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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에 담긴 4가지 (창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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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란 말은 에클레시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사람이기에 믿는 성도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아브라함이 부르심 앞에 서므로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처럼 부르심의 축복은 우리들 자신에게 영광이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겸손히 감당하고 응답하는 소명이어야 한다. 부르심이 자랑거리나 교만을 가져다 주는 우월의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는 본문 속에 함께 나오는 것들이 있다.

1.비젼이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이루어질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비젼을 교육적으로 야망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비젼이 주어진다. 비젼은 현재의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을 뛰어넘는 힘이 되기에 하나님은 부르심을 깨닫는 자에게 비젼을 제시하신다.
아브라함을 보라.
창12:2 "네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받은 비젼은 놀라운 축복의 약속이었다. 글자 그대로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복에 대해서 예언하였다.
하란에 거하고 있는 무명의 사람 아브람을 향해 주신 예언은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었다. 개인에 불과한 사람을 향해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는 예언과 큰 이름의 영광을 누린다는 예언은 가슴이 설레이는 비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거지처럼 살았다. 마음도 거지, 사는 것도 거지, 교회생활도 거지처럼 했다.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게 눈 여겨 볼만한 인물이 못되는 모습으로 기억이 된다. 그런데 기도회자리에서 내게 들려진 예언이 있었다. 너는 디모데가 된다. 너는 앞으로 바다를 건너간다. 하나님을 믿는 학생으로 서 있는 나는 그때 부르심을 받으면서 가슴이 설레이는 비젼이 주어졌다. 빈집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삶의 목적과 방향이 세워지는 데 삶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목사가 되고자 하는 비젼이 삶의 예언이요 목적이 되었다. 비젼은 위대한 힘이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반드시 비젼이 동시에 주어진다.
새해아침! 이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

2.사명이다.

  그리스도인의 비젼은 자기가 이루어갈 꿈이나 야망의 성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과 함께 주시는 비젼은 나 중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비젼은 언제나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사명을 담는다. 아브라함을 보라. 창12:2 하반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였다. 창12:3 하반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 큰복을 받게 되는 비젼은 자기 혼자 잘되는 것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다.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것은 다른 사람이 비젼을 이룬 나를 통해 복을 누리고 복을 얻게 해야 된다는 사명의 선언인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 복을 나눠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복을 주어 비젼이 성취되게 하고 그 놀라운 축복을 땅의 모든 족속이 소유할 수 있도록 사명을 언급하는 것이다. 부르심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나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주변의 모든 족속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고 복의 중심이 되고 복의 모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철저히 나 중심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명이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성도는 거룩하고 큰 비젼을 품으라. 그러나 그 비젼들이 믿는 우리들로 인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을 수 있는 사명이 되게 하라.
우리 교회의 비젼은 6가지이다. 그 첫째가 자녀를 보내고 싶은 교회이다.
왜 이런 비젼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며 전진해야 하는가?
둘째, 셋째, 그리고 여섯째 비젼을 다 말하여도 결국 그것은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나의 비젼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란 말이다.

토머스 갤로데트는 19세기 목사였다. 그는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목회자가 되었다.
그런데 4살짜리 아기를 둔 부모가 겔로데트 목사를 찾아 왔는데 목사가 보니 선천성 농아가 틀림없었다. 수심과 근심에 가득 찬 부모와 철부지 4살의 아기를 쳐다보면서 겔로데트 목사는 이 농아아이가 대학에 들어가서 직장을 가지게 되는 비젼을 꿈꾸었다. 그는 자신의 교회내에 고네티켓 농아학교라고 간판을 내 걸고 농아학교를 시작했다.
학생이라고는 이 4살된 아이와 소문을 듣고 온 두 명의 어린이였다. 교사는 목사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비젼과 사명을 느낀 겔로데트의 농아학교는 훗날 세계위인의 농아종합대학교가 되었다. 링컨 대통령 시절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겔로데트의 아들 에드워드 겔로데트가 초대학장이 되었고 최초로 예배드리는  농아인 교회 예배당을 창립하였다. 시작은 초라해도 비젼은 성취되고 만다. 그러나 그 비젼 속에 복을 나누어주려는 사명감이 없으면 개인의 야망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겔로데트와 그의 두 아들이 모두 농아인에 대한 교육과 선교를 통해 복을 나누려는 사명이 있었기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장애인들의 삶이 질적으로 달라지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나의 비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얻게 하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영적 부흥을 일으켜 시설과 재정의 복을 받는 축복의 비젼을 갖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교회밖의 사람을 위한 사명과 관련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 건강치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가 복을 받아 구원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자. 누구나 오목천교회는 부흥된 교회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자녀를 보내고 싶은 교회! 만인들을 위해 복을 나누는 교회가 되는 사명을  잊어버리지 말자.

금년에 나는 주차장을 정비하면서 그 위에 임시예배당 및 교육관 공간을 마련하는 비젼을 꿈꾼다. 그 공간이 준비되면 교회학교 교육시설도 만들고 선교원도 시작하고 특별히 특수아동들에 대한 학교를 시작하고 싶다. 교회안에도 특수교육에 종사하는 전문선생들이 있기에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사명이 있다. 교회가 먼저 복을 받고 그 복을 다른 사람들이 얻게 하는 성도들이 되자. 부르심에는 사명이 따른다. 그러나 사명을 외면한 부르심은 미신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3.보호하시는 특권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면서 걸어간다. 비젼과 사명을 느끼며 살 때 하나님의 돌보심의 권리가 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거룩한 비젼을 향해 살려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보호와 지켜주심이 있는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잘 났고 못났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의 책임져주심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것과 아주 밀접하기에 꼭 그대로 된다. 우리가 부르심의 사명을 감당하려다 반대에 부딪치고 심지어 핍박과 욕과 저주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다. 그리고 같이 저주할 것 없다. 하나님이 책임지고 돌보신다는 점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나의 사명을 돕고 격려하며 축복하는 사람에겐 내가 갚지를 못해도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신다. 이것이 부름 받은 자의 특권이다. 하나님이 싸워주시면 사람이 어찌할 수 없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사탄도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을 믿으면 담대하게 된다.

4.결단의 의무이다.

  비젼과 사명 그리고 특권을 누리는 신앙인의 삶, 그 부르심은 감사요 축복이다. 선택이다. 구별이다. 그러나 이모든 것은 의무가 따른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야하는 의무다.
창12: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로 가기 위해서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명령은 비젼의 삶, 사명의 삶, 특권의 삶을 살아야 하는 신앙인의 결단의 의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의무명령은 ①분리의 명령이다. 우상을 떠나라는 것이다. ②실천의 명령이다. 본토를 떠나라는 것이다. ③순종의 명령이다.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감당하기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의무는 힘들고 아파도 감당해야 한다. 힘들어도 시작해야 한다. 창12:4을 보라 아브라함이 의 의무를 감당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쫒아 갔다고 하였다.

갈대아 우르, 하란땅 그곳은 최고로 번영된 지역이었다. 도시계획이 잘 되었고 도로포장이 되어있는 수준 높은 물질의 땅이었다. 집의 옥상에는 화분과 정원수가 자라나는 버리기 힘든 삶의 자리였다. 그러나 우상의 땅이기에 그것을 버렸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응답하는 의무가 이행되어야 한다. 그 때 비젼이 살고 사명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일이 계속된다. 부르심을 기뻐하며 나아가자.
안 되요, 싫어요, 못해요, 이런 것에 붙잡혀 있는 우리의 낡은 옛 생각을 끊어버리자.
아브라함은 걸어나갔다. 부르심 앞에 결단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비젼의 사람이 되었고 사명이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 주일아침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기에 교회로 나왔다. 부르심이 있었기에 예배하며 단을 쌓는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무엇을 끊어버렸고 무엇을 단념하고 무엇을 결단하였는가?
그 결단의 의무가 실행된 사람에게 부르심에 동반된 비젼과 사명과 특권은 삶 속에 다가오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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