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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예배] 주 안에서 받은 신생(新生) (요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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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더불어 나누신 말씀을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인의 수는 약 6천명에 불과했는데, 이는 바리새인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서 율법의 본뜻을 망각하고 외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데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종교 법정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산헤드린 의원은 대단히 존경받는 지위였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필이면 캄캄한 밤중에 찾아온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꺼려한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와 가르침을 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그 자신은 물론이고 산헤드린의 동료 의원들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께서 온 종일 사람들을 대하시느라 너무나 바쁘시므로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을 만나 차분하게 대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쨌든 산헤드린 의원으로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구했다는 점에서 니고데모의 방문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

그러면 그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일까요? 본문에는 구체적인 설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에 비추어볼 때 필경 심각한 영적인 갈급함을 해결받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명예도, 재산도 다 가지고 있었으므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의 본질적인 결핍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뵙자 공손히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바리새인이요 관원인 사람의 입에서 이 같은 말이 나오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최상의 칭송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칭송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질문을 한 것도 아닌데도 이처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주님께서 이미 니고데모의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을 읽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전에 어떤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 나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니고데모 역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슨 선한 행실이 필요한가를 알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르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과 영생을 얻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날도 허다한 사람들이 선한 행실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전도를 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양심껏 살아왔고 남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람이 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는 성경에 박식한 랍비였지만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아이처럼 지극히 초보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사람이 거듭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았습니다. 어떻게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 날 수 있단 말입니까? 니고데모와 같이 사려 깊은 사람일지라도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층 더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그렇습니다. 거듭남의 진리는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람이 있음을 알고 느끼지만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은 누구나 다 부모님에게서 태어나는데 이를 자연적인 출생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부모의 유전인자를 받아서 태어나기 때문에 DNA를 검사해 보면 친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은 자연적인 출생과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출생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출생이 첫 번째의 출생이라면, 영적인 출생은 두 번째 출생입니다. 그래서 한자로는 ‘거듭’ 중(重) 자를 써서 중생(重生)이라 하고, 영어로는 born again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어 성경에서는 새 신(新) 자를 써서 신생(新生)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글 성경이나 영어 성경은 원문의 자구적인 번역에 충실하였고, 일본어 성경은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거듭남은 영적 출생 곧 신생(新生)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64억이나 되는 사람을 단 두 종류의 사람, 곧 자연인과 거듭난 사람으로 나누십니다.

자연인과 거듭난 사람의 차이점

그러면 자연인과 거듭난 사람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다릅니다. 자연인은 그 영이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이나 거듭난 사람은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상태입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영적인 일에 반응하도록 지음 받았는데, 자연인은 영이 죽은 상태이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1절로 12절에 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실상에 대하여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자연인은 박학한 학자라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캄캄절벽입니다. 자연인은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오직 이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흙은 어디까지나 진흙일 뿐이지 진흙이 황금이 될 수 없습니다. 소나 말은 어디까지나 짐승일 뿐이지 그것들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진흙과 황금, 짐승과 사람은 존재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인과 거듭난 사람은 존재의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는 이 땅에 속해 있으나 후자는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깨달아 알려면 거듭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테베에 있는 왕들의 계곡에서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바로였던 투탕카멘의 미이라는 화려하기로 유명합니다. 황금관 속에 황금색을 칠한 아름다운 마스크를 하고 황금 허리띠를 두르고 팔에는 팔찌를, 손가락에는 황금 손가락집과 반지들을 끼고 있었습니다. 허리띠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멋진 단검을 차고 있었고, 발에는 황금 샌들을 신고 있고, 발가락마다 황금 발가락집을 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투탕카멘의 미이라는 꺼멓게 부식된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화려한 겉모습, 그러나 그 속에는 말라 있는 미이라가 담겨 있었습니다. 비유컨대, 영이 죽은 자들의 실상이 이와 같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온 세상을 놀라게 할 업적을 이룰지라도 그의 영적 실상은 죽은 자에 불과합니다. 권력을 쥔 제왕이라도, 또는 손꼽히는 부자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육은 육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바로들이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듯이, 자연인은 누구나 죽음의 세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빈부귀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실상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영이 살아있으므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또한 영적인 세계의 일을 이해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어린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믿으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1.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2. 온 천하 만물은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이 가사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이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2장 6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듭난 자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서 그가 메시야이심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어디 은밀한 곳에 숨어 계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셨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비롯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드디어는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거듭남은 구원과 직결되는 중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새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고, 골로새서 3장 10절에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보여도 우리의 속사람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즐거움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물론,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성자(聖者)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적 어린아이에서부터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 점차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도 시험에 들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시험에 들어도 영영 멸망하지 않고 다시금 일어섭니다. 죄를 범하면 신앙양심에 가책을 받고 회개합니다. 이처럼 자연인과 거듭난 사람은 성향이 다릅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로 됨

그러면 사람이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에서 여러 번 말씀했듯이, 거듭남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9장 16절에는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우리가 제어할 수 없듯이 우리는 성령님을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를 입어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낳은 분은 부모님이시지 우리 스스로가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때 우리는 피동적인 입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출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람 편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화하시고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실 때 그 감화를 소멸치 아니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받아주옵소서”라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를 일컬어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회심은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사람에 따라서 회심의 외적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회심은 차분한 가운데 이루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격정적인 변화가 수반되기도 합니다. 니고데모의 회심에 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없지만, 요한복음 19장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고 나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장례를 도왔습니다. 그가 더 이상 예수님께 대한 자기의 태도를 숨기려 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예수님을 만나 뵌 이후 거듭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도 바울의 회심은 매우 격정적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광채가 얼마나 강렬하던지 그와 그의 일행이 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엎드려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부터 사흘 동안 바울은 앞을 보지 못한 채 골방에서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회심은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용한 회심이든, 극적인 회심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심하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회심은 세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곧 인생의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향을 결정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로 생활 속에 새로운 변화가 하나씩 생겨납니다. 이전의 악한 습관을 버리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반드시 그 다음 단계인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죄 당하신 것을 보고는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들이 말하기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심히 큰 가책을 받고 괴로워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회개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그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온전한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단계를 넘어서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죄 있는 모습 그대로,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용서를 구할 때, 그 회개는 ‘생명 얻는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행 11:18).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결국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 말씀은 믿음이 거듭남과 관련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회심과 거듭남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회심과 중생은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다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회심과 중생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회개한 것 같지만 실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회개의 영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믿음 역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증거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성도님들은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 속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영원히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임재하셔서 동행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방황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고 믿음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려주신 덕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이제 우리가 힘쓸 것은 거듭난 사람답게 매사를 믿음으로 행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장을 멈춘 아이는 부모를 근심되게 하듯이, 영적 성장을 멈춘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근심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성장해 나감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답게 언제나 새롭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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