 학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배움은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일인 것입니다. 낮은 실력 낮은 수준으로, 서로 다투고 할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 식의 모습인 것입니다. 머리가 좋다고 자신이 실력이 높은 줄 착각하고, 짧은 잣대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합니다. 머리 좋은 것이 우환이 되는 겁니다. 작은 그림 차원에서는 맞는 부분이 있지만, 큰 그림 차원에서는 한참 빗나간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실력이 자라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로 관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실력이 높아졌다고 다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관대함이 없으면, 앞의 둘째 유형에 머무르고 맙니다. 자기보다 수준 낮은 사람과 아등바등 다투는 모습, 좋아 보이지 않는 법이며 그런 사람에게 이기고서는 흡족해 하는 모습,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조막손을 가진 사람에게 보를 내어 이기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실력이 낮은 사람을 깔보고, 자신의 높은 실력을 뽐내고, 꼭 상대방에게 이겨 먹으려 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모습으로 오만함과 독선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더 추합니다.

그러므로 실력에 이어, 관대함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너그러운 혼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실력이 머리의 문제라고 한다면, 너그러움은 가슴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각각 과목이 다른 것입니다. 수학을 잘 한다고, 국어도 자동적으로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가슴이 열리고, 가슴이 따스해져야 합니다.

셋째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관대함이 구비되면, 올라야 할 고지의 9부 능선까지 오른 것이지만 아직 조금 부족합니다. 거기에 힘이 보태져야 합니다. 가벼운 사안에 있어서는 관대함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무거운 사안이 되면, 관대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상황에 말려들어, 이겨 내야 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필요합니다. 곧 존재의 힘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말려들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력이 머리의 문제이고, 너그러움이 가슴의 문제라면, 존재의 힘은 배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힘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히 져 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시절에는 부분밖에 보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온전히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개인적 고백이라 한다면, 바울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때가 있었는데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때입니다. 그 일이 최선의 길인 줄 알고, 바울은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것입니다. 곧 수준이 낮았던 것이지요. 그러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어른으로 자라났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보니, 과거 자신의 행동이 참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준이 높아진 겁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사랑에 대해 세세히 설명하는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랑은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수준이 높아 나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을 이겨 내려 할 때, 거기 뽐내거나 교만한 마음이 있을 수 있는데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상대방을 이겨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넉넉히 져 줄 수 있는 게 사랑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을까요?

사랑에 대한 설명에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구를 지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기고 싶은 욕구를 가지는 겁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할 때, “모든 것” 중에는 이기고 싶은 욕구도 있지 않을까요? 사랑은 그 욕구를 견딘다는 겁니다. 견디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견딘다”는 말은 억지로 참아 내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참아 낸다면, 그건 사랑을 묘사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견디는 겁니다. 별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견디는 겁니다. 그러자면 존재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힘으로 넉넉히 져 주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가 되지 않을까요?

관대함의 힘, 어떻게 하면 그것이 자라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늘이 자신 안에서 점차 확장되어야 합니다. 자아 대신 하늘을 자신 안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나>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할 때 이는 열등의식도 아니고, 윤리적 차원의 겸손도 아니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대신, 내 안에 하늘이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우월감을 느껴야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나>가 없는 것이고 상대방을 꼭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안의 하늘이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도 온전히 그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첫째 유형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수준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그에게 자아가 남아 있어서 상대방을 이기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가시나무>의 노랫말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잇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인간의 에고가 기승을 부리는 순간인 것입니다. 상대를 이겨야겠다는 헛된 바램이 힘을 떨치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 속으로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우리가 지금 비록 첫째 유형이나 둘째 유형으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셋째 유형의 존재로 살고픈 바람, 그것은 참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설령 우리의 목숨이 다 할 때까지 완전한 셋째 유형의 존재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길을 걷는 것 자체로 향기롭지 않을까요? 그런 바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시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우리의 그 바람을 조금씩 이뤄주시지 않을까요?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귀한 새생명을 얻게 되는 세례식을 거행했고 오늘은 성만찬을 거행하게 됩니다. 세례가 성도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만찬은 성도의 거룩한 생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은혜의 최고의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기념하라"고 까지 강조하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이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더하여 주시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즙으로 지정하여 이것을 먹고 마시도록 제정하신 성례입니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몸이 희생됨을 의미하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서로 교통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포도즙을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신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주님이 오실 때 까지 계속해서 거행해야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며 죽으심의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빵을 떼시고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은 내 살이다 이 잔은 내 피다”사람의 몸은 살과 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잔을 마시게 되면 예수님의 몸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광야에 왔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게 한 것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만나입니다. 이 만나를 먹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만나를 먹음으로 인해서 멀리 있던 미래의 가나안 땅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만나는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 만나를 먹음으로 생명을 유지하다가 가나안 땅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산 것은 만나 그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 만나 이것을 먹고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게 되면 이것은 그보다 더 큰 능력과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으라, 피를 마시라 하는 것은 단순히 빵을 먹으라, 포도주를 마시라는 식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치는 그 사랑을 먹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대속 사역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육신의 빵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인 빵과 포도주를 먹고 믿음으로 성만찬에 참여하게 될 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큰 은혜가 있습니다.

영혼이 살게 된다

영혼이 살게 되어서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먹는 것은 약간의 빵과 포도주이지만 이 물질이 영혼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상징이요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죄를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먹는 행위가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게 하고 또 산 영혼을 계속 구원의 생명력을 공급받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고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식은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행위로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선한 행동을 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하거나 수양을 많이 쌓고 특별한 일을 한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을 사람만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영혼이 말씀으로 그것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영생을 확신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살아있음을 경험하고 천국을 확신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얼굴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찬 참여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주신 생명, 영생을 확신하고 천국의 소망 가운데 성찬에 참여하여 이 은혜를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된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주님과 한 몸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본래 내 살이고 어떤 것이 나중에 주어진 예수님의 살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상태입니다. 이것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라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오늘의 시대에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님과 한 몸이 되게 하시는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3:20에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신 여러분!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며,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다시 깨어나고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어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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