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 가운데서 용납 합시다 (엡 4:2)

  • 잡초 잡초
  • 458
  • 0

첨부 1


어느 날 눈과 코와 귀와 입과 손과 발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문뜩 오뚝한 코가 벌떡 일어서더니 입을 성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몸에 여러 지체들이 제각기 수고하며 주인을 섬기는데 우리 중에 몹쓸 이가 하나 있습니다. 저하고 제일 가까이 사는 입이라는 자인데 하고 싶은 얘기는 혼자 땅땅하고 먹고 싶은게 있으면 주인에게 가진 아양 다 떨어서라도 기어이 다 먹어 치웁니다. 그래서 향기로운 음식을 맛난 음식을 차려놓고 내가 냄새 좀 맡으려고 하면 낼름낼름 입으로 다 가져가는 바람에 나는 감질만 납니다. 이런 의리 없는 입을 어떡하면 좋습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이 어정어정 걸어 나오더니 맞장구를 칩니다. 거 말 잘 했다구. 이제 방금 코가 입 때문에 받은 피해를 적나라하게 말씀하셨는데 나야말로 입 때문에 받은 서러움을 말할 것 같으면 코에 비길 바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주인이 몸 무게는 좀 나갑니까? 그 무거운 몸을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이 마을 저 마을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가 집에 들어오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나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더니 저 입에 먹을 것 집어넣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서 옳소 옳소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손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것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입이 거만하기 짝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먹을 것 있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요. 개를 보십시오. 닭을 보십시오. 소를 보십시오. 먹을 것이 있으면 입인 지가 가서 주워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입은 어떻게 된 판인지, 날 보고 이걸 갖다 달라 저걸 갖다 달라 일일이 내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개가 앞발 보고 먹을 것 갖다 달라는 것 봤습니까? 먹고 싶은게 있으면 지가 갖다 먹으면 될 텐데 실컷 주워서 먹이고 나면 이빨 쑤셔라 이빨 닦아라 피곤하다 하품 한다 앞에 병풍쳐라. 내가 아니꼬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꺼벅꺼벅 눈이 일어섰습니다. 우리 이렇게 성토만 하고 있을게 아닙니다. 얄미운 입을 골려줄 묘안을 찾아냅시다. 이제 나는 아무리 맛난 음식을 보아도 보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코는 앞으로 어떤 냄새를 맡아도 냄새를 맡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입을 위해서라면 손도 발도 열중쉬어 꼼짝 달싹하지 않기로 합시다. 드디어 이 제안이 통과되고 하루 이틀이 지나갔습니다. 사흘 나흘이 지나갔습니다.

다리가 후둘 후둘 떨리는 몸을 앞으로 나서더니 왜 다리가 이렇게 후둘 후둘 떨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눈이 껌뻑거리며 나왔습니다. 앞이 가물가물한 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코가 나옵니다. 온 마을에 먹을 것 냄새로 가득 차 있어 미칠 지경입니다. 그동안 꾹 다물고 있던 입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형님들 나도 입이 타서 죽겠소. 이러다가 우리 다 죽습니다. 내가 밥을 먹고 마시면 나만을 위해서 먹습니까? 손이 어쩌다 매운 것 집어다가 넣어주면 입에 불이 납니다. 빨리 달라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 빨리 넘기려고 하다가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혀를 깨물기도 하고 피를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 몸에 사지백체를 위해서 내가 고생하는 것이니 만큼 형님들 너무 서러워하지 말고 우리 서로들 협력하며 사십시다. 이 말에 다른 지체들도 수긍을 하고 예전대로 제각기 맡은 일을 시작했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 할 때 합력 하여 선을 이룹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나(골 3:13) 본문에서는 '사랑 가운데서'를 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Lincoln). 사르트르는 “지옥이란 나를 용납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지옥"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비슷한 표현이지만 프랑스 시인 잔 포엘은 "남을 용납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지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그럽게 생각하고 사랑으로 용납하여야 합니다.

  자신도 사랑 가운데서 용납합시다.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3)고 말했습니다.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자라면서 자신을 뻐드렁니와 커다란 귀를 가진 이상한 아이로 생각했다합니다. 대학시절, 한 친구가 귀가 크다고 "손잡이"라고 불렀을 때 움츠러들었고 자신을 경멸했다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면서 외모가 하나님께는 아무 문제도 안 되며, 오히려 지금의 외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느냐에 대해 자신에게 정직했어야 했습니다. 사실상, 이가 그렇게 불쑥 나온 것도 아니요, 귀가 그토록 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정직하게 외모나 인격이 남의 눈을 끌만큼 그렇게 멋진 사람도 아니었음을 시인해야 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키가 크든 작든. 홀쭉하든 뚱뚱하든, 코가 납작 하든, 얼굴에 기미가 잔뜩 끼었든, 보조개를 가졌든, 또는 건장한 체격을 가졌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만드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만드신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안전은 결코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과의 만족스러운 관계 속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영역에 대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한편 다른 영역에서는 과대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 대해 객관적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여「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가운데서 용납하여야 합니다.

  가족도 사랑 가운데서 용납합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합니다.

  싱가폴에서 어거스틴 텐이란 박사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싱가폴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상의 총애를 받고 있는 국회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인과 결혼한 지 3년 만에 이혼을 하고 10년이 넘게 독신으로 살면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싱가폴 수상이 어거스틴 텐을 아끼는 마음으로 훌륭한 규수를 중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규수와 약혼을 하고 결혼 날짜까지 정하게 되었던 중 교회에 나가 성령의 능력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자, 자연히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와 자식을 버리고 나간 내 아내를 여태 미워했는데 그 미워했던 마음을 이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또한 이혼한 뒤 10년 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전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당신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리고 우리 다시 함께 삽시다.” 그 다음부터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를 밀접하게 했고 결국 그의 전처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여인과 결혼하려던 그 날짜에 14살 된 아들을 앞세우고 전처와 다시 재혼하여 전보다 더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 텐은 수상의 분노를 사게 되었지만 거기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교수와 국회의원 일을 더욱 충실히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90년도 겨울에 바이블 칼리쥐에서 공부하고 있든 이들 가운데 몇 가정이 로토루아에 놀러가서 연세가 드신 키위부부가 사는 가정에서 차를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모두 차를 대접을 받았는데 자녀들 사진을 보니까? 한명은 여자인데 동양여자였다 합니다. 그래서 설명을 하는데 사실 저 딸은 한국에서 입양해온 딸이라며 자기 딸을 자랑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위는 의사고, 딸은 간호사인데 행복하게 지금도 좋은 관계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요. 거기에 부모자식간의 사랑과 정을 느낄 수 있었다합니다. 자기 딸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가족이구나 이게 가족이 누리는 복이구나 하고 느꼈답니다. 그때 모두는 감동을 받았다합니다. 야 정말 귀한 부부다. 정말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배웠다 합니다.

  피가 다르다면 다른 사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피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신앙의 수준이 다르고 학력이 달라도 넓게 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형제자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피흘려주셔서 형제, 자매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성도는 형제입니다. 한 골육입니다. 성도의 가슴과 심장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가운데 용납하며 함께 하는 모두가 됩시다.

  사제지간도 사랑 가운데서 용납합시다.

  한 교장 선생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밤 9시경. 자율학습을 하는 2학년 교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아직 끝날 시간이 멀었는데도 책가방까지 다 챙겨 귀가 준비를 마치고, 옆에 있는 이 학생, 저 학생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복도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던 순간 '가망을 챙겼으면 조용히 집으로 갈 것이지 저 녀석이 교실 분위기를 망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1분, 2분을 지켜봐도 그 행동을 그치지 않길래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자네, 몇 학년 몇 반이지?" "2학년 13반입니다." "왜 남의 공부를 방해하느냐?" "…그게." "입 다물어!"  그 학생의 뺨을 힘껏 때렸습니다. "다음부터 주의해!" 교무실로 내려 숙직 교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숙직 교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율학습의 종료시간은 3학년은 도서실에서 10시까지, 1·2 학년은 교실에서 9시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학생은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이 되어 집에 갈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아차!' 낯이 화끈거렸습니다. '자율학습의 학년별 귀가 시간을 모르고 경솔한 행동을 했구나. 맞은 학생이 집으로 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큰 잘못도 없는데 매를 맞을 바에야 내일부터 자율학습을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벌이라는 것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그 가치를 공유할 때에만 효용이 있는 것인데, 오늘의 질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장의 위엄이 학생들에게 가볍게 휘어 꺾여서도 안 된다. 다른 학생들보다 1, 2분전에 귀가를 서둘렀고, 다른 학생의 공부도 약간 방해했으니 뺨 맞은 것은 학생의 책임으로 돌려도 되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봐도 기분은 개운치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2학년 13반에 들어갔습니다. "어젯밤 자율학습을 하다가 나에게 맞은 학생이 누구냐?" "접니다." "9시가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인데 10시가 끝나는 시간인 줄로 착각해서, 때려서는 안 될 너의 뺨을 때렸구나. 정말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교장선생님." "너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끈기도 있지만 교장의 실수를 포용하는 넓은 가슴까지 가졌구나!" 13반 모든 학생이 힘찬 박수를 쳤습니다. 뺨 맞은 학생의 얼굴은 더욱 환해졌습니다. 교장의 권위를 고집했더라면 그 환한 학생의 얼굴은 못 볼 뻔했습니다. <낮은 울타리, 1997년 12월호> 김재규/영동공과대학 학장

  이웃도 사랑 가운데서 용납합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 5:14)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뒤, 그 이웃이 호미를 빌리러 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호미를 챙겨주었습니다. 이웃이 가고 난 후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빌려주어야 하나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그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복수와 증오란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이 어떠했든지 상관없이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것은 용서이자 사랑이란다." 지금 내 마음에는 어떤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요? 용서와 사랑의 용납은 복수와 증오의 마음을 덮을 수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 가운데서 용납합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35)합니다.

  한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나섰습니다. 그때 한 테러리스트가 쏜 총알이 아버지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소녀는 범인을 찾아내 복수할 생각으로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지의 기자가 되어 이스라엘 근무를 자청했습니다. 그녀는 법원 기록을 뒤져 12년만에 범인의 소재를 확인했습니다. 테러범의 이름은 오마르 하티브… “이제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왔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범인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인 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진정한 복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리적 복수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그녀는 테러범과 가족들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는 차원 높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로라 블루멘펠트. 전 워싱턴포스트지 기자의 이름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상대를 때려눕혀야 승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상대를 용서해야 승리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용납이 최선의 복수입니다.

  세계도 사랑 가운데서 용납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9)합니다.

오래 전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경계선 문제로 장기간 분쟁을 계속했습니다. 이 같은 분쟁은 급기야 무서운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1900년 부활절 아침 아르헨티나의 한 사제가 그리스도의 부활 및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해형제의 우정을 맺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강론했습니다. 그는 이 같은 강론을 아르헨티나 각지에서 했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칠레까지 가서 했습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으로 두 나라는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군함은 상선으로 개조되었으며 무기를 만들던 공장은 공업학교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국민 사이에는 신뢰가 생겼고 그리하여 대포를 녹여서 그리스도 상을 만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드디어 1904년 3월 13일 동상의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전에는 적이었으나 이제 두 나라 백성들은 동포에게 느끼는 사랑을 서로서로 교감하였습니다. 동상이 제막되고 태양이 질 무렵 두 국민은 무릎을 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동상 밑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구주 예수의 발밑에서 끝까지 유지하기로 서약한 평화를 만약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깬다면 즉시 이 상들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라." 그 때 모세 나쟈라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단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우리들은 이 기념상을 세계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세계는 확실히 인류에게 미칠 평화에 관해서 큰 교훈을 배울 것입니다." 그 후로 90년의 세월이 흘렸으나 이 그리스도상은 지금도 여전히 무언의 설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디럭스바이블- 국경의 그리스도)

체구도 볼품없고 지적 능력도 그리 뛰어나지 못한 로마인들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하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일본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로마인 이야기 집필을 시작했다합니다. 수 만장의 원고를 써내려가면서 그가 찾은 해답은 군사력도 법률도 아니었다합니다. 팍스 로마나의 키워드는 타민족에 대한 관용과 포용정책이었다 합니다. 다른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면서 나아가 자기들 것으로 흡수하는 흡인력. 이것이 로마의 번영을 불러왔다는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글로벌 체제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중국 광저우(廣州)를 방문해 이와 반대되는 얘기를 들었다합니다. 왜 한국인은 다른 민족에 그토록 배타적인가하는 지적을 들었다 합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화교들이 기를 못 펴고 사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 한다합니다. 광저우는 전 세계 화교 70%의 고향. 고향사람들이 세계 어디에서나 돈 잘 벌고 성공하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항변을 한다 합니다. 이들의 지적에 변명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합니다. 갖은 장벽에 막혀 그늘 속에 살고 있는 게 국내 화교의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합니다. 화교뿐 아니라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다르면 일단 이방인으로 밀어냅니다. 높은 울타리를 치고 우리끼리만 살려고 하는 동안 스스로를 세계화 시대의 변방으로 유배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글로벌 시대, 2천5백 년 전 로마인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음을 넓게 가지고 포용정책을 가져야 합니다.

  스위스에 안드레아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수년 전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세상을 증오하며 싸움을 일삼는 외고집의 늙은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가 준 용서에 관한 책을 읽고는 감동을 받아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게 됐고 자신이 상처를 줬던 사람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삶에는 기적과 같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분노로 가득 찼던 마음은 사랑과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그는 이름마저 해피라고 바꿨습니다. 이후 해피 할머니는 88세에 알프스 정상에서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아 프랑스 잡지의 표지 인물이 됐습니다. 또 91세에는 복엽 비행기를 타고 아슬아슬한 곡예를 해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습관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았던 해피 할머니는 사망하기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히 여겼던 13세기 작품인 예수의 초상화마저 자기에게 용서를 가르쳐 준 책의 저자에게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용서와 용납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묘약입니다.

  사랑가운데서 용납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용납의 극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일 본체로서 전능한 분이면서도 무력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어 세리와 창기를 용납하셨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삶 속에서 죄를 많이 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과정 중에서 탈락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 가운데 용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되 사랑 안에서 용납하는 달입니다. 자신도 가족도 사제지간도 이웃도 원수도 세계도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