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 백성을 보내 주세요 (출 5:1-5)

  • 잡초 잡초
  • 357
  • 0

첨부 1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 시키라는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왕에게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나의 백성이 내 앞에서 축제를 올리도록 광야로 내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하나님이 누구냐? 그가 누구기에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겠느냐?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을 내어보낸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나가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병을 내리실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입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 왕은 호통을 쳤습니다. “너 모세와 아론은 어찌하여 이 백성이 일도 못하게 부추기느냐? 썩 물러가라. 그리고 시키는 일이나 해라.” 그는 이어서 “저들이 이 땅의 백성보다도 더 불어났다. 그런데도 너희는 저들에게 노동을 말라는 거냐?”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의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감히 왕에게 가서 우리 백성을 해방시켜달라고 합니다. 머뭇거리지도, 떨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왕은 “하나님이 누구냐? 내가 그 말을 들을상 싶으냐? 꿈깨라. 너는 정상이 아니다.”

200만 노예가 이집트의 산업전선 일꾼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많은 노동력을 잃는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놈이 나타나서 이들을 해방시키라 합니다. 또 더 황당한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하신 일”이란 것입니다. 사흘길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민족의 큰잔치를 벌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왕이 호통을 친 것입니다. “이것들아, 가만히 있는 사람들 선동하지 마라. 제발 일 좀 하도록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 형제가 임금에게 대드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반란입니다.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입니다. 혁명입니다. 성공하면 영웅이 됩니다. 실패하면 역적입니다. 사형입니다. 역사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언제 시작합니다.”하고 시작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전에 군대, 보급, 돈, 준비를 다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전혀 혁명 교과서에도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무모하기 짝이 없지요. 정말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다 하나님이 시키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도 수없이 거부했던 일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것 보다 더 무모한 일인 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백성을 내어보내 주세요.”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금년은 노벨 문학상 타기를 기대했습니다. 고은 시인, 황석영 소설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 등이 후보에 올랐답니다. 그런데 영국의 인기 있는 작가 혼비는 48살입니다. 그의 장편소설 제목이 멋있습니다. “진짜 좋은 게 뭐지?(How to be good?)”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별로 좋은 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인터넷에서 이 분의 글을 만났습니다. 왜 이 소설이 유럽과 미국 사람들의 혼을 빼는지, 그들은 이 소설이 “배꼽이 빠지게 우습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읽고 방바닥을 굴러 다녔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임기 만료된 식품 같은 날이 올 것입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카드와 같습니다. 그건 버려야 합니다. 여기 주인공은 아이가 둘 있는 여의사 케이티입니다. 남편은 글 쓰는 데이비드입니다. 그들 부부는 늘 헤어지자고 합니다. 서로가 불평꾼이라고 쏘아 붙입니다. 여의사는 일부러 바람을 피웁니다. 인간의 밑바닥에 내려갑니다. 그들은 겉은 모범생입니다. 삶이 권태로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꿈이 없었습니다. 그저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가 나의 유토피아라고 믿은 것입니다. 정말 모든 영적 신경이 마비된 것입니다. 꼬집어도 비틀어도 감각이 없는 식물 인간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꼴이었습니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위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요. 제가 시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Hope For The Future
        -By Joseph T. Renali-
                 
Today we face the trying tines
Of heartache and pain.
Many hopes and dreams shattered,
And prayers seem to be in vain.
With the hope of peace diminishing,
The heart has no definitive song,
We've waited for an end to hostilities,
But the struggle seems so long.

Yet-there is hope for the future,
Liberty and freedom are still in command,
But God will make the ultimate decisions.
He will evaluate our worldly demands,
And he mourns and counts every tear,
Why should we despair?
He mourns and counts ever tear,
And he hears and reviews every prayer.

미래의 소망
    -조세프 리날디 지음(정철번역)-

오늘날 우리는 비탄과 고통으로 가득찬
시련의 가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 수많았던 소망과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우리의 기도마저 헛되는 가 봅니다.
평화,안정을 바라는 희망은 점점 사라져 가는데
우리의 가슴엔 미더운 노래도 없습니다.
우리는 적대적 대립의 종말을 고대하여 왔건만
분쟁,갈등은 아주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아직은-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고
아직도 자유를 구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최종 결정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판다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그의 손에 잡고 계십니다.
우리는 왜 실망하여야 합니까?
그 분은 우리들의 눈물에 슬퍼하시고 헤아리시며
우리들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음미하십니다.

Ⅰ.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자기 백성이 죽어가는 것을 못본 체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바로 왕에게 가라. 가서 우리 백성에게 자유를 달라. 가나안에 가게 해 달라고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건 바보가 들어도 웃을 일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려고 덤비는 무모한 짓입니다. 이거 잘 압니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나서실 일 없지요. 만일 그러면 인간의 교만이 하늘에 닿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수없이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드디어 화를 내셨습니다. “이 바보야 누가 너한테 네 힘으로 하라더냐? 내가 있잖아. 내가 하마, 너는 다만 내 심부름꾼이야.”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이 내 힘입니까? 우리가 숨 쉬는 것 내 힘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기심입니다. 쟁취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공격적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포장술의 경쟁인 것 같습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은 화려한 장미꽃 같습니다. 그러나 속은 쓰레기가 있는 것도 많습니다. 사랑은 멍청해야 합니다. 바보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바보의 사랑은 꾸밈이 없습니다. 장식이 없습니다. 그저 좋아합니다. 좋으니깐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순수합니다. 잡티가 없습니다. 초식 동물처럼 순합니다. 사랑하는 본인도 사랑이 뭔지 모릅니다. 사랑에 무슨 공식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바로 그러십니다. 이스라엘 민족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신통하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만 아프게 했습니다.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이집트에 자기 백성을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수단을 다 동원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직접 하실 수도 있습니다. 바로 왕에게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금이 없으십니까? 보물이 없으십니까? 그런데도 백성들로 하여금 헌금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고는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또 축복도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문화교회라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의 한 지체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손, 발, 눈, 입... 여러 기관의 역할은 다릅니다. 목이 마릅니다. 목만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고통스럽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뇌의 명령이 내려집니다. 눈이 물 있는 곳을 살핍니다. 발로 걸어갑니다. 손으로 물을 떠 봅니다. 입으로 물을 마십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하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승산 없는 어리석은 싸움입니다. 어느 하나를 비교해도 이길 확률은 0%입니다. 돈도 없습니다. 조직도 없습니다. 군대도 없습니다. 무기도 없습니다. 숫자도 비교가 안 됩니다. 앞장선 모세와 아론 형제는 하나님이 하라 하시는 대로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긴다는 확신이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민족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기적입니다. 의도 없이도 삶을 완전히 바꾸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물결과 같습니다. 넘실거립니다. 출렁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랬을 것입니다. 웬 사람(녀석)이 나타나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느냐?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기가 우리의 고향으로 알았는데 여기 말고 또 다른 고향이 있단 말인가? 어수선했습니다.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계획은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오셨을 때, 자칭 엘리트, 잘난 사람, 배운 사람, 힘 있는 사람, 모두가 다 비웃었습니다.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촌놈, 무식한 놈, 어리석은 놈, 하면서 욕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십자가까지 동원했습니다. 나사렛 젊은 청년 예수는 말 없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들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참담한 실패는 사흘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기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인 것입니다.

Ⅱ. 용기 있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어느 신문에서 아르토 파실린나 지은(김인순 역) “기발한 자살여행”이란 글을 읽었습니다. 캠파이넨 대령이 있습니다. 그가 사업가 렐로넨과 우연히 만납니다. 같은 장소에서 자살에 실패한 두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됩니다. 그들은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당신은 자살을 생각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이 광고를 보고 무려 600여명이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살을 잘 할 수 있을까? 긴 시간 토론을 했습니다. 결론은 “같이 죽자.” 집단자살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같이 죽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다 같이 열기구를 타고 하늘에서 바다로 다 뛰어내려서 죽자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살 희망자는 스무 명만 남지요. 그들은 광장에 모였습니다. 켐파이넌 대령은 스무 명의 용기 있는 자살 희망자를 대절한 버스에 태웁니다. 북쪽 끝으로 올라갑니다. 그럼 과연 죽음의 용사들이 죽음이라는 약속의 땅에 갈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은 “죽음의 문턱에서 행복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이 땅은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의 행위를 무모한 자살행위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눈입니다. 저는 지난 여름휴가를 북유럽으로 다녀왔습니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러시아…. 제일 살기 좋은 나라 노르웨이는 환상적이었습니다. 북유럽 핀란드는 세계국가 경쟁력에서 항상 우등생입니다. 기독교가 국교입니다. 세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에서 가장 청렴한 나라였습니다. 백야와 설원, 순록의 나라입니다. 산타클로스의 고향으로 더 유명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고민이 있습니다. 자살수가 늘어납니다. 그 민족은 비애, 무관심, 우울증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용기 있는 모세 형제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우울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삶과 행복을 위해 탈출해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갑니다. 그들은 선택할 힘이 없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나(either~or)”가 아닙니다. 다만 가야만 합니다. 이때 용기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살 수 있습니다. 편안함만 찾는다면 결단이 어렵습니다. 지난 해 말 인도네시아에 쓰나미로 지도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미국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미국이 엉엉 울었습니다. 중미의 폭우, 파키스탄의 지진으로 8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학대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착취했습니다. 자연을 고문했습니다. 이젠 인간이 대가의 계산서를 받아 들고 있는 것 아닌가요. 유대인은 불신앙(하나님 떠나온 삶)의 대가를 받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통곡입니다. 사내 아기를 나일 강에 던져 죽여야 합니다. 그래도 이것이 바로 왕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우리들의 조상의 땅 우리의 고향으로 가자.”는 말을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대중가요 가수가 “아 나는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합디다. 그런데 모세가 나타났습니다. 감히 노예의 신분인 그가 “내 백성을 놓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용기”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는 대단한 행위 같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교인들에게 주일 지키세요. 십일조 바치세요. 새벽 기도 나오세요. 전도하세요. 당신 말과 생각을 바꾸세요. 설교합니다. 그런데 당신 내 충고 (하나님의 말씀) 듣지 않으면 손해 볼 것입니다. 그 사업 실패합니다. 당신 망합니다. 라고 감히 하기가 어려워요. 이렇게 슬쩍 넘어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의사가 간호사가 환자 사정 봐주면 주사 바늘도 찌르지 못합니다. 수술 못합니다. 그러면 그는 틀림없는 돌팔이입니다. 모세 형제는 바로 왕에게 “내 말(하나님의 말씀) 듣지 않으면 당신 망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유대인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때에 하나님은 민족의 영웅 모세를 보내신 것입니다. 미국의 최대 영웅은 노예를 해방시킨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입니다. 저는 남북전쟁을 한 그 길을 차를 타고 가보면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위대함을 새삼 느껴 보았습니다. 모세는 지금 노예 해방운동가입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은 대통령이었습니다. 모세는 노예였습니다. 그가 “우리 백성을 해방시켜 주세요.” 했습니다. 하나님의 빽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용기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죄와 사망의 노예였던 우리를 해방 시키신 것입니다.(엡 2:1) 우리 두렵습니까? 우리 자신 없으십니까?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하시지 마세요. 무서운 것은 부정적인 내 자신입니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하나님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게 하십니다. 늘 주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11.13 -충웅-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