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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어디를 바라보십니까? (시 123: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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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에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드는 뉴스를 보았다. 부모의 유산을 형이 나누지 않았다고 동생이 형네집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형의 이야기는 저 동생은 방황하면서 지내왔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고,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은 없는데 괜히 나를 괴롭히려고 이렇게 와서 일인 시위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뉴스가 들려왔다.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를 경매에 붙힌다고 한다. 대개 아들은 365만원에 딸은 169만원에 아이가 팔린다고 한다.

이러한 뉴스를 보면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까지 변해가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돈 앞에는 형제간의 우애도 없고, 돈 앞에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없는 것 같은 마음을 갖게 한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돈에 미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전철 문틈으로 아기를 태운 유모차가 끼어서 앞으로 이동하였다. 큰 일이 날뻔했다. 끔찍한 일이다. 마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원칙과 질서가 무너진체 어디론가 막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요즈음에 무섭게 번져가고 있는 조류독감이라는 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한 마디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자연의 원리를 무시하였기에 나온 결과이다. 밤낮 할 것 없이 불을 켜 놓고서 많은 달걀을 만들어 내려는 인간의 욕심이 만든 무서운 결과이다. 광우병은 어떤가? 소는 식물성 사료를 먹어야 하는데 인간이 편리하고,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동물성 사료를 먹인 것이 결국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만을 바라보고 살 때에 가져다 주는 결과가 어떤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올라간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장애자를 사람들이 메고 성전에 문 앞에 내려 놓는다.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기 위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면서 그의 관심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이 나에게 얼마나 주고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오지 못한 체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앉은뱅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물질만을 바라보면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나의 눈을 들어 내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어느 소년이 길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다. 그는 그것을 줍고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행여 또 이런 있을까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녀 그만 이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일생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데 큰 취미가 생겨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 외에 수 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주웠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많이 잃었다. 그 일생이 결국 넝마주의 인생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어느 구두닦이 소년은 구두를 닦을 신발을 찾기 위하여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만 쳐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의 것을 쳐다 볼 기회를 잃었다. 결국 그의 인생은 구두닦이로 마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사람은 무엇을 쳐다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된다. 땅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땅의 사람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하늘의 사람으로 산다.

그러면 내가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면 어떤 유익함이 있는가? 바라볼 때에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우리의 귀를 보라. 참으로 신기하다. 눈이 가는 곳을 향하여 귀가 열려있다. 왼쪽을 바라보면 왼쪽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되어 있고, 오른쪽을 바라보면 오른쪽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면 뒤를 돌아서 바라볼 때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심야기도 시간에 스피커 모니터가 잘 들리지 않았다. 왜냐면 그 스피커가 내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앞으로 자리를 조정하고 나니 잘 들린다. 나의 눈이 가는 향해야 그 곳에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내 눈이 향할 때에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된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곳에 삭개오라는 키가 작은 세리가 있었다. 삭개오의 마음 속에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하되” 보고 싶은 마음이 삭개오에게 들었다. 보고 싶은 관심이 있을 때에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되어 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계속해서 말씀은 선포되어도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는다. 왜 그런가?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관심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어떤 자세로 보는가?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종은 주인의 손을 바라본다. 주인이 나의 부족함을 얼마나 채워줄 수 있는가? 그 손을 바라본다. 여종도 역시 주인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얼마나 채워줄 수 있는가? 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면서 사는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라.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도움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다. 물질, 명예, 지식, 세상의 권력, 이런 한 것이 인생의 근본적인 도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챙겨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를 바라보면 오늘의 고통을 이길 수 있다. 예수를 바라보면 오늘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을 당할 때가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다. 가슴에 분이 터진다.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다. 예수를 바라보라.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라. 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바라보라. 내가 살면서 겪는 자존심 상하는 일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예수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바라볼 때에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라보아 말씀을 들으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닮아간다. 바라보면 닮는다. 부부가 살면서 닮아간다고 한다. 서로 바라보니 닮아가는 모양이다.

어느 마을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 닮은 큰 바위가 있었다.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언젠가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에게 행복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바위의 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어떤 장군이 나타나서 마을 전체가 소동이 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군은 실망을 안겨준 채 떠나고 말았다. 그 후에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정치가도, 시인도 나타났지만 그들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 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려나 보다"며 희망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오랫동안 그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위로의 말을 했다. "우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그의 모습이 붉은 저녁 노을에 비추이자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외쳤다. "어네스트를 보세요, 저 사람이 바로 큰 바위의 얼굴입니다."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은 바로 마을 토박이인 어네스트였던 것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산마루 바위의 얼굴을 보고 그 바위를 닮은 사람을 기다리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그 큰 바위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청교도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의 「큰 바위의 얼굴」이다. 작가는 이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렇게 달라진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보라. 성전 주변에서,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아도 예수님의 제자로 보지 않고 그들은 나에게 동전 몇 푼을 던져줄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를 볼 때에 단지 구걸하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의 복음이 꼭 필요한 사람으로 보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닷가에 있던 사람들이 모랫길을 따라서 걷고 있었다. 썰물이 되자 물이 빠지고 바위가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물이 빠진 바위로 나가서 바위에 엎드린 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책도 읽고 잠도 자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닷물이 밀물로 바뀌면서 서서히 밀려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잠이 들어서 물이 밀려오는 줄도 모르고 위험한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뭐라고 소리쳐야 할 것인가?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즐기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밀물의 물이 엄습하는 것도 모르는 체로 말이다.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막중한 책임이 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처럼 물질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예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도록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책임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보며 전도하자.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물질 앞에서 형제 자매도 없고, 부모 자식도 없이 이 세상은 무섭게 달려간다. 마치 전철이 유모차를 문틈에 끼고 달려가듯이 무섭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모두 예수를 바라보자. 물질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자. 새생명 축제의 날을 통해서 성전 입구에서 돈 벌기에 급급하게 살던 사람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는다.
(곽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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