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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높이 들어라 (사 40: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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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동물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자기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부끄러운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시민권을 소지하고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사람입니다(빌 3:19-20).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과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고의 차이만큼 그들의 시야(視野)의 폭도 다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목표하는 일이 땅에 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눈의 높이도 수평적이거나 그 이하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속에 품은 환상만큼이나 그의 눈높이도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삼라만상을 바라보면서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발견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땅에 살아도 그 눈높이를 하나님께 맞추고 그의 뜻을 헤아리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세계를 보는 자이어야 하고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를 읽어내는 안목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I. 보지 못하는 세대

예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서 하시는 일의 특징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9:39). 이사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맡기시면서 이 백성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사 6: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자의 불행이라고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감각이 없는 자가 되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결과입니다.

(1) 우상숭배의 불행

눈이 어두운 사람은 사물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자기 눈으로 보고 판단하여 행동하여야 되지만 그럴 수 있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도 영혼의 감각을 잃고 있어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마치 거라사인의 땅에서 군대 귀신들린 자가 죽음의 도시인 무덤 사이로 돌아다니듯이 하나님과의 생명관계가 차단된 채 죽음의 상징인 우상에게 종노릇하곤 합니다.

이사야 40:18-19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5절에도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사람의 손으로 만든 수공물과 비교하며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이니 불행스러운 소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보지 못하는 자가 저지르는 과오

우리말에 「소경 제 닭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여 분간 없이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자기를 실족하게 하는 것인 줄 모르는 불행을 의미합니다. 무지한 자가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고 해서 그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영적감각이 없는 사람이 저지르는 과오를 지적하였습니다. 로마서 1:21-23에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25절에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의 가장 큰 불행은 자기가 소경인 줄 모른다는 것과 그런 가운데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가르치려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소경된 인도자라고 말씀하시고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마 23:15).

(3) 돌이킬 수 없는 자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자기의 과오를 깨닫고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과오를 쉽게 인정하거나 돌이키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백성의 죄를 책망하며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18:15에는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백성들이 감각을 잃고 혼미하게 되는 것은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져 그 소임을 못 다하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이사야 56:10에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은 희망을 잃고 불행하게 됩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암 5:13).

Ⅱ. 신령한 세계를 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존재하는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세계는 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무한대요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무한한 하나님의 세계를 관측하면서 황홀해 하는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하고 하나님께서 창조의 원인자임을 밝혀줍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배열하신 다음 인간으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며 세계에 충만하라고 하였습니다(창 1:28).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모든 것을 누리고 살면서 막상 그것을 지으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누리는 만물이 저절로 생긴 것처럼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곤 합니다. 영적인 눈이 밝혀진 사람은 사물을 보면서도 그것을 지으신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히 2:10). 그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다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그 기능을 발휘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시 19:1-2).

(2)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만물을 적절하게 관리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강론하시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 또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마 6:26-18). 이는 새나 꽃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야생동물과 식물이지만 그런 것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면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롬 11:36). 하나님께서는 삼라만상과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며 개인의 생사화복(生死禍福)도 다 맡아서 관리하십니다. 사도행전 17:25에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26-27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이 지은신 피조세계를 보면서 주권자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그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 26절에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역사의 교훈을 얻게 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앞서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들이 남긴 아름다운 업적을 보고 이를 계승하며 발전시키려 하게 되고 간혹 역사적 오류를 발견하면 이를 경계로 삼아 그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를 설명하면서 이를 경계로 삼자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6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의 감동된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면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옛날 다니엘은 바벨론에 인질로 붙잡혀간 사람이지만 느부갓네살 왕은 그에게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고 하여 「벨드사살」이라는 별명을 주었습니다(단 4:8). 그는 느부갓네살이 꿈에 본 신상에 대하여 해몽하면서 인류역사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증거 하였습니다(단 2:31-45).

역사의 안목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준행합니다(단 4:27). 고린도전서 10:11-12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Ⅲ. 여호와를 앙망하라는 뜻입니다.

본문 말씀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를 말합니다.

앙망(仰望)이라는 말은 신앙과 소망을 뜻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사는 자에게 쓰여 지는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은 영안이 어두워지고 살 소망을 잃어버린 가운데 매사에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30절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이 차단되어 버리면 앞뒤가 꽉꽉 막힌 절망 속에서 탄식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 27절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하거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도 감각이 무디어 어떤 반응도 못 느낍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원통한 것은 하나님께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비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84:5-6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새힘을 공급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마음 눈이 밝아지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엡 1:17). 그는 또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께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엡 1:19).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고 하였습니다(29절).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주님 뜻대로 봉사하는 일을 하고자 할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벧전 4:11). 이런 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골리앗 앞에 맞서는 다윗처럼 언제나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는 자가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힘이 약하거나 저를 해치러 오는 상대가 강한 것에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능력의 새힘을 행사하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요 14:12). 스가랴 4:7절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하고 호령할 수 있습니다.

(3) 체질세계를 능가하는 환상을 가집니다.

여기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미래 지향적인 비전과 환상의 삶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힘의 상징인 독수리는 날개를 치며 하늘을 향해 수직상승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바댜 1:4에는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찌라도”라고 하였습니다. 하늘 높이 비상한 독수리는 아래서 올라오는 상승기류를 타고 구만리장천을 마음대로 떠다닙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합니다. 하늘 높이 올라가면 땅에서는 보지 못하는 세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넓은 시야로 멀리 보고 전체를 보고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되 멀리 보고, 넓게 보고,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의 지혜로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독수리를 계시의 상징으로 표현하였습니다(계 4:7). 곧 체질세계의 종말과 완성된 하늘나라의 실체를 나타내는 미래지향적인 교훈을 주게 합니다.

성도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눈앞이 캄캄하고 답답하여 숨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천당의 환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해 두시기 때문입니다.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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