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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 (출 12: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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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8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중세시대 타락한 천주교와 교황청을 향하여 개혁자 루터는 비텐 베르그 성당에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붙이고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의 위세와 권위가 절대적이던 시대였기에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바르고 참되게 해보려는 개혁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 불길은 전 유럽으로 번졌습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시작했지만, 개혁의 완성은 칼빈이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교단이 속한 장로교의 근원은 바로 칼빈이란 개혁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의 신학사상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도 많지만, 그의 이론이나 교리가 철학이나 과학에서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근거한 것이기에 많은 사람의 동감을 얻었습니다.

  칼빈의 핵심적인 교리는 한마디로 ‘하나님주권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한번 하시겠다고 하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도 있게 하시고, 안 되는 것도 되게 하십니다. 낮은 것도 높게 하시고, 높은 것도 낮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주권은 그의 깊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약한 생각이 인간의 가장 강하고 높은 생각보다 더 귀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 오묘한 생각에서 나오는 주권이기에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열정을 근거로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으십니다. 시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지금까지 일하시기에 주님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그의 뜻을 이루시기 날까지,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열정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강력한 주권으로 하나님은 개인과 공동체에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확실한 주권으로 개인과 역사와 공동체에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 주권적인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소위 ‘출애굽사건’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가장 위대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앞으로 몇 주간 살펴보면서 여기에 담긴 의미와 뜻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보려고 합니다.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와 해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일까요? 성경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것을 두 가지로 알려줍니다.

  첫째, 억압과 고통입니다. 출애굽, 즉 ‘애굽을 빠져 나오다’ 라는 말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억압 속에서 살았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이 살던 곳은 가나안이었습니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야곱까지 살던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에 몰아친 혹독한 기근 때문입니다.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자녀들을 보내었고, 거기에서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22년만에 다시 만납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근의 때를 피할 목적으로 야곱은 70여명의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의 가족들은 왕의 환대를 받으며 고센이란 곳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처음 그들은 참 행복했습니다. 야곱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났고, 가족들은 기근의 때에 부족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에 이스라엘은 애굽사람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요셉이 죽은 후에도 요셉을 알고 인정하는 왕들까지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남의 땅이긴 하지만 그들은 마치 주인처럼 인정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몇 세대가 지나가면서 이제는 애굽의 왕들도 옛날 요셉을 아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은 강대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통과 압박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도시에서 몰아내었고, 힘을 쓰지 못하도록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급기야 태어나는 남자아이를 죽이는 끔찍한 정책을 폈고, 이제 귀족의 위치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당시 이스라엘의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들의 삶은 참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매일 중노동으로 시달렸고, 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많은 형제와 자매가 죽어 갔습니다. 너무도 힘들자 그때부터 그들은 조상의 하나님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당시 형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하나님은 이들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이들이 당하고 있는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부르짖음 돌아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세워 마침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라암셋, 즉 그들이 살던 땅에서 숙곳으로, 즉 애굽의 북쪽 끝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애굽을 탈출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끝났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났습니다. 해방이 찾아 온 것입니다.

  성경은 그날의 모습을 두 개의 중요한 숫자로 당시의 감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의 인구입니다. 37절에 보면 애굽을 나올 때 이들의 숫자는 장정만 60만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만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여자와 유아들, 그리고 함께 탈출한 애굽사람까지 합하면 200만이 넘었습니다. 둘째는 41절에 이것은 430년만의 일이었다고 강조합니다. 200만과 430년, 성경은 그날 해방의 모습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성경이 이처럼 숫자를 강조하는 것에서 우리는 그날의 벅찬 감동을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엄청난 사람들이 누렸던 해방의 기쁨이었고, 그토록 기다렸던 세월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날은 감격적인 날이었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억압과 압제에서, 고통과 시련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날을 그들은 ‘여호와의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제정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영원토록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죄와 허물입니다. 출애굽사건은 언제나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적 관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분명 이스라엘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으로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상징적으로도 알려줍니다. 상징적이라 함은 출애굽을 통해, 모든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알려주려는 그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해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인간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주신 것처럼, 모든 사람을 억압하고 괴롭게 하는 죄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부분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여러분, 우리를 괴롭게 하고, 옭아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인류역사에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아담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는 죄가 가장 큰 부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은 죄의 짐을 안고 살다가 갑니다. 그 짐은 벗으려고 해도 벗어지지 않고, 버리려고 해도 결코 버릴 때가 없습니다. 죄가 언제나 나쁜 마음을 품게 하고, 악한 생각을 갖게 합니다. 죄는 자기를 방어하는 힘이 있어서 인간이 죄를 알면서도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죄가 죄를 낳고, 죄에서 빠져 나오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내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가 없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어하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억압에서 부르짖는 것처럼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죄 때문에 부르짖을 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 앞에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 죄가 억압하고, 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속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우리의 고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물꼬를 트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길을 만드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분명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고 살고, 죄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따라 다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삶의 수준은 아직까지 죄인의 모습이지만, 우리의 신분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거지왕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얼굴이 비슷하지만 신분이 다른 두 아이가 역할을 바꾸어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엮은 것입니다. 왕자는 거지가 되어 궁궐에서 빠져 나와 즐깁니다. 하지만 거지는 왕자가 되어 궁궐에 들어와 처음에는 잘 먹고 입으면서 좋았지만 점점 불편해서 다시 거지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거지가 아니라 왕자입니다. 아직까지 왕자로서 왕궁에서의 삶이 불편하여 자꾸 거지생활로 돌아가 마음대로 살고 싶더라도 우리의 신분은 분명 왕자요, 공주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우리는 자녀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이처럼 하나님은 의인이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의지나 내 수준이나 내 현재 모습과는 결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신 구원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를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 십자가의 은혜, 보혈의 능력, 바로 그것을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처럼 자유를 주시고 해방을 선포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바울은 이 자유를 얻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살면서 우리는 날마다 해방되어야 합니다. 억압과 압제에서, 염려와 걱정에서, 시련과 아픔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도대체 나를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근심입니까, 걱정입니까? 죄입니까, 허물입니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맡아 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강조한 이런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자유와 해방을 생각하면 어떤 나라보다 우리는 한국을 생각하고, 억압받던 시대에 어렵게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이 생각납니다. 그 가운데 한국기독교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1938년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평양형무소에 끌려갔습니다. 그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러기를 7년, 감옥에서 모진 고통을 받다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이 찬송을 부르며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그는 순교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가족 중에 주광조 장로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해방이 되던 날, 가족들은 그의 시신 앞에 너무도 안타까워서 울었다고 합니다. 조그만 더 있었으면, 해방의 날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온 가족은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셨던 분이고, 진정한 해방을 맛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분명 해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해방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해방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그는 감옥에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감사를 생각하며, 감사의 조건을 찾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달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먼저 감사해야 할까요?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억압과 고통에서, 근심과 걱정에서, 죄와 허물에서 근원적으로 우리를 해방시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의지하고, 맡기면서 평안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서 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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