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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뒤집지 않는 전병 (호 7:8~9, 호 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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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저희가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싫어 버렸으니 대적이 저를 따를 것이라.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리웠느니라 내 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저희가 어느 때에야 능히 무죄하겠느냐?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찌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저희가 홀로 처한 들 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저희가 열방 사람에게 값을 주었을찌라도 이제 내가 저희를 모으리니 저희가 모든 방백의 임금의 지워준 짐을 인하여 쇠하기 시작하리라.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버리고 전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고을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카멜레온이란 동물이 있습니다. 도마뱀처럼 생겼는데 보호색을 가진 게 특징입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변 환경 조건에 따라 수시로 색깔을 바꿉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기가 막히게 색깔은 바꾸지만 생각만큼 생존력이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모든 보호색 동물들이 다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성과 절개입니다. 하나님만 철저하게 섬길 때 그것이 온전한 신앙이지,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변질되면 아주 곤란합니다. 자기 생존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 걸치고 적당히 지내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뒤집지 안흔 전병과 같이 두 주인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본문은 4장 이하에 수록된 9편 가운데 네 번째 설교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연되어 있던 신앙의 혼잡 문제를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회색 신앙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호세아 당시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특히 말세에 이런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딤후 3:5).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거울 삼아 어지러운 세대에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두 주인을 섬긴 이스라엘을 통해 이 시간 하난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한 순간도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의 실제 마음과 삶은 항상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 속에 차지하고 있던 것은 세상의 신이었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신앙의 자리인 마음은 한 군데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를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 6:24). 세상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이미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두 주인을 섬기기를 원했지만 사실은 세상의 신을 섬긴 가증한 백성입니다.

첫번 째 그들이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이중적인 신앙은 왜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1)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겉보기에 어엿한 하나님의 선민이었습니다. 제사도 꼬박 꼬박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두 가지가 없었습니다. 진실된 마음이 없었고, 말씀의 구체적인 실천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껍데기만의 외식주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의 외식주의가 여러 군데 지적되어 있습니다.

7장 14절 보면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심'은 히브리어로 '레브'인데,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기도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간구였다는 뜻입니다. 그 부르짖음은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7:14b). 그들의 제사 또한 거짓된 것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죄를 위해 제단을 많이 만들었습니다(8:11-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 그 자체가 이미 불법이었고(신 12:14-15 참조), 더욱이 그들의 제사는 외식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8:13-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게다가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유리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율법을 범했습니다.(8:1b, 12-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그들은 본래 제사장 나라로 선택된 자들로 성결의 의무를 갖고 있었지만(출 19:5-6, 레 11:45), 외양만 갖춘 그들의 종교는 가증스런 외식주의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외식주의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계속 이어져 온 고질적 병폐였습니다. 이사야도 탄식하며 이를 지적합니다(사 1:12-15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래 믿으면서 기도와 찬송을 유창하게 하지만 마음은 냉랭할 수 있습니다. 봉사하지만 단 마음이 아니라 자기 열심으로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심히 경계할 일입니다. 십자가 구속에 대한 감격과 그 가운데 드려지는 진정한 예배와 삶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결코 참 신앙이 아닙니다.

2) 혼합주의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연히 따라 오는 현상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거짓 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들 중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이교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처럼 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은 혼합주의자(syncretists)라 부릅니다. 또 그들의 비정상적인 신앙을 가리켜 혼합주의(syncretism)라고 지칭합니다. 이들 역시 명백한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남북이 분열된 여로보암 당시부터 우상 숭배를 강행했습니다. 남쪽 유다에 선전이 있기에 절기가 되면 열지파의 사람들이 내려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형상화한 것도 잘못이지만, 그후 여기에다 바알, 아세라 신을 섬기는 가나안 토속 종교를 혼합시켰습니다. 특히 왕들이 정책적으로 우상 종교를 장려하였고, 국토 전역에 우상을 세웠으며, 온 국민이 이를 섬겼습니다(8:4-6절-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리웠느니라 내 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저희가 어느 때에야 능히 무죄하겠느냐?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7장 8절에 '뒤집지 않은 전병'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전병은 본래 고운 가루로 잘 익혀 드리는 소제물입니다. 이것을 구울 때 뒤집지 않으면 한쪽은 타버리고, 다른 한쪽은 설익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신앙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외식주의로 여호와를 잘못 섬겼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알 종교를 적극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영어에서 바람을 피우고 두 집 살림하는 남자를 가리켜 '파트 타임 파파'(Part-Time Papa)라고 합니다. 어느 때는 이 집 가서 아빠 노릇 하다가 또 어느 때에는 저 집 가서 아빠 노릇하는 이중적인 인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상 신, 하나님과 세상을 이중적으로 섬기는 자들은 파트 타임 크리스천(Part-Time Christian)이 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풀 타임 크리스천(Full-Time Christian)이 참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전 인구의 20-25%에 이를 정도로 성도가 많은 나라입니다. 참 감사하고 복된 일입니다. 외국이나 지방에 갔다가 밤에 김포공항에 착륙할 때면 붉은 십자가의 거대한 도성을 보게 됩니다. 가슴이 감격스럽고, 뭉클합니다. 그러나 한편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다. 솔직히 이 땅에 혼합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통일교, 대순진리회 등 여러 종교를 혼합한 이단이 극성을 부립니다. 종교간의 대화를 가장하여 신앙의 혼잡을 일으키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통일 문제나 구제 등 일반적인 사역을 위해서 얼마든지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나 개신교의 일부 인사들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든지 유림의 묘소에 가서 참배하는 등의 행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개신교 안에서도 샤머니즘의 색깔이 농후한 신앙 행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기복주의, 신비주의 등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소망보다 현세적인 축복을, 거룩한 삶보다 신비 체험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주님께서 통탄하실 모습들입니다.

3) 세속주의 때문이었습니다.

드러내 놓고 우상 종교를 섬기는 것도 위험하지만 내적인 우상 숭배도 만만치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내면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곧 세속주의입니다. 이것은 외식주의와 혼합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우상 숭배와 같습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골 3:5). 따라서 세속주의와 참 신앙은 병존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2:15).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은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왕, 방백들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통 그랬습니다. 당시 그들의 세속주의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물질과 권력과 향략 등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차드 포스터가 자신의 글에서 밝힌 대로 돈, 권력, 섹스 등은 세상 끝날까지 사단이 이용하는 세속주의의 3대 요소입니다.

(1) 성적 유혹

잠언 6:27-28절절에 솔로몬이 말하는 성적 유혹 극복 지침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먼저 마음으로 상상하지 말고(25절) 불을 품거나 숯불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음란한 것들을 가까이 두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PC에서 자주 들어가는 인터넷 음란 사이트가 있거나 즐겨찾기를 해놓은 것들, 비밀 장소에 숨겨놓은 음란물 등 그 모든 것들을 가리켜 솔로몬은??‘타는 불’과 같다고 경고합니다.

불을 품고 있으면서 영혼과 몸이 불타지 않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또한 어떤 경우에도 구체적으로 성적 범죄에 빠질 수 있는 이성과 접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지기만 하는 것도 벌을 면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명심합시다. 하루 10시간 가까운 시간을 함께 지내는 직장 동료들과의 사이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솔로몬은 알려줍니다.

이런 사악한 성적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것은 말씀뿐입니다.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가까이 해야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해 줍니다(잠언 6:21-22절). 이런 노력을 의도적으로 합시다. 큐티하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설교 듣고, 필사하고 등등 말씀에 붙들려 살기 위해 노력합시다. 말씀이 우리를 성적 유혹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물질과 권력 두 가지를 더 언급합니다.

(2) 물질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물질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제일 관심사는 오직 '곡식과 포도주'였습니다(7:14b). 그들은 물질만 많으면 국가 안위도 지켜질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고 화려한 전각과 성읍을 쌓았습니다(8:14a). 그러나 물질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착각이 바로 이겁니다. 물질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안정되게 지켜 줄 것으로 오해합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황금 신(Mammon)을 섬깁니다. 물론 돈은 편리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막10:17~31에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래? 네가 많은 것을 했는데 한 가지를 더해라 하신 것이 아니라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준에도 못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계명도 다 지키고 복도 받아서 부자인데 이제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라며 자랑스럽게 칭찬받을 줄 알고 말했는데 오히려 부족하다, 기준에도 못 미친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기준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 해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선한 것이 될 수 있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선한 것이 있을 수 없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낳아야 자기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 해결해주신 구세주이시며,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믿고 의지하는 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종교인은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내가 저것도 하고 이제 내가 무엇을 더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더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다"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과 재물 중에 재물을 택했습니다.
돈을,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얻기는 불가능합니다. 생명, 사랑, 행복 등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진정한 안전은 호주머니에 무엇이 있는가에 달린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에 누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실 때 비로소 행복해지고 영원히 승리합니다.

(3) 권력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이스라엘을 돌이키고자 징계하기 시작합니다. 백발이 얼룩얼룩한 것처럼 국운이 쇠하게 되었습니다(7:9). 그것은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권력에 호소합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와 애굽을 찾아가 도움을 구한 겁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리석은 비둘기'와 같았습니다(7:11).

비둘기가 먹이를 보면 그물에 걸려 집힐 줄도 모르고 날아가는 것처럼(7:12) 이스라엘은 잡혀 먹힐 줄도 모르고 강대국을 찾아갑니다. '속이는 활'처럼 잘못된 방향으로 간 겁니다(7:16a). 또 들 나귀처럼 고집을 부리며 조공을 갖다 바치며 구애를 합니다(8:9). 그러나 후일의 역사를 보면 오히려 이런 행위 때문에 국운이 급격히 쇠했고(8:10), 급기야 B. C. 723년에는 앗수르에게 패망하게 됩니다. 또 애굽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했습니다(7:16). 한 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권력은 제 아무리 대단해도 믿을 게 못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맺은 친구는 한시라도 돌아설 수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오직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자살 행위에 불과합니다(사 31:1-3 참조).

두 번째 두 주인을 섬긴 결과는 어떻습니까?

초읽기에 들어간 하나님의 심판을 소개합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은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은 결국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본문은 곳곳에서 임박한 심판을 암시해 줍니다. 마치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절박하게 묘사됩니다. 회개도 때가 있는데 완고한 이스라엘은 때를 놓치고 마침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탄식하시며 이스라엘에게 곧 닥치게 될 비참한 운명을 선포합니다. "화 있을진저! 저희가 … 패망할진저!"(7:13). 그러면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명령하십니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8:1). 여기서 독수리는 앗수르의 살만에셀 군대를 가리킵니다(왕하 17:3-5, 신 28:49 참조).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이니 나팔 불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토록 열심히 섬겼던 우상도 백해무익하고 다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8:5-6). 모든 것들은 약탈당하고(8:7), 그동안 쌓았던 전각이나 성읍도 불타 없어지고 만다고 예언합니다. 또 그들은 '기뻐하지 않는 그릇', 곧 깨진 질그릇 같이 천덕꾸러기가 될 겁니다(8:8). 더욱 비참한 것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이방의 포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8:13).

이러한 이스라엘의 심판은 우리에게도 큰 경종이 됩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격을 잃어버린 채 맹숭맹숭 외식주의에 빠지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고 의지한다면 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닥쳐 올 것입니다. 어정쩡하게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고 하는 식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앞뒤가 골고루 익힌 전병처럼??앞뒤가 같은 순도 100%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가 추구할 순수한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1) 속과 겉이 일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참 신앙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배드린 대로, 기도한 대로, 봉사한 대로, 교회당에서 하던 대로 사는 겁니다.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우리도 별 수 없이 외식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성도는 신앙 생활 원칙 하나를 세웠답니다. 그분은 주일이 되면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속옷에서 겉옷까지 새 것으로 갈아입는 답니다. 그리고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하루 종일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합니다. 그 다음 월요일 아침에는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출근한답니다. 그 이유는 주일에 예배드리고 은혜 받던 마음가짐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그 마음가짐과 생활 자세는 배울 만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이 깃든 삶, 그것은 우리 모두가 추구할 순수한 신앙의 모델인 것입니다.

2)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사실 상황과 이익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면 신앙 생활이 특별히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손해를 보고 핍박을 받을지라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때 하나님의 승리가 있습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의 에피소드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숭실전문 재학 시절 몇몇 동문과 함께 평양에 들르신 은사를 뵈러 갔습니다. 대화 도중 일행 가운데 한 명이 "요즘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라고 말하자 이승훈 장로님이 역정을 내며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일본 놈 앞잡이 노릇해 봐. 지금처럼 살기 쉬운 세상이 어디 있나? 바르게 살려니까 어려운 게야." 그렇습니다.

세상 살기 어렵다고 작은 이해 관계를 따라 신앙을 변절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지워진 '자기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3)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승리하기 위한 비결은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는 신앙을 갖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게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우상 신과 세상을 의뢰한 까닭이었던 것처럼 오늘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도 매한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내 인생을 완전하게 지켜 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요 반석입니다(시 18:1-2).

우리 인생에 세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아주 친한 친구, 조금 친한 친구, 그저 그런 친구 등입니다. 아주 친한 친구는 물질이라고 합니다. 정말 요즘엔 사람들이 돈을 제일 좋아합니다. 조금 친한 친구는 가족과 친지들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학연, 지연, 혈연을 따지며 빽을 중시합니까? 그리고 그저 그런 친구는 바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만큼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중에서 누가 우리를 영원히 책임져 주겠습니까? 돈은 기껏해야 우리의 숨이 붙어 있는 동안만 유익합니다. 아무리 잘 아는 사람도 기껏해야 내 장례식까지만 참석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그 이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이 생과 내 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보호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그분만 의뢰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인 줄로 믿습니다(잠 3:5-6).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어리석게도 뒤집지 않는 전병처럼??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세상 두 주인을 섬기겠다고 나섰다가 결국 세상의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결코 한 인생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구별되이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여러분!

일편단심으로 변함없이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며, 하나님 한 분만을 전심으로 섬기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끝까지 좁은 길을 걸으며, 주님을 따라가는 양이 되어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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