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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심을 이기는 믿음 (요 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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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근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우리의 삶에 근심을 더해주는 뉴스들입니다.
왜 이렇게 날마다 사람들이 근심하는 것일까요?
죄의 속성은 우리의 삶에 근심을 더해줍니다. 죄는 마음에 근심을 주고 가정에 직장에 교회에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 특성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더 오래 산 사람일수록 더 근심합니다. 지식을 더 배운 사람이 더 근심합니다. 돈을 번 사람일수록 더 근심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1장 18절에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근심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근심이란 마음의 스트레스를 물리치려고 노래방을 찾아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가수의 노래 가사를 보니까 “근심을 접어놓고 다함께 차차차”하면서 노래하라고 합니다. 물론 노래하면서 근심을 떨칠 수 있습니다. 춤을 추면서 근심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다면 우리인생의 본질적인 근심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근심을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을 조금 잊게 만들거나 근심을 해소해주시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근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우리 주님이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들의 당시의 근심은 예수님이 떠난다고 이별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집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서 3년동안 예수님을 따르면서 인생과 시간을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따르던 주님이 이제 제자들의 곁을 떠난다고 선포하실 때에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근심이라는 단어는 바람 때문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요동하는 파도를 연상케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방향감각과 초점을 상실하고 있습니다..제자들이 가장 근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과 근심이었을 것입니다.주님이 떠낫을때 이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근심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갖기를 원하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근심을 기길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믿음을 갖는 것에 있습니다.

1. 영원한 처소가 예비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2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 주님이 세상을 떠나 이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십니다. 그 예비하신 처소에 주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모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종말 앞에서도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죽든지 질병으로 죽든지 수명이 다하여 죽든지 한번은 반드시 죽습니다. 여기 요한복음의 본문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제 죽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가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비록 고통과 저주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고난이 있고 눈물이 있지만 그 천국을 소망하면서 기꺼이 천국을 향해 근심하지 않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 바울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고난 앞에서 근심하지 않고 기쁘게 그 죽음의 길을 갈 수 있엇던 이유도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장래 우리의 처소 천국을 말하면 유치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를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너무 현세적인 삶에 강조를 두고 너무 현세의 생활에 너무 집중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는 이땅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라는 점입니다. 나그네와 외국인의 삶은 항상 고향을 생각하면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처소인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이땅에서 우리는 항상 그곳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할줄 믿습니다.
문제는 누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이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하늘처소를 가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 ‘길’이라고 하는 단어 앞에는 영어성경에 보면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life'라고 합니다. 길이라고 하는 단어로는 여러 단어가 쓰입니다. path,road,street등이 있습니다. 그런에 여기 쓰인 단어인 원어 헬라어의 길은 아주 크고 밝은 길을 쓸때 쓰이는 단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처소길을 가는 환하고 밝은 길입니다. 딤전2:5에서는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영원한처소인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한길 예수님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는 길은 유일한 한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한길만 유일하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처소에 가는 길을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위해서 천국으로 갈 수 잇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보내주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영원한 하늘처소에 들어가는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진리의 영원하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고 깨달은 사람만 들어오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진리를 알 때 근심이 떠나갑니다. 진리를 발견할 때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안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진리의 나라인 그 하나님의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땅에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무엇을 쓸까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한 삶을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없는 삶은 죽음입니다. 현대인들의 삶의 근심과 스트레스 권태감 우울함들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 삶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소유나 명예나 권세는 잠깐 우리를 기쁘게 할줄 모르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솔로몬이 이세상에서 권세와 명예와 돈을 소유하고 나서 고백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생명이신 예수님없이 아무리 돈을 얻고 명예를 얻고 권세를 얻어 보십시오. 그것은 근심과 염려와 공허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이런 세상적인 복을 얻을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것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 돈과 명예와 권세로 주님을 나타내고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어서 기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생명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우리 예수님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꼭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가는가?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에 빌립같은 제자는 그것을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를 우리는 복음서에 여러 기적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을 확신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알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알고 만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알고 그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무엇입니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있음으로 방황하거나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 예수님은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2.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13-14

지금 제자들과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실때에는 많은 기적과 이적과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주님이 떠나고 나면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까?
기도가 바로 주님이 함께 계신 것같이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이땅에서 경험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면서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 시행하리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시행하여 도와줄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일관되게 성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에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응답하여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현실의 삶에서 모든 것을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기도하시면서 기도의 조건으로 강조하시는 중요한 구절이 잇습니다. 우선은 12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합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주님께서하신 일을 할 것이고 또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는 일 중에 가장 대표적인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주님과 같은 일을 할 것이요 주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큰 일을 행합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여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을때에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이땅에서 능력의 우리 주님이 말씀을 전하였을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십시오.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일은 일찍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좀 더 열심히 행한 것이 있다면 믿음으로 기도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시행하리니”라고 합니다.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근거 그 이유가 너희가  잘 나거나 너희가 착해서가 아압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없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기도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길을 제대로 살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기도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선배인 바울도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삶의 큰 근심과 염려를 우리보다 더 많이 당했지만 기도함으로 놀라운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승리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의 삶에서 얼마나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해답이요 상급이요 무기인줄 모릅니다.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지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는 권세를 우리가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위해서 땀과 물과 피를 흘리고 모든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자녀들입니다. 여러분 삶이 두렵습니까? 근심과 염려가 있습니까?
두려움의 감정을 이기고 두려움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기는 길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염려의 감정을 이기고 염려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복음서에서 제자들을 보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나머지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주님의 제자훈련을 통해서 훈련을 받았지만 기도하기를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잇는 것은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러 가시면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갔지만 거기에서조차도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기도의 말씀도 받았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 알고 기도하면 좋은 것 제자들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사도행전에 들어가서 비로서 기도가 실천되어지고 기도의 응답과 체험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우리 중에도 기도가 어려운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실수와 실패 속에서 자꾸 기도할 때 기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배우는 길은 기도하는 수 박에 없습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여 주시고 그 맛을 스스로 누려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위하여 기도하여 주는 것도 의미가 잇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새벽에 한달간 새벽기도축제를 합니다.
새벽기도를 하시지 않던 분들이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기도의 귀한 기회를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새벽기도와 같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몇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은 분명한 기도제목을 갖고 작정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의 분명한 제목을 정하여야 합니다.
다음에는 마음에 시간에 대한 작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렵고 힘들지만 기도하기를 마음을 정하고 시간을 약속하고 결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 몸을 쳐서 복종하는 의지에 대한 작정을 해야 합니다. 내 몸은 잠에 익숙하고 게으름에 익숙합니다. 그것을 쳐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을 좇는 기도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는 수도사들이 기도하던 방 현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고 합니다.
“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
너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나를 주인삼지 않았고
너는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고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고
너는 나를 능력이라고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너는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나니
근심을 멈추고 응답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님의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16절

여기 주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성령님의 약속을 합니다.
비록 주님은 떠나지만 이제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셔서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고하십니다. 이 보혜사는 바로 성령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성령하나님은 주님이 주시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는 영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오시면 제자들과 항상 영원히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결코 떠나거나 분리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까?
먼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17절 하반절에 보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내 속에 성령님이 나와 함께 동거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종종 내안에 성령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합니다.
성령받았지만 성령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에 근심이 많습니다. 내 삶에 염려가 많고 두려움이 많고 죄가 여전히 나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고 성령받았지만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분들은 여전히 세상의 방식대로 돈의 흐름대로 육체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중에 그런 분이 있다면 그 성령님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마치 불이 꺼진 집처럼 내안에 꺼진 성령님을 회복하시고 의식하도록 회개하고 그분을 찾고 구하고 사모하고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찾아오십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입술로 찬송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우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우리 성령님의 근심의 영이 아닙니다. 우리 성령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서 가장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것은 평안입니다.그 그 평안은 우리 주님이 갖았던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한 심리학자가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을 근심하는가에 관해 목록을 만들어 보았다고 합니다.그랫더니 정말 오늘 근심하고 염려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가지고 근심하는 경우는 고작 10%에 불과하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근심으로 인생을 미리 근심하면서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가끔 저도 그런 공상을 할때가 있습니다. 며칠전에 차를 몰고 가는데 맞은 차선에서 오던 차가 앞차를 들이받으면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제 평생에 직접 차사고가 나는 것을 두 번 목도했는데 한번은 국도에서 잘 달려가던 짚차가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서 멀쩡하게 가던 앞차를 뒷차가 추월하려고 하다가 앞 차 옆구리를 들이받으면서 사고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혼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에 차사고가 나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그래서 죽으면 어덯게 될까?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저들은 장래는 어떻게 될까? 우리 교회는 어떤 후임자가 찾아올 것인가?

괸히 그런 부질없는 근심을 하게 되니까 정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가다듬도 ‘아니 내가 왜 근심을 해 일어난 사건도 아닌데“ 그러면서 생각을 중지시키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주님이 떠나가시면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근심하고 염려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가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주시어서 자기 제자들의 마음에 거하면서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도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근심을 이기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성령님을 따라 기도하면서 우리의 본향 천국을 소망하면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이기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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