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 감사하며 자족하라 (빌 4:10-13)

  • 잡초 잡초
  • 253
  • 0

첨부 1


시간의 빠름 속에 11월 첫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가을비가 그치면서부터는 바람이 불고 날씨가 쌀쌀해 진다고 합니다. 거룩하고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주의 전에 달려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위에 우리 주님이 주시는 좋은 일들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요즈음 농촌 들녘에는 추수하는 손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음이 분주해서 그런지 아주 해가 짧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오늘 저는 읽어드린 말씀을 가지고 ‘감사하며 자족하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감사하면 생각나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입니다. 온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에서 고된 일과를 끝낸 부부가 마주서서 하루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지평선에 놓여있는 예배당에서 저녘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만종은 노동 후에 찾아오는 안식과 종교적인 경건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옷자락에 흙이 뭇고 얼굴에 땀이 흐른 체 두 손을 모은 그들 부부처럼 하루는 물론이고 평생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감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가져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가을은 감사 기도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하루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속 깊은 감사들이 넘쳐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감사하는 사람은 자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자족할 줄 안다는 것, 매일 매일의 삶에 만족하면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은혜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양에 있는 어느 마을에 아주 돈이 많은 백만장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저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주식투자를 잘못하여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은행에 잔고를 조회해 보았더니 10만 달러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돈으로 1억원이 넘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고야 말았습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혈육은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조카가 한 사람 있을 뿐이었습니다. 남은 십만 달러는 자동적으로 그 조카에게 유산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그의 조카가 뜻밖에 십만 달러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고야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똑 같은 십만 달러인데 한 사람은 너무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다고 죽고 말았습니다.
앞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 몰랐고, 뒷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평소에 자족하기를 배웠더라면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자족함을 누리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히려 비천에 처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냐민지파 사람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많이 배웠고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서 일평생 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복음을 전한 자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고, 돌로 맞기도 했고 여러 차례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정처 없이 복음을 전해야 했기에 때로는 더위와도 싸워야했고 추위와도 싸웠습니다. 또 배고프고 목마르기도 했고 헐벗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의 그와 같은 비천한 처지에 대하여 단 한번도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절에서는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부자유한 바울이 감옥 밖에서 자유한 성도들에게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기쁨과 감사의 이유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하여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의 절망을 뛰어 넘어 웃음으로 나아가는 몇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웃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웃음을 사랑하면 그 웃음도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웃음은 마음의 청량제요 몸의 보약입니다.

둘째, 기쁜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먼저 웃음으로 기쁜 일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간직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억지로라도 웃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잘 웃는 습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유머라 할지라도 상대방에게는 마치 그 내용을 처음 듣는 것처럼 잘 웃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웃다가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경상도에 살던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서울로 전학을 갔습니다. 첫날 복도에서 뛰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이걸 보고 있던 서울 아이가 “얘, 이렇게 복도에서 뛰어 다니면서 소리 지르면 선생님한테 혼난다.”

그 때 경상도 아이가 대답하기를 “맞나?(정말로 그래)” 이에 서울아이 왈 “아니, 맞지는 않아!”

서울아이와  친해진 경상도 아이가 목욕탕에 갔습니다. 이 때 서울아이가 “저기 때미는 아저씨 있지, 정말로 잘 밀어!” 이 때 경상도 아이가 하는 말 “글라(그래?)” 이에 서울아이가 대답하기를 “긁지는 않고 밀기만 해!”

한번은 서울아이와 경상도 아이가 지하철을 탔습니다. 비가 오고 난 후라 지하철 안에는 습기가 차 있었습니다. 경상도 아이가 창문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서울아이가 말합니다. “그렇게 낙서를 하면 지저분해 지잖아!”

이 때 경상도 아이가 하는 말 “게안타, 나중에 문대버리면 된다 아이가!

이 때 서울 아이 왈 “안돼! 문을 떼버리면 큰일 나!”

넷째, 너무 우스운 유머를 알고 있거나 들었을 때혼자 간직하지 말고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웃는 얼굴을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거울 앞에서나 차를 운전할때 물건을 팔때 또는 살때 웃는 얼굴을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4년에 한 번씩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30세 이전의 얼굴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나 30세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삶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웃음을 찾아가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같은 상황에서라도 아직 내 곁에 남아있는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참으로 유익한 웃음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절망과 감사, 그리고 웃음은 동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삶의 특징은 자신의 비천함 속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예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시위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 시위대 사람들을 통하여 로마의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또한 바울은 감옥 속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여러 권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빌립보서를 비롯하여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네 권의 성경이 바로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에 기록한 서신들입니다. 그가 감옥 밖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보다 훨씬 더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만일에 그 당시 바울이 감옥 밖에서 복음을 전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유대인들의 핍박에  의해서 암살을 당했을 수도 있는 몸입니다.

그 당시 “내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하던 유대인들의 수가 4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갇혀있는 감옥은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하나님의 은신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비천에 처하여 계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거기에 있는 줄 믿습니다. 비천함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오늘 내게 있는 비천함들은 나를 자만과 교만, 불신앙에서 내 영성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그것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한번 더 부르고, 기도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은혜요 축복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삶 속에 있는 어려운 문제들, 비천함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자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천에 처했을 때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 합니다. 또 기도생활도 잘하고 겸손하게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다가 풍부에 처하면 열심이 뚝 떨어지고 교만해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풍부에 처할 줄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말씀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주위에 빙 둘러서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그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바울이 보니까 그의 마음속에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향해 외쳤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걷기도하며 뛰기도 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서 일제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아니요,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서 마치 신들에게 하는 것처럼 제우스신 제사장을 데리고 와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급히 자기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합니까? 이와 같은 헛된 일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우리가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풍부할 때는 먼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만 합니다. 또한 풍부할 때는 주의 거룩한 사업에 드리기를 힘쓰며,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풍부함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11절 말씀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 역시 에바브로 디도 편에 풍족한 선교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물질이 풍족해 져서가 아니라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물질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이 좀 더 있다고 해서 거만을 떨고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요, 얼마 안 있어 하나님께서 가진 것들을 다 거두어 갈 형편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물질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풍부에 부끄럽지 않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바다에 표류한 체 구명보트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망망한 바다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만약 저를 구해주신다면 저의 재산의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풍랑만 더 심할 뿐이었습니다.   

“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제 재산의 2/3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다시 아침이 되어도 구원의 손길은 닿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간절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제발 저의 이 간절한 기도를 받아주십시오. 제 목숨을 구해 주신다면 저의 재산 전부를...............”

그 때 다른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이봐, 거래를 중단해! 저기 섬이 보여! 그리고 배가 오고 있어” 그 때 이 사람은 “하나님, 아까 말한 것 취소입니다. 농담도 못합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풍부에 처할 줄 모르는 사람의 배은망덕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치 있게 사용하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감사하며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었입니까? 본문 13절 말씀을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예수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천에 처할 때도 자기의 비천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풍부에 처할 때도 풍부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 쉽고, 반대로 우리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자고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변함없으신 주 예수그리스도께 고정시키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14:29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잘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몸의 균형을 일어버리고 물 속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고,

히브리서 13:5절 말씀에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바다위에 작은 돌섬이 떠있습니다.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돌섬은 아무리 큰 풍랑이 휘몰아친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수만 톤의 군함이 와서 밀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함이 밀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돌섬이지만 그것이 지구 땅덩어리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연결되어있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한 어떤 풍랑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찬송가 455장 1절 가사처럼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서 보호를 받는 삶을 살기에 그 어떤 근심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 삶 속에 어떤 소용돌이가 쳐도 물결을 바라보지 말고, 바람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내가 비천에도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며 자족하시길 바랍니다. 감사는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온전히 맡긴자의 신앙고백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며 비천에도 자족의 비결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선함과 지혜로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풍부할 때에 그 풍부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필요로 하는 곳에 나눔으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자족하기를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명섭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