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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무엇인가?" (창 25: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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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속의 많은 사람들을 읽어 나가다 보면 그 누구도 나하고 관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요, 사람들의 실패가 나의 실패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움직이고 눈물과 회개와 감사를 안겨다 준다.
  성경의 인물 중 특히 야곱의 일생은 나의 일생, 성도의 일생처럼 느껴진다. 야곱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인간이해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창 25:19-20의 쌍둥이 잉태이야기는 3가지 진리를 말해준다.

1. 사람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태어나는 생명이다.

  인간들이 지식과 지혜를 발전시켜 생명의 비밀을 풀어보려고 한다.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다. 아무리 유전자 지도를 만들과 생명의 비밀을 풀어간다 할 지라도 왜 이 생명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대답은 종교의 영역이요, 신학의 영역인 것이다. 창 25:21 이삭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였으나 이삭이 그를 위해 여호와께 간구하여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무리 남녀의 육체가 유전자 프로그램대로 준비되어 있더라도 잉태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라는 것이다. 태의 문을 여는 것은 하나님이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도 100세에 아들은 낳은 것, 한나가 무자하였다가 기도로 아들을 잉태하게 된 것, 요한의 모친인 엘리사벳이 아기를 잉태하게 된 것, 이 모든 이야기는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이라는 설명이다.

이 생명의 기원을 하나님께 두는 히브리인들은 시편 127:3에 이렇게 노래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던 다윗을 조롱하던 미갈이 태의 문이 닫히고, 평생 아기를 갖지 못한 것은 생명의 기원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생명의 나의 것이 아니다. 주신 분의 것이기에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지켜져야 한다.

2.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생명이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이 생명이라면 그 생명이 왜 죄를 지어야 하는가?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에덴동산에 세워주신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 반역하였다. 시험하는 자가 사람을 부추겼을 때 아담은 하나님에게 복종해야하는데 시험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것은 아담 개인에게서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담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 죄는 영구적인 타락을 수반하였고, 그 타락은 인류의 연대성 때문에 아담 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타락의 결과로 아담은 타락한 인간성을 그의 자손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으로서 범죄했다.

충주 탄금대에 가면 이런 시비가 있다. "하얀 꽃 된 것은 하얀 감자. 파 보나마다 하얀 감자. 보라색 꽃 된 것은 보라색 자주 감자. 파 보나마나 자주감자." 이것은 일본인은 언제나 일본이고, 백의 민족 조선인은 언제나 조선인이란 민족시이다. 일본인이 게다를 버렸다고 한국인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조상이 생물학적으로 종자가 그래서 그렇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은 태어날 때 죄의 노예의 상태로 태어난다. 연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아담은 오고 오는 후손의 대표자로서 범죄하였다.
그래서 불순종의 죄는 사망의 결과를 가져왔고,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인 것이다. 대표자로 인해서 모두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롬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다. 아담의 범죄는 오고 오는 사람들에게 벌을 동반하는 범죄인 것이다. 그러기에 리브가의 뱃속에 잉태되는 에서와 야곱은 죄를 아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다.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어머니 자궁의 보호 속에서 하나님의 허락으로 잉태된 생명인데 두 아이는 태 속에서부터 싸움을 한다. 이 얼마나 은혜에 대한 배반의 모습인가? 태 중의 태아와 같은 생명이 무엇을 아는가? 죄 때문이다. 원죄 original sin 이 문제인 것이다. 원죄 때문에 사람은 죄인이고, 또한 자 범죄를 범하므로 죄인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고 간음죄에 떨어진 후 회개하며 통곡한다. "나는 내 죄과를 아오며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부르짓는 그는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하였고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였다. 욥기 15:14 "사람이 무엇인관데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사람은 태 중에 지음 받을 때부터 의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아이들 속에도 욕심이 있다. 내 것은 빼앗기지 안으려는 다툼이 있다. 엄마의 젓을 배불리 먹은 아이도 자기 엄마 젓은 배고픈 다른 아이에게 물리면 난리가 난다. 같이 살 수 있는데도 욕심을 부린다.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싸웠다. 사람은 일생동안 싸우기 위해 태어난 자처럼 산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 가지려고, 더 높아지려고 산다. 죄가 그 원인이다. 세상사람들은 이것을 부인하기에 사람에게 희망을 건다. 제도나 조직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고려치 않으면 어떤 제도나 조직도 소용이 없다. 부패한 마음이 하나님의 도에 도달하기까지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의 상태를 변화시켜야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런 의미로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더러운 죄인인 것이다. 예수께서 마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러분을 구원의 필요를 느끼고 있는가?

3. 사람은 섭리 속에 태어나는 생명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와 관리, 보존, 인도의 예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창 25:23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말하신다. "두 주인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내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두 아이의 미래가 예언되어있다. 두 개로 나누이는 민족이 되는데 하나의 민족보다 하나의 민족이 섬김을 받는다고 한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인간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뜻이다. 내가 불신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냥 팽개쳐 준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은혜로 이끌어 가신다는 뜻이다.
내가 죄인이어도 하나님은 나의 삶을 간섭하신다. 하나님이 민족을 이루게 하고, 큰 자와 작은 자를 결정하신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태어나서 축복은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은혜이다. 인생을 향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어 우리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 야곱을 큰 자로 섬기라고 섭리하시고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 예정론이 오해되고 있다.

하나님은 인생을 예정하시되 구원을 얻을 자와 지옥으로 갈 자를 결정하셨다는 이중 예정은 잘못된 오해이다. 예정된 큰 자는 작은 자를 섬리라는 그의 이 말씀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 예정론이 구원에 대한 말이 되려면 야곱은 구원했고, 에서는 지옥에 보냈다고 해야한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것은 이세상 사는 동안 누가 누구를 섬길 것이냐의 문제이다. 븐 자 에서가 작은 자 야곱을 섬기리라는 것이다. 예정론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롬 9장을 인용해서 어떤 사람은 멸망하도록,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고 한다. 9:21을 보면 토기장이 비유가 나온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를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를 하나님이 주권을 기지고 계셔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인생을 토기 빗듯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보다 예정론을 분명히 말한 성경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구원론과 상관이 없다. 귀히 쓰는 그릇은 구원을 의미하고 천히 쓰는 그릇은 멸망을 의미해야 하는데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롬 9:24 이 그릇은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신 자를 의미한다. 구원을 위해 대두되는 주인공은 귀한 그릇보다 천히 쓰는 그릇인 이방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토기장이 비유는 구원론을 가르치는 예정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귀하게 천하게 구별해서 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멸망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하는 이 하나님을 전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하나님이 구별하고 축복해서 쓰시는 선택이 있는 것 뿐이다.
우리는 예정을 바로 이해하면서 구원과 관계된 하나님의 예정을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하여야 한다. 엡 1장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전적으로 죄 된 인생 길을 아시고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 하셨다. 인간에게는 구원할 능력이 없다. 다만 인간 세계는 자유가 있어서 구원을 거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능력은 없지만 멸망에 대한 책임은 있다. 지옥에 가는 것은 내 책임이다. 인간에게 능력이 있다면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멸망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며 구원에는 차별이 없으시다.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는다.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자유이며, 그 자유는 책임이다. 구원에 대한 능력은 없지만 자유는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멸망하는 것은 나 때문이다. 이제 주어진 자유의 책임을 잘 사용하자. 다만 하나님이 나를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신다는 은혜를 알고 섭리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알 때 참된 인생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유를 빼앗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와 섭리를 믿는다면 자유는 멸망으로 위협하며 쓰러지지 않는다.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다 은혜와 섭리를 믿지 못하고 위임한 자유를 마구 사용하였다. 그 자유의 남용은 아차하면 죄의 소용대로 간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는 형제이면서 빼앗고 미워하고 죽이려는 인생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를 과신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자. 주신 사명을 감사하며 구원을 이루어 놓으신 것을 감사하고,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 섭리를 따라 살자. 그 섭리를 걷는 자는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잠 9:21) 나의 품은 계획은 뜻을 분별하며 쫒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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