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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으심의 대가 (요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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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심의 대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17절

한국전쟁 피난 시절 부산은 발 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바글거렸습니다. 그때 저는 범일동 매축지 근처에 살았는데 부산 항구에서 화차가 석탄을 잔뜩 싣고 범일동 매축지까지 와서 기관차를 바꿉니다. 그 시간이 10분내지 한 15분쯤 걸립니다. 그동안 피난민들은 개미떼같이 그 화차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립니다. 그래서 그 석탄을 각각 그릇에 담고 혹은 보퉁이에 담아서 연료로 쓰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생사를 걸어놓고 서부활극처럼 차위에 올라가 석탄을 끌어내리면 군인들은 연방 그들을 밀어냅니다. 그 석탄은 훔쳐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 옆에 서 있었는데 한 40대 남자와 한 10살쯤 되는 아들이 그 석탄을 모으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들은 올라가서 석탄을 퍼내고 아버지는 밑에서 받고 그러는데 군인들이 오니까 다 뛰어 내렸습니다. 그 아들도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큰 석탄덩어리 하나가 열차 밑으로 굴러들어가니까 아들이 기어서 그 열차 밑에 들어가서 그 석탄 덩어리를 드러내려고 하는 찰나에 덜커덩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쏜살같이 아버지가 뛰어 들더니 그 아들을 있는 힘껏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열차 바퀴가 아버지의 허리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아들을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그 처참한 모습이 마음속에 아로 새겨져서 항상 잊혀지지 않습니다.

1. 원수들의 조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볼 때마다 저는 그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원수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쳐다보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비웃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이 그렇게 희롱해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장면을 볼 때 부산항의 그 아버지와 아들이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살고, 아버지가 살면 아들이 죽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우리는 다 죽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면 우리가 다 삽니다. 그 열차 사고에서 누구 한사람은 죽어야 다른 사람이 살겠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아들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누구 하나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아담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지은 영혼은 반드시 죽으리라 했습니다. 따라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러한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을까요? 죄없는 자가 대신 죽어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제사제도가 있습니다. 속죄제, 속건제, 번제, 화목제 등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 피흘림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위해서 죽으신 것을 상징하는 피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대신 담당하시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우리를 죽음의 벼랑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는 우리가 살아갈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는데 주님이 우리를 열화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혹독한 조소와 비난과 정죄와 극한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했듯이 남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과 로마서 4장 25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목숨을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2. 죽으심의 대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대가는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대가를 지불하고 난 다음에 물건을 안 가져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대신 죽으셨으니 확실히 우리는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와 영광으로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용서받아야만 합니다. 의롭게 되어야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주님의 피 값으로 우리는 용서와 의와 영광을 누리며 살아야 되고 이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는 행동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대가를 지불했으므로 확실하게 거룩함과 성령충만으로 살아나야 됩니다. 거룩해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주님이 그 때문에 죽으셨고 피를 흘려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구하고 이것을 받고 이대로 확실히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성령충만을 구하고 거룩함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치료와 건강으로 확실히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매를 맞으시고 또 우리의 병과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처럼 우리는 확실히 치료받고 건강으로 살아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으로 확실히 살아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말씀에는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했는데 복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렸습니까?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죽고 너는 살아야 되겠다. 내가 저주를 받았으니 너는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확실하게 그리스도께서 저주에서 해방시켰으니 이것을 이뤄야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타락하므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해방된 사람입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저주에서 해방을 받고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2005년 10월 26일 연합뉴스는 신앙 활동은 영혼을 살찌게 할뿐만 아니라 부요하게 만들어 준다는 연구결과를 보도했습니다. 연구 결과를 요약해 보면 예배출석률이 두배가 되면 가게 소득이 9.1% 증가하고 복지지원금 수혜요청이 16% 감소하고 이혼확률은 4%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한 것을 통계학적으로 증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생천국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우리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 이십니다. 우리의 죽음을 짊어지고 음부에 내려갔다가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과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고 음부에 내려가서 고난을 당하시고 사망과 음부를 이기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천국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3.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굳세게 설 수 있을까요? 진리를 깨달아 알아야 굳세게 설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 말씀처럼 진리를 알면 자유케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면 그 다음에 폭풍우가 불거나 광야를 지나가도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위에 굳세게 서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감각을 의지하고 두려워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불안하게 하면 굳세게 서지 못하고 다시 종의 멍에를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굳세게 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화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고통과 저주 속에  몸부림치고, ‘나는 못한다, 할 수 없다’라는 어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내가 새로운 자화상을 굳세게 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새로운 자화상을 붙잡아야 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자화상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새로운 모습을 굳세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 나는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다. 나는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부활과 영생과 천국인이 되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신분이요, 자화상이다. 사단아 물러가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4천년 동안 성경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천사들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마귀의 공격에 우리는 말씀에 서서 단호하게 대적해야 됩니다. 마귀는 와서 항상 “환경을 바라보라. 네 감각을 의지해라.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라. 어떻게 무식하게 말씀을 믿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호하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흘려 죽음으로 값주고 사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당연히 누려야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고 마귀를 대적해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도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 가슴을 딱 내밀고 담대하게 마귀를 대적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마귀 앞에 떨면 안됩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를 볼 때가 있는데 보다보면 빠지지 않는 순서가 있습니다. 바로 동물들이 불붙은 둥근 고리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대개 동물들은 불을 싫어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그런데도 서커스단의 동물들은 주저하지 않고 펄쩍 뛰어서 불이 있는 고리를 싹 뛰어넘어 갑니다. 동물학자들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동물들이 불을 통과하는 이유는 불에 뛰어든 후에 주어지는 보상이나 가혹한 훈련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에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조련사에 대한 믿음만으로 본능을 거스리면서까지 불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조련사가 절대 나를 해롭게 하지 않는다. 조련사의 말대로 해도 괜찮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 무지막지한 동물들도 불이 활활 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일개 미물도 조련사를 믿고 본능을 이기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아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는데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호흡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뜻을 다 이뤄 놓았지만 땅과 내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예비한 모든 것을 기도라는 밧줄을 던져서 거기에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예비한 모든 것이 하늘에 남아있고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뜨겁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을 초월한 비밀한 일을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 예비했다가 나타내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았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 깜짝 놀라는 일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는 “오 주여,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옵소서. 그렇지 아니 하시면 나는 죽나이다”라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스코틀랜드를 훌륭한 복음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밤새도록 기도하여 복음으로 영국을 살렸습니다. 루터 역시 그의 친구 멜랑히톤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그를 붙잡고 한 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하여 병을 몰아내고 여러 해 동안 멜랑히톤과 함께 종교개혁을 이루어 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미국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 땅에는 비가 오지 않아 엄청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함께 9시간을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서 흉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 자들은 뜨겁게 기도하여 마귀를 물리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고백은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풀어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신앙이 가득한 사람은 입에서 신앙이 나오고 마음에 의심과 불안이 가득한 사람은 부정적인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고 잠언 6장 2절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입술의 말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풀어 놓습니다. 입술로써 부정적인 말을 하면 마음속에 있는 믿음이 다 부정되고 마는 것입니다. 입술이 믿음의 말씀을 고백하면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역사가 말로 나타나서 창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하나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고백하면 이 말씀이 나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고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강하고 담대하게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이 나가서 역사하여 기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열차사고로 아버지도 죽고 아들도 죽었다면 그 아버지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요 비극일 것입니다. 아들을 살리겠다고 뛰어 들어갔는데 아들도 차에 치어 죽고 아버지도 열차에 치어 죽었으면 그것은 비극인 것입니다. 또 아들이 아버지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나도 죽겠다고 하고 자살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확실히 살아야 되고 잘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피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야 되고 아버지의 뜻대로 잘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으니 나도 죽자라고 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었으니 나는 통곡하며 살자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리자. 내 영혼이 죽고 네 영혼을 살리고 내가 저주를 받고 네가 범사에 복을 받고 내가 채찍에 맞고 너는 고침을 받게 해야 되겠다. 나는 죽되 너는 살리겠다’라는 이 예수님의 간절한 뜻을 우리가 헛되이 돌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야 하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살아서 주님의 죽으심의 대가를 값지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살아서 우리 생애 속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영광스럽게 하고 헛되게 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너 위하여 내 몸을 찢고 내가 피를 흘렸다. 나는 죽되 너는 살아라.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했으니 네 영혼이 살것이라. 내가 저주를 받아 내어 달리므로 네가 복을 받고 내가 채찍에 맞아 찢어지므로 너는 치료함을 받으라.  나는 죽었으니 너는 살아라. 너는 살아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죽으신 고난의 대가를 우리가 다 받고 누리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의 깨어진 몸을 흘리신 피를 먹고 마실 때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 사랑의 열매로써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주의 사업을 확장하고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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